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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대적 감사생활 (합 3: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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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감사생활 (합3:17-18)

이 시간에 “절대적 감사생활”이라는 제목입니다. 감사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감사와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상대적인 감사는 환경과 조건의 영향을 받아 기분 좋으면 감사하고 기분 나쁘면 불평하고 잘되면 감사하고 잘 안되면 불평합니다. 자기 뜻대로 되면 감사하고 자기 뜻대로 안되면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감사는 환경과 조건의 영향을 받지 않고 어떤 환경과 어떤 형편에서든지 감사합니다. 이 절대적 감사야말로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진정한 감사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어려운 가운데서도 감사했던 진정한 감사자들을 봅니다. 가령 하박국이라든지 욥 다니엘 바울 기타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감사는 한결 같이 절대적 감사였습니다. 감사할 수 없을 때 감사했습니다. 어떤 방해도 이기는 생명 걸고 하는 감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절대적 감사의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절대적인 감사를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감사자들의 감사의 특징을 보면서 함께 은혜 나누길 원합니다.

1. 먼저 하박국의 감사는 믿음의 감사였습니다.

그의 감사가 합3:17-18절에 나타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은 전쟁의 소문을 듣고서도 그리고 추수하지 못했어도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생각해 볼 때 전쟁처럼 무참하게 인명과 재산을 앗아가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특히 무수한 인명이 살상 당할 것을 예고하신 대도 감사할 수 있을까요? 또 농사짓기 쉽습니까? 저도 간혹 일해 보면서 농부들이 얼마나 수고하는지 조금이라도 느껴보지만 일 년에 한 번 짓는 농사에 소출이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요즘 농민들이 WTO협상을 반대하는 성난 모습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우리들도 하박국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구원의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더 깊은 의미는 영육 간 우리의 형편과 환경을 생각하지 말고 예수 안에서 이루어 놓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믿음의 감사를 드리라는 교훈입니다.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면 아무 것도 주시지 않는 것 같지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 온갖 것으로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절대적 감사를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받아 누리게 됩니다. 우리 주님도 광야에서 오병이어밖에는 없었지만 거기에 메이지 않고 감사하셨습니다. 그 때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2. 욥의 감사는 정직함에서 나온 양심적인 감사였습니다.

욥1:20-21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감사했습니다.

잘 아시듯이 욥은 그 많던 재산 다 사라지고 심지어 사랑하는 열 자녀들까지 잃고 자기 몸에는 악창이 나서 살 수 없었어도 감사를 잃지 않았습니다. 영국의 한 기자가 "버나드 쇼"를 찾아가 "세계의 모든 책이 불타도 남아 있어야 할 책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물었더니 그는“성경 중에 욥기라 생각합니다. 그는 가난해도 병들어도 자식을 잃어버려도 아내가 배반해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런 욥의 감사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정직한 양심에서 나온 감사입니다. 사람들 보면 양심 버리고 살아요. 형통할 때는 자기 잘해서 그런 줄 알다가 조금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정말 현명한 마음과 바른 양심 가졌다면 욥처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나게 하신 것 그 자체만 해도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런데 좀 어려움이 닥친다고 하나님을 원망할게 뭡니까? 사람들이 미련하거나 양심 빼놓고 살기 때문에 감사할 줄 몰라요. 우리가 양심만 회복해도 하나님께 절대적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3. 다니엘의 감사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작정의 감사였습니다.

본문의 단6:10에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했습니다. 그 결과 간신들의 모함으로 사자 굴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봉하시고 다니엘을 구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다니엘의 감사는 결사 각오한 작정의 감사입니다. 감사다운 감사가 되려면 작정하고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동물의 이름을 “감사하라”로 지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감사하라. 감사하라.” 그러면서 감사를 배운다고 합니다. 다니엘이 이처럼 성공한 것도 작정한대로 기도와 감사한 것 아닙니까? 다니엘은 이 생명의 줄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감사에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단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못하게 방해를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이기고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더 높여주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자 만나려면 동물원에나 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또 다른 사자가 있습니다. 시57:4에 보면 사자가 곧 악인이라. 또 벧전5:8에 보면 대적 마귀가 사자라고 했습니다. 즉 아무리 악인이나 마귀도 기도하고 감사하는 사람을 해하지 못한다는 교훈입니다.

수도원과 감옥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외부와 차단되어 있습니다.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어렵습니다. 둘 다 고통스러운 장치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수도원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감사가 있고 찬양이 있으므로 천국이요, 감옥은 불평과 불만과 원망과 탄식과 후회가 있으므로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니엘처럼 수도원 사람들처럼 기도하다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절대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또 한 사람의 감사자가 있습니다.

4. 이방인 사마리아의 문둥병자의 감사인데 그의 감사는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감사였습니다.

눅 17장을 보면 열 사람의 문둥병자들이 고침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례하러 온 사람은 단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17:17) 섭섭해 하셨습니다.

요즘은 문둥병은 하나의 피부병 정도로 취급합니다만 당시에는 눈이 멀고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여기 저기 마비되다가 온 몸이 터져 비참하게 죽어가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고쳐 주셨다면 날마다 춤을 추고 일생을 드려 하나님께 충성해도 모자랄 은혜가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자 한 사람 밖에는 와서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서운해 하실 만도 합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매정합니다. 병원에서 병 고쳐 주었다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수 백 만원은 적은 것이고 수 천 만원도 더 들 텐데 그냥 고쳐 주니까 감사할 줄 모르고 어떤 사람은 교회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명의들도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아 병 고쳐주기를 거절하고 사람을 피해 숨어 살며 자손들에게 이 기술을 전수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문둥병자가 훌륭함은 그의 감사는 하나님 앞에 감사였지 다른 사람 눈치 보며 하는 감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같이 다녔던 열 사람이라는 집단이란 남은 어떻게 하나 눈치 보기 쉬운데 그렇지 않고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온전히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일입니다. 남의 눈치 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눈치를 본다면 그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감사해야 그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감사의 조건과 방법을 배웠습니다. 하박국처럼 믿음의 감사를 하십시다. 욥처럼 정직한 양심의 감사를 드리십시다. 다니엘처럼 생명 건 작정의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고 문둥병 나은 자처럼 사람 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감사를 드립시다. 이 절대적 감사로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 보답하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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