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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만난 자리 (눅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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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 헨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1968)라는 분을 아시죠? 그녀는 미국 앨라배마 출신으로 유명한 저술가, 사회사업가, 교육가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3중장애인(청각장애인, 시각장애인, 언어장애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생후 19개월 만에 열병에 걸려 3중장애를 안게 됩니다. 그녀는 1904년 하버드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했는데, 장애인으로 대학을 졸업한 세계 최초의 인물로 세계의 장애인들에게 희망의 빛이 됩니다. 그래서 그녀를 가리켜 <빛의 천사> <3중고의 성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생애 가운데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만남’ 때문입니다. 장애로 고통 받던 어린 시절 부모도 어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7세에 설리반 선생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만남이 인생을 바꾼 겁니다. 설리반 선생님과의 만남은 그렇게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런 만남을 가리켜 흔히 ‘운명적 만남’이라고 합니다.

  비단 그 사람뿐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도 누구와 만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떤 부모, 형제, 친구, 선생님, 배우자, 선배, 후배를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만남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역사 상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생이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12사도가 그랬고,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그랬고, 그 외에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그랬습니다. 그런 일은 오늘도 여전히  나타납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 살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것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만남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의할 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되 ‘어떻게 만나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스쳐 지나갑니다. 그런 만남은 형식적입니다. 일시적이고 표면적입니다. 쉽게 말하면 건성으로 만나는 겁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만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특별한 영향이 없습니다.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는 사람만이 우리 인생에 영향을 끼치고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 듣습니다. 교회에 출석합니다. 그리고 신앙 고백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만남이 건성으로 이뤄지면 곤란합니다. 진정한 만남, 생생한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우리 인생에 변화를 일으켜 주십니다. 죽을 인생이 영생하는 인생으로, 저주의 인생이 축복의 인생으로, 실패의 인생이 승리의 인생으로, 어둠의 인생이 빛의 인생으로, 무의미한 인생이 의미있는 인생으로, 무가치한 인생이 가치있는 인생으로 변화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이런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마치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결정적인 만남의 순간이 많을수록 우리 인생은 놀랍게 변화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일생 중에 그런 만남을 여러 번 가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인생의 큰 변화를 체험했고,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예수님과의 이런 놀라운 만남이 있기를 바랍니다. 과거에 있으셨다면, 오늘 또다시 만나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혹 그런 만남이 없으셨다면 이번에 꼭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앞으로도 계속 이런 뜨거운 만남이 이뤄지기를 축원합니다.

[1]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의 변화 : BC에서 AD로, 새사람으로 변화   
  베드로는 사실 그 전에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그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후 수개월간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별다른 변화도 없이 예전처럼 갈릴리 바다(게네사렛 호수)에서 어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본문 사건을 계기로 예수님을 다시 만난 것입니다. 이 만남은 건성으로 표면적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만남이요 영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재발견한 셈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전지전능하신 분임을 깨달게 된 것입니다. 단적으로 그가 예수님을 부른 칭호의 변화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 예수님을 향해 “선생이여!”(5절)라고 부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과의 뜨거운 만남을 통해 “주여!”(8절)라며 새로운 칭호로 부르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새로워졌다는 증거입니다. 단순한 선생님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님으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만남을 통해 베드로는 놀라운 변화를 체험합니다. 그 변화는 마치 인류 역사가 예수님의 오심으로 B.C.(Before Christ)서 A.D.(Anno Domini)로 바뀐 것과 같이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 변화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죄인의 인식 :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자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 자신이 얼마나 누추한 죄인인지 인식하게 됩니다. 8절 보면, 그는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고백합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죄인의 인식은 구원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리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입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인데, 죄인의 인식이 없어서 자신이 의인인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의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상관이 없습니다.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만이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② 구원의 기쁨 : 베드로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자 죄를 애통해 하면서 부르짖습니다. 8절. “주여! 나를 떠나소서!” 그러나 예수님을 그를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감싸 안아주셨습니다. 그에게 죄 사함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본문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그는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받은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천국의 기쁨입니다.

  ③ 능력의 사람 : 베드로는 자기 깐에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어부라고 큰소리쳤지만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무능력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엄청난 고기를 잡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기술로 하지 못하던 것을 해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얼마나 능력 있는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까? 십자가 복음을 전하니까 3천명, 5천명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일이며,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일어나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이며 ... 정말 대단합니다. 이 모든 게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④ 인생목적의 발견 :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저 고기나 잡으며 하루 하루 살다가 죽을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생의 목적이 생겼습니다.  이제는 사람을 취하는, 다시 말해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위해 살다가 영원히 멸망하는 인생이 아니라, 이제 영생을 누리며 그 복음을 전하며 사람을 구원하는 새로운 인생목적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는 불학무식한 어부가 아니라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될 수 있었습니다. 

[2] 예수님을 만난 자리 : 고난, 말씀, 순종
  그러면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님을 생생하게 영적으로 체험적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자리는 과연 어떤 곳이었습니까?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외적으로 보면 게네사렛 호수(갈릴리 바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① 고난의 자리 :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얼마나 허탈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뜨겁게 만났습니다. 여러분! 고난은 우리에게 힘겨운 것이기도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큰 유익이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인간이 잘 나갈 때는 교만해지기 쉽고,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예수님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난 중에는 예수님을 봅니다. 사실은 예수님이 늘 가까이 와 계셨습니다. 그런데 형통할 때는 잘 보지 못했던 겁니다. 그러다가 고난 중에 예수님을 재발견하게 된 겁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실패의 자리, 고독의 자리, 고통의 자리, 고난의 자리가 ‘위기’ 같지만 오히려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위기’(危機)라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위험(危險)하지만 기회(機會)입니다. 영어에서 위기를 ‘crisis’라고 하는데 이 말은 어원적으로 ‘나누다’ ‘선을 긋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획을 긋는 ‘분기점’이란 뜻을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위기는 흥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는 분기점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 하면 하나님을 만나 크게 변화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아버지와 형을 속여 장자 축복을 얻게 됩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형 에서는 복수심에 불탑니다. 잘못 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위기 상황에 그는 멀리 밧단아람으로 도망합니다. 몇날며칠을 달려가다 지친 몸으로 빈들에서 돌베개 하고 잡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꿈속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천사가 사닥다리로 오르락내리락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 그는 깜짝 놀라 깨어나 외칩니다. 창28: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 하였도다” 그 전에도 야곱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새롭게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자 용기가 생깁니다. 돌베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습니다. 기름은 그 당시 전 재산입니다. 그만큼 두려움이 없어진 겁니다. 그는 그 담대한 신앙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20년 타향살이를 성공적으로 마칩니다. 큰 가문을 이루고, 거부가 되어 금의환향합니다. 위기 속에 만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또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사울에게 쫓겨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죽음의 위기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위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났고 보호하심을 받았습니다. 그후 그가 노래한 시가 시편 18편입니다. 시18:1~2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고난 가운데, 위기 가운데 다윗은 ‘나의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실패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고난 중에 좌절하지 마십시오. 그때 우리 예수님이 다가오십니다. 만나주십니다. 위기가 변하여 축복과 승리의 기회가 됩니다.  빈 배가 만선이 되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부디 예수님을 만남으로 이런 놀라운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② 말씀의 자리 :
  베드로가 허탕을 치고 그물을 씻은 후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군중을 몰고 오시더니 말씀을 전하는 데 필요하니 배를 빌려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배를 타고 떨어져서 말씀을 전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베드로를 잡아두시려는 뜻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전에 본 적도 있어서 거절하지 못하고 배를 제공합니다. 이렇게 되니까 꼼짝없이 앉아서 말씀을 듣게 된 겁니다. 그러다가 은혜를 받은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말씀을 마치고 돌아가려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명령을 따를 수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버럭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겨우 겨우 참고 기다렸는데 또 엉뚱한 말을 하니 분통이 터지는 거죠. 그런데 고분고분 하는 걸 보면 분명히 은혜를 받았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말씀을 듣다가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을 들으면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이 생깁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 ”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는 갈멜산에서 큰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이 이를 갈며 죽이겠다고 말하자 혼비백산 도망갑니다.(열왕기상 19장) 한참 도망가서 로뎀 나무 아래에서 낙심천만한 모습으로 죽기를 구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떡과 물을 주시고 잠을 푹 재우십니다. 그 후 육신의 힘을 얻은 엘리야가 호렙산으로 달려갑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세미한 음성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때 엘리야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납니다. 말씀의 자리에서 새 힘을 얻는 그는 남은 생애 사명을 완수합니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며 20세기 최고의 심리학자인 칼 융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명성을 듣고 미국의 백만장자가 비행기 타고 찾아왔습니다. 그는 불면증에 시달리며 온 몸이 아픈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융은 특별한 치료도 해주지 않은 채 소개장을 하나 써주면서 한 수도원장을 찾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모스크바 근교의 수도원 원장을 찾아갑니다. 수도원장은 시키는 대로 하겠느냐고 확인하더니 하루 동안 주기도문을 3백번 외우고 말합니다. 황당했지만 별 수 없이 따릅니다. 그 다음 날에는 6백 번을 외우라고 말합니다. 그런 주문이 계속됩니다. 하루에 3백번씩 보태집니다. 드디어 6천 번 외우는 날입니다. 막 주기도문을 외우려고 하는데, 몸속에서 이상한 힘이 느껴졌습니다. 완치된 것입니다. 불면증이 싹 사라지고, 온 몸이 아픈 것도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말씀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이런 기적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③ 순종의 자리 :
  예수님이 말씀을 마친 후 베드로에게 명령하십니다. 4절. “ ...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그런데 놀랍게도 베드로가 순종합니다. 자기의 지식과 경험으로 보면 도무지 말도 안 되는데 말입니다. 5절. “ ...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 ” 6절 보면 순종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그리한즉’ 그랬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순종했더니! 이런 뜻입니다.

  순종은 말씀의 임상실험과 같습니다. 말씀은 진리입니다. 능력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을 만나고 큰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할 때 진리가 드러나고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말씀을 자주 들으면서도 삶의 현장에서 순종하지 않으면 형식적이 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중지되기 쉽습니다. 심지어는 부작용까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선교사 한 분이 아프리카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 식인종에게 붙잡혔습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추장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추장 앞에서 고개를 들고 보니 추장이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같았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신학교에서 잠시 함께 공부했던 아프리카 학생이었습니다. 너무 반가워 추장에게 이야기했더니 알아봅니다. 이젠 살았구나 싶어서 슬쩍 물었습니다. “신학 공부까지 하고 돌아왔으니 그동안 많이 변화되었겠군요!” 그랬더니 추장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럼요. 예전에는 사람을 그냥 잡아먹었죠. 그런데 이제는 반드시 식 기도를 하고 먹소이다.” 말씀을 배웠지만 자기 족속에게도 돌아가 지도자 노릇을 한답시고 예전의 풍습과 문화에 그대로 타협해 버리니까 겉모양만 변했지 진정한 변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이 없으면 오히려 바리새적인 신자를 만드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5장에 나오는 아람 나라 군대장관 나아만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겁니다. 그가 문둥병에 걸려서 멀리 이스라엘 땅까지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안수기도도 해주지 않고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고 말합니다. 화가 났지만 부하들의 만류로 마음을 돌이킨 그는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습니다. 일곱 번까지 순종합니다. 그러자 마치 어린아이 살결같이 완치되는 기적을 체험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순종의 자리에 하나님이 나타나 만나주시고 기적을 베풀어주신 겁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지식과 이론이 기본적으로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곤란합니다. 실존하는 하나님,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계속 뜨겁게 만나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베드로는 고난의 자리에서, 말씀의 자리에서, 순종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도 그런 만남을 날마다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변화된 것처럼 변화되어 실패의 인생이 아니라 승리의 인생, 어둠의 인생이 아니라 빛의 인생, 저주의 인생이 아니라 축복의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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