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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 22: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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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시되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실 만큼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사랑하셨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에덴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대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그대로 죽도록 내버려두실 수가 없었습니다.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장군 동무와 타냐와의 대화 장면입니다. 장군은 타냐에게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느냐고 질문합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에 타냐는 “혁명의 와중이고 거리는 불이 나고 복잡해서 그저 도망치는 중에.....”라고 말을 얼버무립니다. 그때 장군이 “헤어진 정말 이유는 무엇이지?” 하고 다그치자 타냐는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실토합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내 손을 놓아 버렸어요.” 이 때 장군은 타냐에게 말합니다.
“내가 사실을 가르쳐 주마. 코마로프는 네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너의 아버지는 바로 닥터 지바고야. 만일 그가 네 친아버지였다면 아무리 거리에 불이 나고 혁명의 와중이라도 절대 네 손을 놓지 않았을거야.” 진짜 아버지와 가짜 아버지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짜 아버지는 결코 딸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참된 사랑과 거짓된 사랑이 차이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 육신의 어미는 자식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사랑하는 자녀를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린 것처럼 자식이 아버지가 싫어 손을 놓아버릴지언정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식일지라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더 나아가 에베소서 1:3-5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창세전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신령한 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고, 장차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
을 받을 아들이 되신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은 “내 몸” 즉 내 신분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나”는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아무리 지체가 세상에서 높아도, 아무리 건강해도 알맹이 없는 가라지처럼 불에 태워 없어질 허무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어도, 배운 것이 일천해도, 세상에서 겨자씨같이 하찮아 보여도,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며 지극히 존귀하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별로 없다고 해서, 쥐꼬리만한 권력 나부랭이 하나도 없다면서, 가방 끈이 짧다고 자존심 상하거나 열등감을 가지거나 원망 불평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자들의 부와 지식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01:10,11)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같이 쇠잔하리라

(전02:21)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자신을 먼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내 자신을 하나님께서 온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존귀한 존재로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 사랑을 스바냐 성경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습3:14-20)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내가 ... 너희로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뛰는 말씀입니까?
스바냐 3장17절 말씀 가운데 “너”라는 단어 대신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다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이동희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동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이동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이동희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이동희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썩어질 이 땅의 권세자나 재벌이나 유명 인사가 아닙니다. 온 우주의 창조자요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잠잠히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하신다는 뜻입니다.(He will renew you in his love)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날마다 젊어지고, 날마다 첫사랑처럼 싱싱하고, 날마다 첫 사랑처럼 기쁘고 즐거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볼 때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처럼 사랑하시는데 그 알량한 돈 몇 푼 때문에, 그 무엇 때문에, 짜증내며 원망 불평하며 기가 죽고 풀이 죽어 지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름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고 계심을 믿으
시기 바랍니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만큼,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만큼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면 자기 존재가치를 상실해 버립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을 때 삶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예수 전도단에서 활동하는 이민섭이란 청년이 예수 믿지 않는 아버지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귀한 존재가 되로록 하기 위해 쓴 곡이 바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복음성가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 영원한 가치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진정한 VIP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라는 자존감과 긍지를 가지시고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초막인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머무는 곳이면 천국입니다. 몸이 아프시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풍부에도 궁핍에도 부족함이 없는 행복한 삶이 되게 합니다. 사랑이 지배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옥도 천국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 나는 적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맞바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소중한 가치있는 존재이다.”라는 긍지와 자존감으로,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며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그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겠습니까?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도 그 받은 바 사랑이 자신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다 기독교인 아닙니다.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어느 목사님 말대로 “교회에 등록된 교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아니고, 피아노가 집에 있다고 해서 피아니스트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집에 바이올린이 있다고 해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하지 않습니다. 집에 피아노가 있든, 바이올린이 있든 있는 그 악기를 가지고 목적한 음악을 소리를 통해 나타낼 수 있어야 피아니스 트, 바이올리니스트 등 음악가로 불리우는 것입니다. 집에 돈을 많이 쌓아놓았다고 부자가 아닙니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과 믿음으로 베풀고 섬길 때 영원한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부자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극히 가난한 자가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사랑이 생활을 통해 나타나야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 형제에게 사랑을 나타내 보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 거하는 생활, 다시 말해 사랑을 나타내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온전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 이웃들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누구든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져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던 것처럼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 3장 16절 이하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일서 3:16-18)

오늘 본문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둘째는 그와 같으니”라는 말씀의 뜻은 둘째도 첫째 계명과 같이 큰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같은 것으로 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같은 하나의 계명으로 보신 것입니다.

유명한 아시시의 성자인 프란시스가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겪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그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문둥병 환자를 만났습니다. 그 문둥병자를 본순간 마음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한편은 그에게 가서 기도해주고 싶은 마음이었고, 다른 한편은 문둥병자로부터 병이 전염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었습니다. 결국 두려운 마음이 앞서 문둥병자를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부담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그는 마음에 생긴 부담 때문에 그 자리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문둥병자를 그냥 지나쳤는데 그것이 잘못입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왜 그를 그냥 지나쳤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솔직하게 “그가 너무 더럽게 느껴져서 그 병이 전염될까봐 그랬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그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그 더러운 문둥병자보다 나으? 너는 이전에 그 문둥병자보다 더 더렵혀진 죄인이었다. 그런데 난 그런 너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했단다.” 그 순간 그는 문둥병자보다 더 추하고 더러운 죄인이었던 자신에게 주님이 찾아와 사랑으로 받아주셨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문둥병자에게 돌아가 그를 끌어안고 기도했습니다. 이때부터 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는 알베르나의 산록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끊임없는 사랑의 순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생의 목숨이 다하는 순간에 “나의 사랑, 나의 전부이신 예수여” 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과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전 인격과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십자가 사랑을 통해 자신의 참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참된 성도의 모습, 참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거나 미워하는 자는 거짓된 사랑입니다.

매일 새벽기도회에 나와 2시간 이상씩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어느 여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기도하던 중 신유의 은사 등 여러 은사를 받아 병환자를 위해 기도하여 병을 고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모든 문제들을 기도를 통해 해결 받았는데, 유독 한 가지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었습니다. 남편과 자녀들이 예수를 잘 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운전사였는데 믿음이 없었고, 또 자주 도박을 해서 돈을 날리기 일쑤였습니다. 자녀들도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억지로 몇 번 출석 할 정도이고 제멋대로였습니다. 남을 위한 기도는 자주 응답되지만 이상하게 자기 가정문제는 영 풀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마음을 굳게 먹고 금식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 중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시는데 에베소서 5장 22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 말씀이 가슴에 뜨겁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집사님은 믿음이 워낙 좋고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다보니 무조건 ‘믿습니다.’ 하고 몰아붙이는 식이었습니다. 남편과 자녀들을 마치 귀신을 좇아내듯이 몰아붙여 기를 못 펴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일을 ‘믿습니다.’로 해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집사님의 이러한 신앙태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금식기도중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은 자신의 믿음과 기도로 제압하려 하지 말고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 집사님이 방법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무조건 믿음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남편과 자녀들을 사랑으로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가끔 술 먹고 들어와 소리를 질러도 죽은 듯이 주님을 섬기듯 열심히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그랬더니 문제가 풀리기 시작하는데 남편이 술도 끊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고 염려했던 자녀들의 진학문제도 깨끗이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집사님에게 사랑이 없는 믿음과 기도보다 사랑으로 섬기는 기도생활을 더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으로 섬겨야 할 우리의 <이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 예수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15:12-14)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이웃의 구원을 위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녀들이 되시기 축원합니다. (이동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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