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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 믿음대로 되라 (마 9: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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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말하기를 ‘인생은 믿도록 태어났다. 마치 사과나무에는 사과열매가 맺듯이 사람은 믿음의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은 종교적 피조물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의존적 피조물, 종교적 피조물로 창조하심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항상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헬라 철학에서도 인간을 “안드로포스”라 하여, “위를 바라보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사실상 하등동물일수록 땅을 쳐다보고, 더 하등한 동물들은 땅속에서 기어다닙니다. 그러나 고등동물일수록 점점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쳐다봅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인간의 본연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무언가를 믿고 사는 존재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D. L. 무디(Dwight Moody ) 목사님은 “너 자신을 믿으라. 그러면 언젠가는 실망할 때가 올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를 믿으라. 그러면 언젠가는 죽어서 이별할 때가 올 것이다. 돈이나 명예를 믿으라. 그러면 언젠가는 돈과 명예가 사라질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를 믿으면 후회할 것이 없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후회할 일이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무엇을 믿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믿습니까? 언젠가는 실망하게 됩니다. 세상을 믿으면 절망하게 되고 생각지도 못했던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기도 주시고 희망도 주시고 지혜와 총명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말 하는 ‘믿음'을 근본적으로 크게 두가지로 나눈다면 구원받는 믿음과 하나님의 도움을 입는 믿음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사건을 믿을 때 믿음이 있다고 합니다. 그 믿음이 없이는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을 지라도,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을지라도 구원얻지 못하는 것이죠. 믿음이 없이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고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아예 차단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도움을 요청할 때 하나님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파워로 나눈다면 믿음을 다른 측면에서 나눈다면 산 믿음과 죽은 믿음(마7:21)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죽은 믿음이란 행함이 없는 믿음(약2:14)을 말합니다. 산 믿음이란 행함이 있는 믿음(마7:24, 약1:22)을 말합니다. 파워 있는 믿음을 산 믿음입니다.

믿음의 크기로 나눈다면 작은 믿음과 큰 믿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작은 믿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소극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큰 믿은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를 믿고 부르짖고 믿는 만큼 순종하는 마음으로 도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구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 중의 하나입니다. 세상에는 믿어야 할 일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의 불행이요, 질병입니다. 정말 좋은 약이 있어도 믿지 못하는 것, 정말 좋은 기회가 왔는데도 믿지 못하는 것. 그것은 질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복입니까?

1.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오늘 본문에는 두 소경을 고치신 내용이 나옵니다. 이들은 맹인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소문을 듣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땀을 흘리며 일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높은 히말라야 산을 정복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하늘까지 갔다 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듣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열심히 들으면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죠. 어떤 분은 “저는 아무리 들어도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잘 안됩니다” 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자꾸만 들으면됩니다. 마치 콩나물 시루에 물을 부으면 밑으로 다 빠지는 것 같아도. . . .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받아서 잘 자라는 것이 말입니다.
그들은 본문 앞부분에 혈루병 앓은 여인이야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믿음은 어떤 표적이나 기적을 보고 믿음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들으면서 믿음이 시작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꾸 반복해서 들은 사람은 나도 모르게 믿음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짖으라.

이 두 소경은 지금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오며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얼마나 적극적입니까?
그들은 비록 소경이지만 주님을 향해 그냥 앉아서 소리만 지르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것을 알고 따라가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소리를 지르는 이들에게 왠지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냥 예수님이 아무 말 없이 한 집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자존심을 건드린 것입니다. 사람은 자존심과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을 가장 기분이 상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장애물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28절에 보면 주님은 끈질기게 간구하며 따라다니는 소경들의 믿음을 테스트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는 즉시 들어 주시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 앞에 장애물을 놓으시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백부장이 자신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누워 있을 때 고쳐달라고 애원하자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마8:7)고 선뜻 은혜를 베푸시는 예가 있는가 하면 몇 번을 간구하고 수고해야 응답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님은 때로 무관심의 장애물을 놓으시기도 하십니다. 의도적으로. . . .
우리가 생각할 때 주님이 너무하다고 느낄 정도로 무관심을 보인 경우도 있습니다. 마15; 막7: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귀신 들린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주님에게 수로보니게 여인이 왔습니다. 소리지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와서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하자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여인 자신이 예수께 절까지 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하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없는 삶이라면 이런 말을 듣고 실망하고 그냥 돌아가든지 아니면 욕이라도 하고 돌아갔을 지 모릅니다.
사람이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이 차별입니다. 성 차별, 지방차별, 지식차별, 가문차별 등, 그러나 이 여자는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그렇게도 냉정하고 그렇게도 무정하신 주님의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시며 그 딸을 고쳐 주었습니다.

본문의 소경들은 그런 냉대와 같은 상황에서도 따라다니며 소리를 지릅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의 사람에게 오늘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부르짖습니다. 기도는 믿음과 비례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기도하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것이요, 교만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뭘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걱정하고 근심할 시간은 있어도 자기의 심각한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할 시간은 없습니다.
소경은 앞을 볼 수 없는 어두운 상황이었지만 믿음으로 부르짖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매우 갈망하는 태도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팝니다. 그렇게 갈망하는 사람이 뭔가를 하는 것입니다. 사자는 배부르면 주위에 동물이 지나가도 절대로 죽이거나 잡아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냥을 하려면 토끼 한 마리도 전력질주를 한다고 합니다. 믿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배부른 사람은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울어 보채야 합니다. 애써서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은 부르짖는 것입니다.

렘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 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또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 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고, 그 다음에는 찾는 행동개시가 있어야 되며, 그 다음에는 온 사력을 다하여 두드리는 노력이 함께 응집될 때 하나님의 역사가 함께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믿음으로 나아가라.

28절을 보면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 14-1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은혜의 보좌입니다. 목이 마르며 시원한 물이 솟아나는 우물에 가서 물을 구해야 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能)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마9:28)
예수님은 소경들의 믿음을 확인하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질문을 하십니다. “너는 과연 믿느냐?” . . ..
예수님은 언제나 믿음을 질문하십니다.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대답은 “주여! 그러하오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소경은 즉시 지체하지 아니하고 긍정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라고 즉시 응답합니다. 긍정적인 믿음은 반드시 믿음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나는 할수 없지만 하나님은 할수 있다고 믿는 것이 긍정적인 믿음입니다. 의심이 한점도 없습니다. 조그만 의심도 없습니다. 주님앞에서의 대답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막9:에 나오는,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막9:22).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9:23).

믿음은 놀라운 일을 일으킵니다. 믿음의 반대는 염려, 의심입니다. 폭이 한 자(尺)밖에 안 되는 널빤지를 땅에 놓으면 그 위를 잘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중에 매달아 놓고 그 위를 걸으라고 하면 기우뚱기우뚱 하다가 떨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려움과 불안, 공포 때문에 그렇습니다. 할 수 있는 것도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는 확신과 믿음만 있으면, 우리는 마치 땅에 깐 널빤지 위를 저벅저벅 걸어가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성공을 향해서 승리를 향해서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만이 증인이 됩니다.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마9:30-31)
두 소경은,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나가서 주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너무 감사하니까, 기적의 체험이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니까, 믿음이 넘치니까, 그들은 나가서 주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전도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면 전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전도하지 말라고 해도 전도합니다.

요4:에 나오는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자기 동네에 가서 말했습니다. “와 보라.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물을 뜨러 왔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자 물동이를 버려두고 가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우리 기독교 신자의 마지막 과제는 무엇입니까? 전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도를 위해서 재물을 주시고, 전도를 위해서 병을 고쳐 건강하게 만들어 주시고, 전도를 위해서 기도 응답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과제는 전도입니다.

어느 기독교 조사기관에서 통계조사를 해보니, 예수 믿는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기까지 부모, 형제, 친구, 친척 해서 최소한 4명에게 전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4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와서 집사, 권사, 장로가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했던 사람, 전도했던 사람, 사랑과 친절을 베풀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대로 주십니다. 그 은혜를 체험한 자는 예수를 증거 하는 자가 되는 줄 믿습니다. (임경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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