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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 같은 사람도 쓰신다 (막 10: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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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같은 사람은 우유부단 하지만 따뜻하다. 달 같은 사람은 차갑지만 침착하다. 불같은 사람은 상처를 많이 주지만, 열정적이다. 물 같은 사람은 드러나지 않지만, 환경에 잘 적응한다. 나무 같은 사람은 고지식하지만, 밝고 마음이 착하다. 쇠 같은 사람은 날카롭고 무겁지만 듬직하다.

흙 같은 사람은 좀 지저분해도 포근한 사람이다. 사람들마다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떤 기질이 유독 좋다고 말할 수 없다. 각 기질마다 강점과 약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야고보는 복수심이 강한 인물이다. 그의 단점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어부로 부르셨을 때, 아버지와 삯꾼들과 배와 직업을 내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다(막1:19-20). 화끈한 성격이 야고보의 장점이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장점은 더욱 살리고, 단점을 덮어야 한다.

1. 불같은 사람은, 자신의 열심을 분별하라.

야고보는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예수님의 으뜸 되는 제자였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가까운 거리에서 항상 함께 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칠 때도(막1:29),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칠 때도(막5:37), 변화산 체험(마17:1)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도(막14:33), 예수님의 사역을 직접 목격하였다. 무슨 일이든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축복의 사람이었다. 이들은 남다른 열심과, 야망이 있었다(막10:35-45).

예수님의 으뜸 되는 제자들은, 다혈질과 점액질의 사람인데, 이들은 자신이 항상 주도권을 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자신들에게 알리지 않고, 무슨 일들을 하면 견딜 수 없어한다. 자신이 모두 다 알아야 직성이 풀리기에, 자꾸 다른 사람들의 형편을 묻는다.

이들은 모두 다 열심히 일하기에 칭찬을 받을 수도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 때 다혈질과 담즙질은 다르게 행한다. 담즙질은 지나치게 목표 지향적이기에, 잔인해질 수 있다. 뒤끝이 분명하게 있다. 한번 보복하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보복하기에, 친구에게 결국 멀어질 수 있다.

“너 죽여”했을 때에, 다혈질은 그냥 잊어버리거나, 자신이 그런 말을 했는지조차 모른다. 반면에 담즙질은 진짜로 끝까지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바로 담즙질이다. 반면 다혈질은, 보복하려는 마음이 없다. 갱단의 두목, 독재자, 재벌, 등이 담즙질의 유형이다.

다혈질과 담즙질 사람들은, 화를 잘 낸다. 다혈질 사람은 화를 내고는 후회 하지만, 담즙질 사람은 자신이 화나게 만들어 놓고, 다른 사람이 그 일로 얼마나 가슴 아파하는지 모른다. 우울질과 점액질 사람들은, 화를 낼 용기가 없어, 구시렁거린다. 용기가 없기에, 두려워서 새로운 일을 주저한다.

야고보는 무척 성격이 급한, 불같은 사람이다. 오직 했으면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보아너게’(분노의 아들, 우레의 아들)라는 별명을 붙여 주셨을까?(막3:17) 사람의 됨됨이는 이름보다, 별명에서 더 잘 나타나는 법이다. 오늘 본문에 분노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먼지 나는 길을 걸어서 왔기에 피로가 겹치고, 햇볕은 매우 따가웠다. 일행은 시원하게 발도 씻고 싶고, 따뜻한 음식이 그리워졌으며, 편안히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 여행자들을 맞아 주지 않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이렇게 말했다.

“주여 (엘리야가 한 것처럼 역시)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9:54). 자신들이 냉대를 받았다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 모두 태워버리자고 말했다. 야고보는 불로, 화풀이를 하기 원했다. 이렇게 복수심이 투철한 사람들이, 바로 담즙질이다.

사마리아인은 앗수르와 유대인과의 혼혈족이기에, 유대인은 이들을 아주 무시했다. 이런 자들에게 무시를 당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억울했다. 그래서 불로 태워버려도 된다고 생각했다. 야고보의 자만심과 분노는 복수심에 불타, 불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다 쓸어버리고 싶었다.

야고보는 모욕을 참지 못하는 성미와,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파멸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역사를 보면 이런 일이 종종 있다. 중세 암흑시대의 마녀 사냥과 히틀러와 같은 유대인 학살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이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학살할 때, 자기의 잔인한 행동을 합리화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피 값을 치르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오해하여,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과 헌신을, 종종 잘못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다. 교회와 목사님에게 아주 충성하다가, 자신의 자존심이 상처를 받게 되면, 그 교회가 무너지기를 원하고, 목사님을 죽이려고 한다. 용의주도하게, 엉뚱한 소문을 흘린다. 바로 이런 사람이 담즙질의 사람이다.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힘을 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전에, 자기 열심과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야고보를 부르신 목적은, 사람을 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다. 야고보에게 주신 사명은, 심판자가 아니라 전도자다. 따라서 분별의 영을 달라고 기도하라.

2. 불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힘으로 일하라(막10:35-45).

야고보는 예수님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은 아무 것도 없지만, 언젠가 큰일을 하실 분이기에,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야망을 실현해 보려는 기대가 컸다.

사람은 누구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어 한다. 예수님을 믿는 중에도, 세속적인 욕구를 가지고 믿는 분들이 많다. 예수님의 도움을 얻어, 자신의 뜻과 야망을 이루려는 사람이 있다. 주님의 뜻과는 너무 다른 야망을 이루고 싶은 사람이다. 야고보가 그랬다.

그래서 주님은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져, 능욕 당하고 죽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자리다툼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이렇게 세속적인 야망, 높아지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은 다툼을 일으킨다. 높아지려는 마음은 주님의 제자들이라도 분열시키고, 분쟁하게 만든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힘이 있다. 분노도 그 중에 하나의 힘이다. 분노는 엄청난 힘이 있다. 분노가 일어나면 평상시와 다른 힘, 이상한 열심을 가지고 일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결코 분노로 일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행동 근거는 사랑이 되어야 한다. 분노가 되면 안 된다.

헬라어의 대가 ‘로버트슨’ 이라는 분이, 요삼9절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를 자신의 마음대로 교회를 지배하려는 사람이라는 글을 써서, 교회잡지에 기고했는데, 전국 각지에서 자신을 어떻게 알고 인신공격하느냐? 나에 대한 모독이라며 항의를 했다고 한다.

글을 취소하지 않으면, 정기구독을 취소하겠다고, 편집자에게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한국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분열과 분쟁의 문제다. 분쟁하는 교회는 특징이 있다.

그 교회의 열심 있는 성도들이, 분노를 가지고 일한다는 특징이다. 어떤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면, 일부가 갈라져 나와서, 그 옆에 다른 교회를 세운다. 이 사람들의 기쁨은, 상대에게 괴로움이 되고, 상대가 부흥이 안 되면,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고 기뻐한다.

이렇게 갈라진 교회가 부흥하는 경우는, 별난 열심 때문이다. 저쪽 교회보다는 더 나아야 한다는 경쟁심에서 비롯된 열심이다. 그래서 보통 때는 열심 없던 사람이 열심을 내고, 헌금 안하던 사람도 앞장서서 헌금한다. 당장 교회를 세워야 하기에, 헌금도 전도도 열심히 한다.

이렇게 교회가 갈라졌을 때, 수적으로 훨씬 더 많아지기에, 싸움도 하나님의 뜻이라면서, 합리화 한다. 하지만 그 뿌리를 바로 볼 필요가 있다. 그 뿌리는 바로, 오로지 저 교회보다 나아져야 한다는 생각뿐인, 시기, 질투, 경쟁심뿐이다.

이렇게 10년 쯤 지나면 미움이 사라지기에, 경쟁심이 사라진다. 이 경우 또 다시 뜨거워지려면, 또 싸워야 한다. 또 하나의 적을 만들어야 한다. 그 교회의 성도들은 이미, 분노해야만 일하는 체질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은혜 받아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분노해야만 움직이는 성도는 문제가 있다.

결국 갈라진 교회는, 다시 분열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또 다시 미움과 경쟁으로 세월을 보내게 된다. 우리 주변에 이런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가? 갈라지고 거기서 또 갈라져 나온다. 한국 교회가 자꾸만 약화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마귀가 던져준 분노의 힘을 가지고 일하려 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교회는 분노로 일하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기쁨으로 일해야 한다. 세상에는 분노를 조장하는 세력이 있다. 마귀는 그 힘으로 일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그 이유도 모르고 분노할 때가 있다. 분노를 자극하여, 그 분노를 이용하는 세력에게 속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를 보라. 이슬람 과격단체인 알카에다를 보라. 데모를 하는 사람들을 보라. 전부 분노의 힘으로 일한다. 그러나 분노로 일하기 시작하면, 결과는 파멸뿐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분노로 일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으로 일하는 존재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10:44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섬기는 인생이 되면, 어느새 분노는 사라진다. 사람은 교만하기 때문에 분노하게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낮아진다면, 분노가 아닌 순종만이 있게 된다.

분노로 이글거리며 명예욕에 강했던 야고보도, 예수님을 따르다가, 철저히 섬기시는 예수님을 보고 섬기는 제자가 변화되었다. 우리도 분노가 아니라, 섬김과 순종을 통해 변화 받는 인생,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종이 되기 바란다.

3. 불같은 사람은, 믿음을 위해 순교한다(행12:1-2).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악명 높은 헤롯왕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는 유대인에게 인기를 얻고, 자기 입지를 굳게 하기 위해 교회를 핍박했다. AD 44년 기독교인을 박해하면서, 교회 지도자들을 치는데, 그 표적으로 야고보를 지목했다. 야고보는 열정적으로 전도하는 사람이었기에, 유대인들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열성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체포당하게 했다. 성경에 기록된 제자들의 죽음은, 가룟 유다와 야고보뿐이다. 야고보는 스데반과 함께, 믿음을 위하여 죽은 자들의 선구자가 되었다. 막10:39절에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했을 때, 야고보는 주님의 잔을 마시겠다고 대답했다.

그때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말했지만, 그는 결국 주님께서 주시는 잔을 마시는 자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마셨던 죽음의 잔을 이어서 마시는, 최초의 제자가 되었다. 야고보는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열심히 전하다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잡혔다.

야고보를 죽이려고 끈질기게 따라다녔던 헤롯의 신하 ‘요시아’는 거짓 증거를 대고 야고보를 잡아들였다. 요시아는 야고보가 죽음을 앞두고, 겁에 질려 창백한 얼굴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렇지만 야고보는 오히려, 마치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장수처럼, 밝고 기쁜 모습이었다.

결국 요시아는 야고보의 용기와, 그리스도에 대한 굳건한 헌신에 감격하여, 야고보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야고보가 마지막으로 사형 당할 때, 이 사람이 뛰어 올라왔다.

“야고보 선생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당신을 계속 괴롭혔습니다. 당신을 계속 추격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정말로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당신 속에 있는 그 평화, 그 은혜는 세상이 어떻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기 원합니다.”

그때 야고보는 쇠사슬에 묶인 그 팔로 그를 안아 주면서 “주님의 용서가 당신의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하면서 목을 껴안고 기도했다. 손을 내밀어 자신의 형제로 삼았다. 헤롯의 칼 앞에 둘은 죽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 보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질을 아름답게 다듬어 쓰신다. ‘분노의 아들’이라는 기질을 가진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성령의 역사로 최초의 순교자와 사랑의 사도로 바뀐다.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고도, 담즙질의 약점을 드러내며 살았던 야고보지만, 분명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야고보는 예수님과 동행하자, 예수님의 인품과 능력을 통해, 야고보는 변화될 수 있었다. 그래서 주님과의 동행이 중요하다. 주님과 동행하다보면, 우리 성격이 변한다. 태도가 변한다, 삶의 목표도 변한다. 주님과 동행하다보니까, 예수님과 똑같은 심정으로 헌신하는 모습으로 변했다.

사랑하면 통하게 된다. 텔레파시가 통한다. 사랑하면 그가 아플 때 나도 아프고, 그가 그리워지면 나도 그리워진다. 떨어져 있어도 그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순교의 원동력은 영적 체험에 있다. 주님을 만나면 변한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오순절 성령강림의 체험을 통해, 순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했다. 복수심에 불탔던 사람도, 순교할 수 있고 세상 야심을 가졌던 사람도 순교할 수 있다. 인간의 열심이 하나님을 향한 강한 섬김으로 바뀌었다.

결론입니다. 야고보는 성령 안에서 변화를 받아, 열정적으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었다. 세속적인 야망을 가졌던 야심만만한 사람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기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헌신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삶에 아름다운 변화가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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