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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쳐진 물과 토지 소산 (왕하 2: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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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여리고라는 지역은 좀 독특한 데가 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서 제일 먼저 정복을 한 지역이 바로 여리고 성읍입니다. 그리고 그 여리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리고를 정복한 후 그 성읍에 있는 것은 절대로 가지지 말라. 아무것도 전리품으로 취하지 말고 불사를 것은 불살라 버려라. 그 성읍의 모든 물건들은 전부다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고 그리고 남녀 노유(男女老幼)와 우양(牛羊)과 나귀 등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전부다 칼날로 죽여라."

이렇게 심할 정도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여리고 성에서는 아무것도 취하지 말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이러한 땅, 이러한 지역이 바로 여리고 성읍이었습니다. 그런데 아간이라고 하는 사람이 여리고 성을 점령한 후에 어떤 물건을 보고서 너무 아까워서 시날산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의 금 덩어리를 취하였습니다. 그러자 결과는 곧바로 나타나서 그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다음 정복전투, 아이 성 전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패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여리고 성의 어떤 물건들 때문에 그 다음 성 정복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 도대체 여리고에 어떠한 금기사항이 있기에 그렇다는 말입니까? 또 그 여리고 성읍이 무너진 후에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여호수아서 6장 26절에 보면,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과연 여리고 성읍은 이처럼 저주받은 도성입니까? 다시 세우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의 아들들을 빼앗아갈 정도로 여리고라는 성읍이 이토록 무언가 저주받은 성읍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과연 그 예언의 말씀대로 열왕기상 16장 34절에 보면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라는 사람이 여리고를 다시 건축했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에 히엘이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여리고 성을 다시 건축했는데 그 시대란 어떠한 시대를 말합니까? 이스라엘의 가장 어두웠던, 악한 아합 왕의 시대였습니다. 일종의 이스라엘의 저주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이 시대에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그토록 저주하신 여리고 성읍을 다시 건축한 것은 또 무엇입니까? 과연 구약성경에 나타난 여리고 라는 성은 어떻게 보면 정말로 금기사항과 같은 하나님의 저주받은 도성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여리고 지역에 또 이상한 모습이 오늘 본문 성경에 등장합니다. 그 여리고 성에 물이 안 좋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물이 안 좋아서 그 지역에 곡식 농사가 잘 되지 않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토산(土産)의 열매가 익지 않습니다. 낙과(落果)해 버리는 현상, 어느 정도 과실이 거의 다 익었다가 낙과해 버리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오늘 성경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시대에도 물이 안 좋아서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며 신문에도 종종 샛강 살리기 운동에 전 공무원들이 참석해서 물을 살리자고 캠페인을 벌이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구약성경 당시 여리고 성 지역도 물이 좋지 않았는가 봅니다.

그렇다고 이 성읍의 모든 것이 다 안 좋은 것은 아닙니다. 본문 열왕기하 2장 19절에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지역에 공기가 좋고 흙이 좋고 기후도 좋고 경치도 좋고 외견상으로는 이 지역은 아름다운 성읍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흠, 한 가지 흠이 있다고 하면 그 땅속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토양에, 물 속에 특별히 칼륨이라는 무기 원소가 부족하면 식물이 잘 자라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자란 다음에 열매가 완전히 익지 못해서 낙과해 버리는 현상이 벌어진답니다. 이 물 속에 원소가 하나 부족했을 때 이러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아마 이 여리고 지형의 토양 속에도 물이 있었고 이 물 속에 식물 성장의 필수원소들이 부족했는가 봅니다. 아무리 많이 자라 거의 과실이 열매 맺어갈 정도로 자라면 뭐합니까? 이제 익으려고 하면 톡 톡 떨어져 버리고 토양의 열매가 익지 못하고 떨어져 버리고 완전히 익지 못하고 떨어져 버립니다.

오늘 본문에 물이 좋지 못하다고 했는데, 그 좋지 못하다고 하는 원어의 뜻은 '적극적으로 해롭고 악하다.'는 뜻이고, 이 말은 꼭 사람의 심령 속에 그 사람의 본질 성품이 안 좋다라고 할 때에 단어라고 합니다. 똑같은 단어가 창세기 2장 9절에 나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했을 때 '선과 악', '악'이라는 단어가 바로 여기에서 좋지 못하다는 단어하고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번역을 이렇게 해 놓은 것입니다.

창세기 6장 5절에도 보면 노아의 심판 직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그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에서 여기서 '악할', 이 단어가 오늘 여기 '물이 좋지 못하다'는 단어하고 똑같은 단어입니다. 또 시편 144편 10절에 『주는 왕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자시오 종 다윗을 그 해하는 칼에서 구하는 자시니이다』라고 다윗은 고백하는데 여기서 '해하는', '사람을 해하는' 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 본문의 좋지 못하다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물이 좋지 못하다'에서 좋지 못하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악하고 해롭다' 라는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여리고 성의 물이 오히려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 성 백성들에게 악하고 해롭게 합니다. 악하고 해로운 물이 이 속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성읍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주로 부패한 사람들의 심성 속에 있는 악한 성품을 나타내는데 쓰이는 단어입니다. 사람의 속 심령에 있는 악하고 부패한 심령을 나타내는데 쓰이는 단어를 이상하게 이 여리고 성 땅 속의 물에다가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의 말씀이 과연 이 사건, 땅의 물에만 적용되는 사건이 아니라 사람의 심령 속에 깊이 흐르는 물에도, 사람의 심성 속에도 이러한 악한 물이 흐르고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어떤 상징적 본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좋은 성품과 성격과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결정적인 흠이 한 두 가지는 있습니다. 이러한 성품이 그 심령 속에 물처럼 흐르고 있어서 이것 때문에 그 사람의 열매가 맺지 못하고 열매 맺을 때 꼭 떨어져 버리는 안타까운 여리고 성의 모습이 우리 시대 사람들의 모습과 똑같지 않나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본문을 보고 "성경에도 여리고 성읍에 곡식 익지 못하는 물이 있었는데, 이것을 엘리사라는 능력의 선지자가 고쳤으므로 우리도 적극적으로 활동을 해서 교회가 앞장서서 이 땅에 흐르는 물을 새로운 물로 좋은 물로 바꿔야 한다. 자연보호 캠페인을 벌이자. 하나님도 이 나쁜 물을 고쳐주셨지 않느냐!" 라고 해석하면 안됩니다. 이 해석이 성경의 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이 모습을 인간 심령 속의 악한 물이 흐르는 그러한 모습으로 보아야 됩니다.

우리 인간들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인간 아닙니까? 창세기에 보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해서 뱀이 저주받았습니다. "땅으로 기어다닐지라." 땅이 저주받아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지어다." 또 남자와 여자, 아담과 하와가 저주받았습니다.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라. 수고해야 할 것이다." 여자에게도 "너는 잉태의 고통을 더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처음에 다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만물의 영장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운 사람들로 창조되었지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았습니다. 고난과 고통과 걱정과 근심 속에서 여리고 성읍처럼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 여리고 성의 모습을 우리 인간의 모습과 이렇게 비교하고 거기에 적용시킨다고 해서 혹 여러분들께서 이 성경의 선언을 너무 좀 지나치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15장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라는 지역에 도착했을 때에 사람과 가축이 먹을 물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 물을 먹고자 했는데 그만 그 물이 써서 사람과 가축, 목마른 사람과 가축이 그 물을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원망을 하고 모세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한 나뭇가지를 지시하셨는데 모세가 그 나뭇가지를 그 물에 던지자 그 물이 고쳐져서 이제 쓴맛이 없어지고 단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처럼 내 말을 청종하면 질병을 하나도 내리지 아니할 것이요" 하시면서 "나 여호와는 육체의 질병, 사람들의 쓴 물의 이 질병을 치료하는 하나님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땅의 물이 씁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그 물을 단물로 바꿔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처럼 인간에게도 쓰디쓴 고통의 질병이 있는데 나 여호와가 질병을 치료하겠노라." 고 하십니다. 이런 것을 보면 땅의 물, 쓴 물을 단물로 바꿔주시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인생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교훈 하고자 하시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쓴 물과 같은 인생의 아픔과 질병을 치료하신다는 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이 교훈을 의도하시는 사건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 여리고 성읍의 물도 똑같은 맥락에서 땅의 물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서 인간 속에 흐르는 부패한, 제일 처음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내 속에 흐르는 죄악의 물이 흐르는 이것을 고쳐주고 다시 회복해주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언이 이 속에 암시되어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 알아야 됩니다.

열왕기하 5장 1절에 보면 그러한 모습이 또 나옵니다. 그 사람의 다른 모습은 다 좋은데 부패한 것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통이 됩니다. 열왕기하 5장 1절에도 보면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엘리사가 똑같이 등장해서 그 질병을 고칩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크고 존귀한 용사라고, 큰 용사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는 나라의 위대한 영웅이었습니다. 겉보기에 너무나도 훌륭한 모습입니다. 마치 여리고 성읍이 크고 거대하고 아름다운 모습처럼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나아만 장군에게는 정말 말못한 흠과 결점과 고민이 있었는데, 이 한 가지 문제가 결정적으로 나아만의 생애를 절망과 낙심 속으로 끌고 갑니다.

이것은 바로 나아만이 "크고 존귀한 자나 문둥병자였더라." 라는 선언입니다. 어찌 나아만 장군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겠습니까? 그 사람의 모든 조건이 아름답고 모든 아름다운 성품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흠이 그 심령 속에 있어서 그것 때문에 그의 인생이 결실하지 못하고 낙과하는 모습이 어찌 한 두 사람의 이야기겠습니까?

신약에는 어떤 청년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는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예수님도 그 사실을 시인하셨습니다. 그는 돈도 많은 부자 청년이라고 했습니다.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고 돈도 꽤 많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훌륭한 신랑감이요, 훌륭한 청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정적 한 가지 결함을 보시고 그것을 지적하십니다. "그러나 네게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도다. " 한 가지 부족한 점 때문에 이 청년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이것을 지적했습니다. 그 청년의 마음속에는 재물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결정적인 결함을 아시는 주님이 그 흠을 지적하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청년이 근심하며 갔다고 했습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성전에 올라와서는 솔직해야 됩니다. 마치 환자가 병원에 올라온 것처럼 "하나님, 내 심령에 영적 치료를 받기를 원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우리 속사람들을 살펴봐야 합니다. 인간의 부패한 성품은 가만히 놔두고 다른 것만 잡고 얘기해봤자 어쩌면 구체적으로 내 영혼에, 내 심령에 치료하는 것이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나 자신이 여리고 성처럼 되어 있지 않는가? 구약의 여리고 성은 그때까지는 하나님의 저주받은 도성이었습니다만 이후로 고침 받고 나서는 여리고 성은 복된 성읍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치료하는 모습을 볼 때에 여리고 성의 백성들이 이 물을 치료한 것 아닙니다. 여리고 성의 과학자들이 과학의 힘으로 이 물을 치료한 것 아닙니다. 여리고 성의 철학이 이 물을 치료한 것 아닙니다. 엘리사라는 하나님의 능력자가 이 물을 치료하는데 엘리사는 물 근원으로 나아갔습니다. 근본적인 치료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계속 흐르는 물을 치료하고 닦아내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물 근원으로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영적 치료는 근원적인 치료가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소금을 그 물에다가 집어던졌습니다. 그 물 자체에 치료의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서 소금을 그 물에다가 집어던지는 것은 시각적인 모습의 교훈에 그 의도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성경 21절에 보면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면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엘리사는 거기다가 소금을 던지면서 엘리사 자신이 고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 소금이 고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소금으로 고치는 것은 믿음의 행위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이 이 물을 고치시리라" 여리고 성읍 백성들 자신이 고친 것이 아닙니다. 밖으로부터 고치는 힘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일이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어떤 사람의 근본적인 심령 속의 어떤 결함과 어떤 저주받은 성품과 같은 좋지 않은 성품이 우리 속에도 들었는데 이것은 내 속의 내 힘으로 고칠 수 없습니다. 만약에 내 힘으로 내 인격 수련으로 이것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 믿을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나의 부패한 성품, 오염된 내 죄로 물든 내 심령의 성품을 고침 받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 이름 부르는 것 아닙니까? 예수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부패해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이 상태로 놔두면, 저주의 상태로 놔두면 끝장나 버리는 내 영혼을 주께로 나와서 주의 보혈로 고침 받고 주의 능력으로 고침 받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내 물이 깨끗해지고 부패한, 저주받은 내 심령, 내 속사람이 다시 고쳐져서 새 사람되는 것이 우리 예수 믿는 목적이 아닙니까? 이게 제일 가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리고 성 못지 않게 우리 자신도 우리는 오늘날 일견 외관상으로는 다 훌륭한 인격적 외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속의 결정적 약점, 내 속에 조상 때부터 흐르는 나쁜 성품, 나쁜 습관, 나쁜 고집, 죄악의 모습, 냄새나는 모습이 내 속에 흐르고 있는데 이 상태로는 나의 인생에 열매가 맺혀지질 않습니다. 죄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근본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내 속에 뿌리 박혀있는 뽑히지 아니하는 죄 문제 때문에 어렵습니다.

이것은 정말 고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 자신의 노력으로, 어떤 인격적 수양으로 이것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밖으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간의 뿌리깊은 어떤 죄성도 변화되고 완전히 새롭게 고쳐질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이 사실을 놓치면 안됩니다. "나는 무언가 내 속에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고쳐야할 성품이 있다. 시기가 있고 교만이 있고 내적인 어떤 탐닉의 모습, 육적인 모습이 있다." 이거 그냥 그대로 놔두지 말고 "주여! 나는 이걸 기도제목으로 삼고 고침 받기를 원합니다. 고침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이것이 나의 기도제목입니다." 라고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만이 나를 고칠 수 있고 주의 능력은 나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라는 제목으로 날마다 우리 주의 능력에 나 자신을 맡기고 고쳐달라고 간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5년, 10년 신앙생활을 해도 내 속의 물은 그대로 놔두고 겉으로 아름다운 모습만 보고 살아가는 인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결국 열매 맺지 못하고 맙니다.

우리는 얼마나 그러한 성품을 고쳐보려고 노력했습니까? 그러나 안됩니다. 내 힘으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나약해져서, "우리가 뭐 신앙생활 한다고 그거 고쳐지나? 그건 내 성격이야. 그건 내 속에 흐르는 물이야. 그건 안 고쳐져." 라고 단정짓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도제목으로 삼고 여리고 성읍의 흐르는 물, 그 흐르는 물을 고치려고 하는 간절한 노력으로 이 백성들이 엘리사 앞에 나온 것처럼 나 자신의 속에 있는 이 물 문제, 이것을 기도제목으로 삼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 받기를 소원하며 살아갈 때 왜 안 고쳐지겠습니까?

만약에 이것은 내 속의 물은 고칠 수 없다고 하면 오늘 성경본문은 빼야됩니다. 내 성경에서 빼야됩니다. 그리고 내 성품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인데 내 성품이 고쳐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내가 제한하는 것이 됩니다.

오늘 성경 그 다음에 23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3개 절이 나오는데 거기 보면 아주 이상한 그러한 사건이 나옵니다. 엘리사가 그 물을 고치고 나서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는데 길에 갈 때 어떤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왔습니다.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합니다. 엘리사에게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그러자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곧 수풀에서 암콤 두 마리가 나와서 아이들 중에 42명을 찢어 죽인 사건이 곧바로 나옵니다.

이것이 이 앞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이 사건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여기 젊은 아이들이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뭐 아주 갓난아이들은 아닙니다. 십대, 이십대의 젊은이들, 어쩌면 불량배들을 말합니다.

열왕기하 2장에도 나옵니다. 아합 왕이 보낸 50명. 이 사람들은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회리바람을 타고 올라가는 것을 봤습니다. 그리고는 엘리사에게 와 가지고 "지금 당신의 스승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지금 어디 산에 떨어졌을 것이다. 찾아보러 가자." 그러자 엘리사가 "찾아보러 가지 말라. 그건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의 스승 엘리야는 하늘나라로 갔다. 찾지 말라." 그러나 인간을 하늘로 올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는 사람들이 뻑뻑 우기고 산에 가서 찾다가, 찾다가 못 찾고 돌아왔습니다. "어딘가 떨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전에 우리 오늘 본문 바로 전 18절에 "내가 너희더러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느냐?" 그런 뜻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서 "야,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데. 웃기는 소리다." 뭐 이런 생각들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라고 하는 엘리사가, 하나님의 영감의 두 갑절을 받은 엘리사가 지나가는데 또 이 불량배 같은 젊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괜히 조롱하는 것입니다. "야, 대머리야, 대머리야." 아마 엘리사의 머리가 벗겨졌는가 봅니다. "너도 한번 올라가 봐라. 너도 한번 올라가 봐라. 뭐 너희 스승이 올라갔다며? 하늘로 올라갔다며? 너도 한번 올라가 봐라. 올라가 봐라." 조롱 섞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혹시 하나님을 능력을 불신하며, 믿지 아니하는 자들처럼 우리는 입으로 말하지 않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물 때문에 내가 내 열매, 내 인생에 낙과되어 버리는 것을 보면서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며 간구하면서도 이것 고쳐달라는 기도를 계속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나 스스로도 하나님의 능력을 보혈의 능력을, 나를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의 능력을 불신하고 있는 징조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 오늘 이 사건 뒤에 바로 그러한 무리들이 나와서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고 조롱하자들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이들에게 임해서 42명이 찢겨 죽는 모습이 나왔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물의 문제입니다. 내 겉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일견 외관상의 모든 모습이 다 사람에게 좋게 보여도 내 속에 결정적 흠, 선악을 알게 하는 그 악의 흠, 좋지 못한 결정적인 흠이 내 속에 성품으로 어느 한 성격으로라든지 존재하고 있으면, 그 인생은 잘 열매맺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 열매가 떨어져 버리는 여리고 성읍의 모습과 똑같다는 사실, 그리고 그 백성들이 그때까지 고치지 못했으나 능력의 선지자 엘리사가 나와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고치신다고 하면서 고쳤을 때 그 여리고 성의 물이 고쳐져서 오늘날까지 이르렀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요즘 여리고 성 성지순례 하는 사람들은 여리고 성에 가서 물맛보고 참 물맛이 좋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고쳐서 오늘날까지 이르렀습니다. 나의 지금까지의 삶이 내 속에 부패한 성품의 물이 흐르고 있어서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복 받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오늘날까지 문제가 되었다면, 우리 하나님은 물을 고치시는 분, 영적 치유의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시고 날마다 기도하는 가운데 여러분의 생애에 영적 하나님의 능력의 치유하심을 꼭 받아 여러분들도 인생의 복된 열매 맺어 가는 변화된, 고침 받은 인생이 되시기를 우리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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