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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지식으로 채워진 심령 (벧전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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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3:7)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1. 고난 속에서 남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를 권력으로 착각한다.

베드로전서는 환란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소망과 용기를 주기 위한 서신입니다. 현재도 환란 중에 있는 성도들인데, 또 다른 추가적인 박해가 예고된다면 그 사람들은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드러내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그 고난을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는 짧은 다섯 장으로 된 서신이지만 그 가운데 “고난”이라는 단어가 15회가 나타납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고난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벧전 3:1-7의 아내들과 남편들을 향한 말씀도 고난 가운데 주어진 말씀입니다. 벧전 1:11에서 처음 “고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벧전 5:10에서 고난이라는 단어를 마지막으로 사용할 때까지 벧전 3:1-7의 전후문맥 모두 고난을 주제로 다룹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남편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고난과 떨어져서 생각하면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내와 남편들의 성향과 기질이 고난의 환경 가운데서 어떻게 변질되어 나타날지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 대해 피할 길을 주십니다.

그 피할 길을 걷는 자는 하나님 앞에 온전함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고대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는 “고난을 당하는 때는 사람의 진가를 증명하는 기회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온전하지 못한 사람은 고난의 환경 속에서 창조시의 성향과 기질이 변질되어 타락과 파괴로 나타납니다. 그가 놓여진 사회적인 신분과 위치가 높을수록 그 파괴력은 크고 심각해집니다. 왕이 가장 심각하고, 그 다음이 남편이며, 그 다음이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그 다음이 노예들입니다.

특히 남편들은 고난의 환경 가운데서 창조시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자신의 위치와 주권을 망각하고, 육적인 눈에 보이는 위치와 주권 중심으로 행하려는 성향을 나타낼 위험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남자에게 은혜로 주신 자유의지가 하나님을 떠날 때마다 나타나는 남자들의 현실인식의 오류이며 착각입니다. 컴퓨터 오락을 할 때 가상공간을 현실로 착각하며 실족하기도 합니다. 그 반면에 영적인 주권의 현실 속에 살아가야 할 남자가 육적인 현실을 전체적인 현실로 착각하며 실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벧전 3:7에서 남편 된 자들에게 말씀하실 때도 벧전 3:1에서 아내 된 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처럼 먼저 “이와 같이(호모이오스)”라는 대전제를 말씀하시며, 권면을 시작하십니다. 여기에서의 “이와 같이”라는 말씀도 벧전 2:13의 전반절의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라고 하신 말씀에서 강조하시는 “모든 제도”라는 “창조질서와 같이”라는 뜻입니다. 국가적인 박해와 각종 고난의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세워 주셨던 가정의 질서에 순복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잘 아시는 “남편들의 착각”은 “권위와 권력의 혼돈”으로 인한 착각입니다. 그래서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해 “순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남편과 아내의 제도에 순복하라는 명령입니다. 머리로서의 남편과 몸으로서의 아내는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동등한 제도입니다. 이것은 지적인 능력의 많고 적음에 따른 권위의 구분이 아닙니다. 오직 한 가정의 한 몸 된 삶을 위한 질서일 뿐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인격적으로, 지적으로, 존재론적으로 하나님 앞에 동등합니다.

그런데 남편들은 질서로서의 권위를 능력으로서의 권위나 존재론적인 권위로 착각합니다. 특히 외부의 환란이나 핍박과 대면 할 때 그 착각이 심각한 타락과 파괴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남편과 아내의 자리에 세워주신 것이 권위이지 그가 지니고 있는 능력이 권위가 아닙니다. 아내는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남편의 위치를 존중하는 것이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위치를 존중하며 그 위치를 보존해 주는 것이 사랑이며 하나님께의 순복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의 보호를 위해 아내에게 내적으로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을 주셨고, 남편에게 외적으로 “강한 육체와 감정”을 주셨습니다. 남편의 사랑과 아내의 복종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 제도에 대한 순복을 위해 주신 능력이며 성향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외적인 환란과 핍박이 다가올 때, 하나님과 하나님의 제도를 잊은 남편들은 외적인 육체적인 능력을 권위의 근거로 착각하며, 아내와 가족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려는 착각에 빠집니다. 패역으로 향하는 하나님의 제도의 변질입니다.

2. 남편의 아내와의 동거는 두 지식을 근거로 이루어가야 할 명령이다.

고난 속에서 남편들은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에 세워주신 제도에 순복해야 합니다. 가정의 질서를 위해서 아내는 하나님에 의해서 남편 아래의 위치에 두어졌습니다. 결코 남편의 육체적인 힘과 능력 아래 두어진 것이 아닙니다. 국가나 세상으로부터 가정을 향해 고난이 다가올 때 그러한 착각으로 육체적인 능력을 아내를 향한 무기로 사용하는 패역함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한 육체적, 정서적 능력은 가정의 보호를 위해 가정 밖의 세상을 향해 사용하도록 주신 능력입니다.

남편의 권위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역적인 위치에서의 권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존재들 위에 세워주신 제도를 지키고 보존하는 사역을 수행하도록 주신 권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다른 존재들의 존재적 위치를 자신의 몸을 내어주며 지켜내도록 주신 권위입니다. 이것은 오직 사랑과 헌신을 통해서만 유지되는 권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남편 옆에 두신 아내의 위치와 존재를 지켜주지 못하는 권위주의의 권력은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며, 타락한 남편의 전형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의 아내를 향한 권위는 권력이 아닙니다. 교회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드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가정에서 실천하도록 명령받은 자의 위치 표시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남편들이 이 “지식”을 소유하도록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남편 된 자들에게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벧전 3:4에서 아내들을 향하여는 “마음에 숨은 사람의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을 요구하셨지만 벧전 3:7에서 남편들을 향하여는 “지식을 따른 동거”를 요구하셨습니다.

“지식을 따라(카타 그노시스)”라는 말씀은 남자들의 행위가 “모든 제도” 가운데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에 근거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벧전 2:15에 나타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과 대칭되어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의 육체적인 힘과 능력을 따라 행하는 어리석음과 무식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지식”을 따라야 합니다. 그 지식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통찰력”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험적인 의식”입니다.

이 지식은 경험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약한 자를 받아주고, 이해하며, 도와주기 위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이론적인 것이 아닌 경험적인 것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들만이 알 수 있는 지식입니다. 여기서 “지식(그노시스)”는 성관계의 경험을 통해 그 행위로써 알게 된 지식과도 같은 구체적인 지식입니다. 따라서 “지식을 따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제도로서 세움 받은 아내의 위치를 지켜주기 위해서 아내를 철저히 알고, 이해하며, 사랑해야 하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남편들이 이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동거하다(쉬노이케오)”라는 단어는 부부관계 중에서 성관계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너무 노골적인 단어라서 “시내 사본”같은 일부 사본에서는 “교제하고”라는 단어로 바꾸어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말로도 “동거하다”라는 말로서 “함께 거주하다”라는 정도로 표현합니다. 외적인 고난 앞에서 남편들의 “지식에 따른 행위”가 가장 정확히 민감하게 측정되는 영역이 부부의 성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위치를 지켜주는 사랑의 헌신을 감당해야 할 위치에 존재하는 자로서의 권위를 지닌 자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통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서 남편 아래에 위치시켜 두신 동등한 인격적 존재입니다. 이 지식을 따르는 남편은 아내와 행복한 성관계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지식이 없는 “어리석고 무식한” 남편은 육체적인 힘과 능력의 권위주의의 권력으로 아내에게 성관계를 요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위치를 상실당한 아내들의 고통의 호소가 하나님께 올라갑니다.

벧전 3:7은 남편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두 가지 지식을 설명합니다. 첫째는 아내가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사실을 아는 지식입니다. 여기서 “연약한(아스데네스테로)”이란 풍부한 감성으로 인해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연약한 것을 뜻합니다. 지적인 능력이나 역할 수행 능력 등의 열등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릇”은 유익하고 존귀한 존재로서의 육체적인 몸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내에게 주시는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을 지닌 자의 외적인 모습입니다.

아내의 인격, 아내의 지식, 아내의 능력이 남편과 동등합니다. 또한 아내가 놓여진 위치도 하나님께서 주신 고유 영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아내가 지신의 위치를 지킬 수 있도록 육체적, 감정적, 영적으로 연약함을 지니게 하셨습니다. 반면에 남편은 아내와 동등한 인격, 지식, 능력을 지녔지만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이 부족합니다.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능력으로 연약한 아내의 위치를 지켜주며, 아내의 내적인 심령을 사용할 때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3. 아내의 존재적인 위치를 귀하게 여기며 순복할 때 영적으로 승리한다.

하나님은 뛰어난 지략가이십니다. 아내가 풍부한 감성의 능력으로 홀로 사역을 감당할 수 없도록 연약하게 하셨습니다. 남편이 강한 육체적 능력으로 홀로 사역할 수 없도록 유순하고 고요한 자리를 만들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보호를 받아야 하고, 남편은 아내의 지식과 내적 능력을 사용해야만 하나님께서 주신 사역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지식이 “연약한 그릇”인 아내를 아는 지식입니다. 아내의 연약한 그릇은 아내와 남편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신자들도 알 수 있는 지식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남편 된 자들이 알아야 할 더 중요한 지식은 두 번째 지식입니다. 아내가 자신과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임을 아는 지식입니다. “생명의 은혜”는 헬라어 소유격 표현법에 따르면 “생명에 있는 은혜”로서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 안에서 누리는 은혜”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동등한 위치와 조건으로 이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는 자입니다. 남편은 이것을 아는 지식으로 아내를 대해야 합니다.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라는 말은 하나의 단어로서 “슁클레로노모스”라는 공식 용어로서 “공동 상속인”을 뜻합니다. 남편이 결코 일방적으로 생명의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공동 상속인인 아내의 허락이 있어야 누릴 수 있는 은혜입니다. 아내 역시 남편의 허락이 있어야 생명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공동 상속인입니다. 주로 아내들은 이러한 의식 속에서 남편 옆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킵니다. 그러나 남편들은 고난의 환경이 닥칠 때마다 그 지식을 잊고 단독 상속인처럼 권위주의를 행사합니다.

남편들은 언제나 이 지식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연약한 그릇인 아내의 존재론적인 위치는 하나님께서 주신 위치입니다. 아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받아 누릴 공동 상속인입니다. 이 두 지식을 아는 남편이라면 자신의 육체적인 힘과 능력과 권력으로 아내를 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힘과 능력과 권력은 연약한 그릇이며 공동 상속인인 아내가 아내의 위치를 지킬 수 있도록 아내의 외적인 환경을 만들어 주고 보호하는 곳에만 사랑의 헌신으로 사용되어야만 합니다.

만일 아내들이 남편들의 이러한 권위를 안다면 남편들이 얼마나 힘든 사역을 감당하는지 알 것입니다. 아내들이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권위와 비교할 때 쉬운 것입니다. 만일 오늘날 아내들이 남편의 위치에 서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주신 그 사랑으로 행할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지식이 있는 남편들은 지금도 그 사랑으로 행하기 위한 피나는 영적 싸움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남편들은 외적인 고난과 핍박 앞에서 영적으로, 육적으로, 감정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가정 내부의 불만과 원망과 비난도 감당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들을 위해 사랑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모세까지 그 사랑의 부족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속적인 원망에 화를 내다가 반석을 두 번 내리치는 불순종으로 인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남편들에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러한 명령은 하나님의 성령 안에 사로잡혀야만 가능한 사랑의 헌신입니다.

하나님은 그 요구를 “귀히 여기라”라는 하나의 명령으로 압축하십니다. 남편은 외적인 환란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내적인 불만과 원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두 지식을 통하여 아내를 “귀히”여겨야 합니다. “귀히(티멘)”라는 단어는 “그 지위 자체를 존귀한 것으로 인정하며 예의와 존경을 갖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내가 아무리 바가지를 긁어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아내의 아내로서의 지위와 위치에 대해 존귀하게 여기며 자신의 육체적인 힘과 능력으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영적 권위자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필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벧전 3:7의 마지막에서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남편이 아내를 귀히 여기지 못할 때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없습니다. 기도할지라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귀히 여기며 공동 상속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만 생명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 남편들은 하나님의 제도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아내의 연역함의 이유를 아는 지식과 아내의 영적 공동 상속인 됨을 아는 지식을 지닌 남편은 외적인 환란 속에서 가정을 지키며 온 가족과 함께 생명의 은혜를 받아 누립니다. 아름다운 부부관계를 유지합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비전을 이루어 갑니다. 주님의 지식으로 채워진 심령을 지닌 남편만이 이러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편 된 자들에게서 받기 원하시는 열매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지식으로 채워진 심령으로 주님의 남은 고난을 채워가며 승리하는 열매입니다. 남편들은 이 지식을 깨달을 때마다 남편의 권위가 두려운 권위가 됩니다.
(김종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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