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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강의 왕을 기다리는 마음 (사 6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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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저는 지난주에 참 좋은 책을 읽었습니다.
어렵고 난삽한 신학 서적만 읽다가 오랜만에 편안한 글을 읽었습니다.
서강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인 장영희 씨가 쓴 '하필이면'이라는 글이었습니다.

장영희 교수는 생후 1년 만에 두 다리를 못쓰는
소아마비 1급 장애인이 되었지만 역경을 딛고 일어섰습니다.
유명한 영문학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빼어난 문필가가 되었습니다.
장영희 교수는 3년 전에 완치됐던 유방암이 다시 척추암으로 전이돼 치료를 받았지만
아직 충분히 회복도 안된 상태에서 학교로 돌아가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하필이면'이라는 에세이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때 십대들이 즐겨 부르던 유행가 중에 '머피의 법칙'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화장실이 있으면 휴지가 없고, 휴지가 있으면 화장실이 없고,
미팅에 가도 하필이면 제일 맘에 안 드는 애랑 파트너가 되고,
한 달에 한 번 목욕탕에 가도 하필이면 그 날이 정기휴일이고."

아마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다 한 두 번 이상 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왜 다른 사람의 인생은 별 노력도 하지 않고 복이 넝쿨 채 굴러드는 것 같은데,
왜 하필이면 내 인생은 꼬이는 일이 많은 지, 아마 다 몇번쯤은 그런 경험을 가졌을 것입니다.
저 역시 제 머리를 단골로 깎아주는 남자 미용사가 있는데
바쁜 시간을 쪼개서 미용실에 가는 날이면 하필 그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큰맘 먹고 세차를 했는데 왜 하필이면 그날따라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세차한 것이 무용지물이 되는 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사기 위해서 줄을 서면 바로 하필이면 바로 내 앞에서 매진될 때도 있습니다.

또한 제 사무실 책상에는 서랍이 세 개가 있기에 열쇠도 세 개입니다.
열쇠마다 표시를 안 해놓아서 서랍을 열 때마다 세 개를 다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수학적인 확률로 보면 33% 정도인데 이상하게도 확률이 맞을 때가 거의 없습니다.
항상 한 두 번씩 세 개의 열쇠를 바꿔가면서 돌려야지 서랍문을 열 때가 많습니다.

장영희 씨 역시 이와 같은 '왜 하필이면 나에게'라는 경험을 수도 없이 많이 했습니다.
한 번은 장영희 씨가 서울 시내를 걷고 있는데 어깨에 새똥이 떨어졌습니다.
1천만 서울 인구 중에 새똥 맞아 본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인데
왜 하필이면 그게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는지 '하필이면'의 운명에 경악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자신이 소아마비 중증 장애인인 데다가 유방암과 척추암까지 걸렸으니
왜 하필이면 이런 얄궂은 운명이 나에게만 닥치느냐고 푸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영희 교수는 '하필이면'이
전혀 다른 생각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길거리에서 귀여운 팬더곰 인형을 사서 초등학교 2학년 짜리 조카에 주었더니
반응이 의외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모, 이걸 왜 하필이면 내게 주는데?"
다른 형제나 사촌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하필이면'이라는 말로 이 선물을 자기가 받아야 되는지 고맙게 생각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장영희 교수는 아주 중요한 진리를 하나 깨달았습니다.
'하필이면'이라는 것이 생각을 바꾸기만 하면
굉장히 감사하고 은혜스러운 일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나만 손해보고, 나만 억울하고, 나만 기분 나쁜 일이 비일비재로 일어나는가, 
이 부정적인 '하필이면'에 대한 사고를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니까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감사와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장영희 교수는 '하필이면'에 대해서 고쳐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니까 감사 아니고 축복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이면 내가 훌륭한 부모님 밑에 태어나
좋은 형제들과 만나 이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있는가.
이 세상에 굶어죽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데
왜 하필이면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잘 먹고 잘 사는가. 
생각하는 것마다 감사하고 축복 아닌 일이 하나도 없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도 똑같은 사건이요 똑같은 사물이지만 관점을 바꾸어보시기 바랍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내리교회로 불러주셨을까요.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체 중에서 인간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넓은 들판 가득히 콩알을 널어놓고 하늘 꼭대기에서 바늘 한 개를 떨어뜨려 콩 한 알에 박히는 확률과 같다고 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날 그 억만 분의 일의 확률이 왜 하필이면
우리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감사한 일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필이면'을 부정적인 관점이 아닌 긍정적인 관점으로 해석할 때
감사 아닌 일이 없고, 축복 아닌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생을 기다리는 계절, 대강절>
오늘은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강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이 대강절 기간 내내 여러분은 '왜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은혜와 복을 주시는가'
감사와 은혜가 넘쳐나는 절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교회력으로 볼 때 두 절기가 아주 중요합니다.
사순절과 대강절입니다.
사순절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을 기리는 절기입니다.
부활절에 이르기 전까지 40일 동안의 수난 절기인 것입니다.
대강절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절 전의 4주간을 말합니다.
대강(待降), 즉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절기인 것입니다.
강림절 혹은 대림절이라고 하는데 모두 뜻은 같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이지요.

사실, 예수님의 초림(初臨)은 지금으로부터 2 천여년 전에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 시대의 대강절은 예수님의 재림(再臨)을 기다리는 절기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가장 겸손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이 남자를 알지 못하는 소녀의 태를 빌어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짐승들이 잠드는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께서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은 다릅니다.
영광의 주요 심판주로 우리 곁에 오실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오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대강절이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땅위에 처음오신 아기 예수님과 장차 구름을 타고 오실
재림구주 예수님을 소망과 기쁨 중에 기다려야 합니다.

성탄절이 가까워지고 연말연시가 되면 거리는 흥청거리기 쉽습니다.
마음이 바빠지고 왠지 모르게 들뜬 분위기 속에 빠지기 쉽습니다.
게다가 세상은 여전히 불안하고 지구촌에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미움과 싸움과 염려와 슬픔이 온 세상에 가득 차 있습니다.

쌀 협상 비준안이 국회에서 통과됨으로서 350만 농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습니다.
황우석 교수는 난자 취득의 윤리성 문제로 전 세계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습니다.
작년이나 금년이나 사건이 그치는 법이 없고 가난한 서민들의 탄식소리는 높기만 합니다. 

<평강의 왕을 기다리는 마음>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평강의 왕(the prince of peace, 사 9: 6)으로 오셨습니다.
어둠과 슬픔과 분노와 죄악과 절망으로 찌든 세상에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표준 새번역 사 2: 4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닙니다.
사 11: 6-9 메시아 예수께서 통치하시는 세상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 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평강의 왕 예수께서 통치하시는 세상의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이 메시아 예수님께서 통치하실 평강과 공의의 나라를 바라보며
대강절을 의미있게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강의 왕 예수님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맞아야 할까요?
오늘 봉독한 사 64: 1-9절은 아무 소망도 없이 무기력하게 압제받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문은 세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① 먼저 1-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강림을 간절히 소원하는 내용의 기도입니다.
그 옛날 출애굽 당시 시내산에 강림하신 주님의 권능과 영광이 또 다시 임하길 기도합니다.
2절에 보면 마치 불이 섶을 사르듯이, 불이 물을 끓이듯이 주님의 대적자들에게
주님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이방 나라들이 주님 앞에서 떨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세상만방에 알게 해달라는 기도이지요!

그렇습니다.
평강의 왕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강절 기간 동안 우리는
이 세상이 주님의 권능을 인정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위엄과 권세 앞에 모든 불의한 세력들이 무릎을 꿇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와 통치를 간절히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② 그 다음에 5-7절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에 대한 고백이 있습니다.
5-7절 말씀을 보세요.
먼저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주님은 정의를 기쁨으로 실천하는 사람과,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과,
주님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모습은 오랫동안 죄를 지어 주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으로부터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악이 얼마나 부정한지 우리의 의라고 하는 것이 더러워진 의복과 같고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말 시든 나뭇잎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와 통치를 간절히 대망하지만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습니다.
아무도 만지기를 싫어하는 더러운 옷같이, 시든 잎사귀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7절 말씀처럼 아무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없고, 주님을 굳게 의지하려고
분발하는 사람도 없어서,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실 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대강절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가 온 세상에 두루 임하기를 앙망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니 너무나 죄악으로 가득차
감히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기대할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③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토기장이가 되시는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8-9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여기에 보면 우리가 비록 죄를 지어 더러운 의복같이 마른 잎사귀처럼 되고 말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돌보아주실 책임이 있는 아버지시요 토기장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이 우리를 돌보십니다.
진흙으로 토기를 빚는 토기장이와 같이 우리 인생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고개를 들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시요, 우리를 지으신 토기장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우리의 죄가 많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과 자비로 용서하십니다.
그래서 9절의 기도처럼 우리는 "주님,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
"우리의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빚은 토기인 까닭에
하나님께서 친히 돌보시고 책임져 달라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희망하지 않는 것은 죄악입니다>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은 이러해야 합니다.

첫째로, 온갖 죄악과 불의가 난무하는 이 세상에 놀라운 영광과 권세로 임하게 될
주님의 임재와 통치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오늘 우리의 죄인된 모습에 대한 분별력과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견딜만한 자격이 없는 죄인들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셋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시요 우리를 빚으신
토기장이이시기에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한없는 긍휼과 자비 때문에 아무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얻었습니다.

꿀벌은 본래 몸통에 비해서 날개가 너무 작아
제대로 날 수 없는 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꿀벌은 자기가 날 수 없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당연히 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날갯짓을 함으로서 정말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본래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꿈도 꿀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 한 우리는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대망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강절 기간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대망하며 희망을 가집시다.
아무리 이 세상이 죄악과 불의로 가득차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평강과 공의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읍시다!

헤밍웨이는『노인과 바다』라는 소설에서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바보짓이다.
희망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It is silly not to hope. It is a sin.)이라고 말했습니다.

평강의 왕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세상이 하나님의 평강과 공의로
가득찬 하나님의 나라로 변할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맙시다.
여러분 모두 감사와 희망으로 평강의 왕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아멘.

"인간은 망가질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중에서.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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