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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뿌리가 썩지 않으면 나무는 언젠가 새순으로 살아납니다. (대하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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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주간 언론에서 가장 많이 들은 이름은 배아 줄기 세포를 연구하는 황우석 교수에 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황교수는 동물 복제에서는 가장 어렵다는 개 복제를 한 후 인간 배아 복제를 함으로 세계인들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어느날 국민적 영웅이 되어 앞으로 노벨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을 모든 난치병을 치료하는 생명공학의 선두 국가로 만들어 거대한 부를 안겨 줄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242개의 난자를 기증한 분 중에서 연구원 2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거짓말을 하였다는 이유로, 연구로 사용된 난자가 대가를 지불한 매매된 난자였다는 사실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습니다. 황 교수는 이 사실을 사과하고 세계 줄기세포 허브 소장직을 비롯해 정부와 사회단체 겸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줄기세포란 뼈와 간, 혈액 등의 구체적인 장기의 세포로 분화되기 직전의 원시 세포를 말한다고 합니다. 이 세포가 210가지의 인체의 각종 장기 세포로 바뀌는데 이 줄기 세포는 크게 배아 줄기 세포와 성체줄기 세포가 있다고 합니다. 이 줄기 세포를 분리 배양하면 우리 몸을 구성하는 어떤 종류의 세포든 생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줄기 세포를 이용하면 파킨스 병, 척추 손상, 뇌졸중, 화상, 심장질환, 당뇨병, 암 등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줄기 세포를 얻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배아에서 얻는 방법과 배아가 아닌 우리의 몸, 제대혈, 태반 등에서 추출하는 방법입니다. 배아에서 얻으면 배아 줄기 세포이고 그 외에서 얻으면 성체 줄기 세포라고 한다고 합니다. 성체 줄기 세포는 자신의 몸에서 축출하기 때문에 암발생과 유전자 발현의 불안정성이 없고 거부반응이 없어 약 300종의 병에 대한 임상실험이 진행 중이며 여러 병에 대한 상당한 효과가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배아 줄기 세포 연구는 국제 사회에서 윤리적인 문제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낙태 문제처럼 이것을 너무 등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는 예수 믿는 사람들도 뚜렷한 생명윤리 의식이 없이 질병만 치료되면 된다는 식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문제가 생명 파괴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배아가 생명인가 아니면 세포 덩어리인가라는 문제입니다. 배아 줄기 세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정자와 난자의 수정후 14일 전까지는 생명이라기 보다는 세포덩어리이니까 실험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직 어머니의 모태에 착상되지 않았으니 현미경 속에서 폭력을 휘두르며 파괴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수정이 된 후 14일 째 되는 날에 장차 중추 신경 기관이 될 원시선이 나타나는데 그 때부터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일년이면 150만 건씩 시행되고 있다는 낙태가 살인인가 아닌가라는 문제와 비슷합니다.

생명의 시작이 언제부터이냐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수정순간을 시작으로 보느냐, 착상, 심박동개시, 뇌파 작동 시점, 자체 생존가능 시점, 분만 등의 견해가 있습니다. 이미 수정될 때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은 상식 수준의 진리입니다. 수정란 자체가 정자의 23개의 염색체와 난자의 23개의 염색체가 합쳐져 이미 46개의 인간의 염색체를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세포에 불과하지만 독특하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이며 또한 완전한 개체입니다. 수정란 이후의 과정은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므로 어느 한순간을 선을 그어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는 특별한 시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정란과 배아가 가치에서 차이가 날 수 없으며, 배아와 태아가 생명의 존엄성에서 구별될 수 없으며, 신생아와 영아가 존재적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수정란 자체가 완전한 유전 정보를 가지고 있고 산소와 영양분 등 조건만 충족되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인간 생명의 시작은 언제부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인간의 영혼이 존재하면서 생명이 시작됩니다. 그러면 배아에도 영혼이 있겠습니까?
창세기 2장 7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아담)을 지으시고 생기(루아흐)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아담)이 생령(네페쉬 하야)이 된지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신체를 만들고 생기(영혼)를 불어 넣으니까 생령 즉 영혼을 가진 살아 숨쉬는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창조된 영혼이 신체안에 들어 올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영혼이 어느 시점에 들어오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51편 5절에서 그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는 말씀과 시편 139편 13절에는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잉태의 시점에서 벌써 "나"라는 영혼을 가진 인격적 주체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잉태는 히브리어로 "야함"인데, 이 말의 뜻은 성교를 갖다는 말입니다. 바로 정자가 난자를 만나서 수정란이 될 때 이미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시139:13-16을 보십시오. 이미 배아가 생명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이스토텔레스는 태아는 원래 식물이다가 다음에 동물이 되고 마지막으로 인간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가르침의 영향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는 태아는 임산부가 태동을 느낄 때에(14-20주) 영혼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중세기 동안에는 영혼이 이성적이 될 때에 유아가 인간으로 간주된다고 하였습니다(남아40일, 여아 80일). 이것은 과학적 규명으로 볼 때나 성경으로 볼 때 맞지 않습니다. 사람은 수정체에서부터 영적 존재가 되며(창2:7; 욥33:4; 전11:5) 사람의 생명 창조에는 하나님이 관여하십니다. 어떤 인간이든지 인간이 생기기까지는 거룩하신 자,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세 동반자가 있어야 할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생성과정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욥10:8-12) 자기의 생성과정을 그릇속에 우유를 부어 넣은 것(수정)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엉긴 젖처럼 엉기게라고 수정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성하시고 발전시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형성 과정에 능동적으로 일하시지만 한 개인의 영적 사역을 위해서도 준비하십니다.(사49:1,5 렘1:5) 태로부터(개역 태에서 나옴으로부터)는 그 사람이 아직 태 속에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관여하심을 가리킵니다. 태에 있는 기간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출생 이전부터 아셨고 이미 택정하여 선지자로 임명하였습니다. 의사 누가는 세례요한의 출생에서 복중에서 뛰노는 태아를 아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눅1:41,44) 또한 아기 예수님의 출생기록에서도 누가복음 1장 46절과 47절에서 마리아는 태중에 있는 아기 예수님을 "주님으로", "내 구주 하나님"으로 호칭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혼은 수정란이 형성되는 바로 그 시점에 인간의 신체 안에 들어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배아를 죽이는 것도 살인에 속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중요한 논점은 배아 복제가 인간복제인가 아니면 질병 치료를 위한 장기 복제인가입니다. 배아 복제는 생식용 개체복제와 치료용 배아복제로 나누는데, 인간배아복제는 주로 질병 치료를 위한 줄기세포의 추출에 있으므로 치료용 배아복제이므로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이를 생식용으로 바꾸어 개체를 복제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복제는 핵을 제공하는 원본 인간과 같은 유전자를 가진 새로운 인간개체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배아복제'는 그와 다른 새로운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복제는 엄밀히 말하면 인간배아복제인데, 복제된 개체의 생존을 배아상태로 한정하여 사용하는 것을 일컫는 것입니다. 인간생명은 연속적인 과정이기에 어느 시점에서 장기나 세포를 추출했느냐는 사소한 차이일 뿐이며, 결국 인간생명인 배아의 복제는 인간복제의 한 형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나와 똑같은 인간들이 20명 30명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도 단지 대량생산, 우량 생산의 도구가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사람들이 사는 곳은 지옥이 될 것입니다. 복제 인간의 출현, 인간 개체의 정체성 혼란, 원숭이와 인간의 교배실험과 같은 인간과 짐승의 몸을 가진 사람들의 출현, 종간의 구분이 없는 바이러스의 출현, 남성과 여성이 필요치 않는 무성생식의 시대가 되어 인간사회의 버팀목이었던 가정마저 파괴될 것입니다.

셋째는 문제는 인간의 수단화입니다.
복제된 인간배아를 이용하여 암과 같은 인간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술을 개발해낼 수 있다고 합니다. 수요에 미치지 못하는 장기공급을 위해 장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지닌 여분의 인간을 냉동보관함으로 언제든지 이를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배아줄기 세포를 만들기 위해 242개의 난자가 필요했듯이 여성의 도구화가 심각해질 것입니다. 인간의 수단화가 심각해질 것입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목적적 존재이기 보다는 수단적 존재로 여겨질 것입니다. 생명도 아닌 세포덩어리에 집착하기보다는 살아있는 난치병 환장의 고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지며 생존을 위한 동등한 권리를 갖는 것입니다. 한 생명을 위해 다른 생명을 희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여성이 단지 난자 제공자로 수단화될 수 없습니다. 당장의 눈 앞의 이익만을 위해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고귀성이 파괴된다면 인류는 더 후퇴하는 것입니다. 난치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래서 유엔총회 법률위원회도‘인간복제에 관한 유엔 선언문’을 채택하며 모든 형태의 인간복제를 금지함을 촉구했습니다. 인간존엄 및 인간생명 보호와 양립할 수 없는 모든 형태의 인간 복제 금지한다고 했습니다. 현재 세계 각국은 종교계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치료 목적의 배아복제 연구를 경쟁적으로 진행시키는 이유는 성공시에 얻게 될 경제적ㆍ사회적 이득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치료용 목적의 배아복제 연구라는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허용되고 있습니다. 윤리문제도 없고 면역학적 거부반응도 없는 성체줄기세포가 현재의 기술로 분화시킬 수 있는 세포의 종류가 제한적이다는 이유로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환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 황박사의 실험은 사람의 난자를 추출해 핵을 제거하고 여기에 환자의 체세포를 이식하는 핵치환 방식으로 수정란을 만든 뒤, 이것을 발생시켜 줄기세포를 얻은 것으로서 수정된 배아를 이용하지 않고, 거부반응도 없앨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배아줄기세포를 치료에 적용한다하여도 일생 동안의 장기이식에 따른 거부반응을 막기 위해 약물치료를 해야 하고 배아줄기세포의 빠른 성장으로 인하여 이식을 했을 경우에 암발생 확률이 높아지며 각족 유전적 문제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배아 줄기 세포 연구는 생명공학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이 된다면 인류는 다시 바벨탑을 쌓고 삶의 질과 수명 연장이라는 명분으로 새로운 우상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우상은 존재하는 것이고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인간의 바벨탑은 쌓아져 왔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벨탑은 결국 무너지고 우상은 결국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다수가 환호한다고 그것이 진리는 아닙니다. 진리는 외로워도 진리입니다. 진리는 홀로 주장하여도 진리입니다. 진리는 돌팔매를 맞아도 진리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유익이나 편리, 쾌락이 주어진다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우상을 만들고 우상이 우리 인생의 뿌리가 되게하여 바벨탑을 쌓아서는 안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유다의 2대왕 아비야 때도 북쪽 이스라엘 나라가 우상을 만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12지파 중에 10지파가 그를 지지하였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지지하고 인기가 올라가자 무엇을 하였습니까?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수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외치는 사람들을 쫓아냅니다. 정의를 부르짖고 바른 축관관, 행복관, 인생관을 말하는 사람들을 매장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우상숭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무엇을 합니까? 어용 제사장을 세웁니다. 성직 매매를 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유다를 치기 위해 전략을 마련합니다.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병력을 비교해 보십시오. 3절 말씀입니다. 사십만대 팔십만입니다. 비교가 되지 않는 전쟁입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종 현대의 우상들과 전쟁하는 우리의 전쟁도 이렇게 힘겹습니다. 병력도 부족(3)합니다. 전술도 미비(13)합니다. 지지층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어떤 영적 전쟁에서도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뿌리가 썩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뿌리만 썩지 않으면 반드시 때가 되면 새순으로 일어나듯이 우리는 예수님께 뿌리를 박으면 언젠가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까?

1. 여호와께 부르짖어야 합니다(14).

숫자적으로 2:1입니다. 전략도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4절입니다. 유다 사람들이 돌이켜 봅니다. 사건을 직시합니다. 문제를 정확히 파악합니다. 그리고 자기 앞에 있는 적병, 엄청난 문제를 보고 어떻게 합니까? 이럴 때 사람들은 세 가지 반응을 합니다.

첫째는 원망하는 방법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상용하는 방법입니다. 사탄이 가장 잘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이제까지 왕은 무엇을 했냐는 것입니다. 군대도 잘 육성하지 못하고 전쟁에 대비하여 무기도 만들어 놓지 못하고 무엇을 했냐는 것입니다. 이런 심각한 문제의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아이들이 시험을 보았는데 점수가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았습니다. 엄마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제 저녁에 스트레스를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침 일찍 깨워주지 않아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반응은 낙심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할 때입니다. 80만대 40만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골리앗 앞에 서있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습니다. 가나안을 탐지하고 온 정탐군 중 10명과 같습니다. 그들은 기골이 장대한데 자신들은 메뚜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메뚜기 콤플렉스에 걸리는 것입니다. 저도 가끔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참 어쩔 수 없구나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제 저녁에 집에 가려고 하는데 딸이 반주자 악보를 가져다 달라고 전화가 왔습니다. 예배당에 올라갔는데 최집사님이 꽃꽂이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야기를 하다가 집에 먼저 가겠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한 참 가다 생각해 보니 악보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입니다. 악보를 가지로 예배당에 갔다가 악보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이야기만 하다 온 것입니다. 이럴 때 자신에 대하여 낙심합니다. "어쩔 수 없구나, 해도 않되는 구나. 나의 한계는 이것이구나" 이것이 심각해지면 포기하고 회피하고 결국 자살해 버립니다.

세 번째는 목표 자체를 잘 못 세웠다고 생각할 때는 죄의식 수치심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특권입니다. 군인보다 더 큰 무기입니다. 수보다 더 큰 무기입니다. 전략보다 더큰 무기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
우리의 입술을 통해 원망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좌절하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했을 때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히스기야가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 14:14)"라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2.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18).

사람들은 이런 문제가 다가오면 대부분 무엇을 의지합니까? 일차적으로 자신의 힘을 의지합니다. 자신의 건강, 자신의 지혜, 자신의 실력, 자신의 경제력, 자신의 건강을 의지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당연한 삶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외부의 힘을 의지합니다. 다른 사람의 지혜, 다른 사람의 경제력, 다른 사람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안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좌절합니다. 포기합니다. 자신의 힘이 되어 주지 못한 이웃과 가까운 사람을 원망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여기에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유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승리의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들은 무기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외국의 구원병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수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지성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과학 문명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전략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말씀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 9:10)"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시 115:9)"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잠 29:25)"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여호와를 의지하였습니다. 사울의 갑옷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창과 검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였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 17:45)"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결국 불가능하게 보였던 골리앗을 무너뜨렸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사 40:31)"

힘겨운 싸움이 있습니까? 원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불안한 미래가 있습니까? 우상을 의지하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승리의 깃발을 올리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3. 하나님이 붙여 주셔야 합니다(16.15).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한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전쟁은 승리하였습니다(18). 승리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같이 보였던 전쟁입니다. 그러나 승리하였습니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했습니다. 승리의 환호가 넘쳤을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나라는 강성해집니다(19) 하나님을 거역하면서까지 기술을 개발하지 않아도 인권을 무너뜨리면서까지 발버둥치지 않아고 나라는 강성해졌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적군은 재기가 불능해 집니다(20)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그 이유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아주 간단 명료하게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유다 앞에서 도망을 했습니까? 그 많은 숫자가 있는데 왜 도망합니까? "하나님이 그 손에 붙이신고로"입니다. 하나님이 붙여 주시면 그 무엇이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힘이 대단한 것 같지만 지극히 미미한 것입니다. 개미들이 집을 하루 종일 힘들여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짓는다해도 사람이 삽으로 한 번 파버리면 그만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 바벨탑을 쌓는다할지라도 하나님이 무너뜨리면 하루 아침에 흩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고 있지 않습니까? 지진이 일어나면 그 좋은 문명도 하루 아침에 침몰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성과 과학이 발달되었다고 인간이 교만해지면 안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시 2:4)"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잠 3:34)"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교만하면 안됩니다. 조금 힘이 있다고 조금 경제력이 풍부하다고 조금 배운 것이 있다고 조금 실력이 있다고 조금 아름답다고 교만하면 안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 16:18)"
학교도 하나님이 붙여 주셔야 됩니다. 직장도 하나님이 붙여 주셔야 됩니다. 건강도, 성공도, 행복도 하나님께서 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유다 나라가 힘이 있어서 전략이 좋아서 승리한 것이 아닌 것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아비야와 유다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 인생도 승리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내 힘으로 안된다고 절망합니까?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높다고 건너야 할 강이 너무 넓다고 좌절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붙여주시고 우리 하나님께서 물리쳐 주실 줄 믿습니다.

과학은 인류의 발전과 행복을 위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최근의 생명공학의 발달은 창조주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창조권에 도전을 하는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어 저주의 삶의 현장에 떨어진 인간이 생명공학으로 에덴 동산을 지키는 화염검을(창 3:24) 뚫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진정 영생을 얻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 16:31)" 인류의 행복과 삶의 질, 죽음과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질병 가운데서도 행복과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인류는 배아 줄기 세포 연구로 잘못된 바벨탑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잘못 쌓은 바벨탑은 결국 무너지고 인류의 비극을 초래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드도를 믿음으로 구주로 영접하여 이 땅의 천국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우리는 진정 행복해지고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떤 문제가 다가오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응답 받아야 합니다(14).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의 기도를 응답해 주셔서 삶의 질을 회복해 주고 풍요로운 행복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아무리 과학이 발달된다하여도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18).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과정의 고통이 있다하여도 결국 승리와 형통의 길을 보장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붙여 주시면(16.15) 삶의 현장에서 다가오는 갖가지 힘겨운 적과의 싸움에서 결국 승리할 줄 믿습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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