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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물의 신앙 (행 20:17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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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가 무엇인냐? 고 묻는다면 바울의 목회를 예로 들어
겸손과 눈물과 참고 주를 섬기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겸손과 눈물과 참고 주를 섬기는 것
이건 비단 목회뿐만이 아니라 성도의 바른 신앙생활도
바로 겸손과 눈물과 참고 주를 섬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바울은 유두고 사건 후 드로아를 떠나
앗소와 미둘레네 그리고 기오와 사모섬을 거쳐 밀레도에 이르게 됩니다.
바울의 계획은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3년 동안 목양하였던 에베소에 들리지 못하고 곧장 밀레도로 온 것입니다. 밀레도에 도착한 바울은 사람을 보내어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합니다.
그리고 에베소 장로들에게
권면과 더불어 고별설교를 한 내용이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바울의 권면과 설교를 통해
나의 신앙과 교회를 섬기는 자세가 바로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지난 3년 동안 에베소에서 어떻게 교회를 섬겼는가를 살펴보면

18절에 [ 아시아에서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
즉 바울의 에베소에서 3년 동안 사역이 어떠했는가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잘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목회를 하였습니까?
19절 [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 라고 합니다.
바울은 겸손과 눈물과 시험을 참고 주를 섬겼다고 합니다.
이 말은 바울이 어떻게 주님을 섬겼는가를 수식해 주는 말입니다.
목회란 바로 주님을 섬기는 것 이지요.
맡겨준 양떼를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지요.
어찌 목회만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겠습니까?
성도의 모든 사역은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섬길 때 3가지 자세로 섬겼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 분야에 성숙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세 아닙니까?
그것도 기본적인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1) 모든 겸손으로 섬겼습니다.
겸손은 성도가 제일 먼저 배워야 할 신앙의 자세입니다.
마11:28절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겸손은 마음을 비우는 것,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음을 비우면 마음이 편합니다.
신앙생활도 어떤 면에서 보면 마음 비우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겸손은 신앙의 기본 자세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몸에 베여야 할 자세가 겸손입니다.
왜냐하면 교만해지면 하나님이 꺾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떤 경우에만 겸손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겸손이라 합니다.
즉 끝까지 겸손으로 섬겨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섬김의 모델을 가끔 천상을 열고 보여줍니다.
계4:10절에
[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게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었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이 땅에서 충성한 성도가 천상에 올라가 장로의 반열에 서서
주님으로부터 면류관을 받고서는 그 면류관을 벗어서 주께 바치면서
모든 영광과 존귀와 능력은 하나님만이 받으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라고 마지막 까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습입니다.
끝까지 겸손한 자세로 주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2) 바울은 눈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눈물은 바울의 목회 저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목회 하면서
31절에 [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워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
바울의 3년간 사역을 통해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가 병자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악귀가 물러가는 역사가 나타나며
에베소의 우상 아데미의 세력을 꺾어 놓고
고린도 풍조를 여호와를 경외하는 분위기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던
말씀의 세력의 이면에는
바로 바울의 눈물의 사역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눈물은 감정입니다. 머리로만 이해하는 데는 눈물이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공부 제자 훈련을 해도
눈물 없는 성경공부, 제자훈련은 교만하게 만들 뿐입니다.
저는 탤런트들이 연기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 보면
그 참 연기도 아무나 하는 것 아니구나 싶어요.
그런데 글을 통해 알게 된 것이 명연기자일 수록 눈물을 흘리는 연기를 할 때
그 사람이 되고, 그 마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연기가 아니라 진짜 눈물이 난다는 것입니다.
저도 해 보니 되더라고요.
불치의 병 가진 자녀의 부모가 되어보니
그 가정 위해 기도하니 눈물이 나더라고요.
바울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심장을 갖고
또한 어려움 당하는 교우들의 심정이 되니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주님 앞에서 눈물 흘리면 위로를 받는 것 있지요, 용기가 솟아나는 것 있지요
눈이 밝아지는 것 있지요. 눈물의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3) 바울은 참고 주를 섬겼습니다.
저도 공감합니다. 목회를 하다 보니 결국은 목회는 참는 것이구나.
마찬가지로 어디 목회 뿐이겠습니까? 신앙은 참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유대인의 간계로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았다고 합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의 간계로 얼마나 억울한 일 많이 당했습니까?
그래도 참았다고 합니다.
왜 낮아져야 하고 왜 눈물을 흘려야 하고 왜 참아야 합니까?
주님 더 잘 섬기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의 기본자세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자세 3가지
겸손과 눈물과 참는 것, 마음에 꼭 꼭 세기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면서 그 중점을 어디에 두고 있었습니까?

바울의 관심은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바울은 구애 받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20절에 [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
21절 [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사람이 많고 적고 그것 상관없이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상관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전했습니다.
바울은 사람이 많고 적고 상관하지 않고
신분이 귀하든 천하든지 구분하지 않고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한번은 부흥회 오라 해서 갔는데 교인들 15명 앉아 있는 것 있지요
그것도 본 교회 성도 8명 이웃교회 성도 7명해서 15명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번에 강사 참 잘 청했습니다.
저는 교인 한 명도 없이 개척을 했기 때문에 미안해 할 것 없습니다.
그리고 개척 첫날 13명을 떠올리며 부흥회 최선을 다했지요
15명이 마치는 날에는 30명 쯤 모였어요.
그리고 하는 말이 [ 목사님, 너무 너무 은혜 받았습니다.
내 년에 또 했으면 좋겠습니다 ]
여기에는 제가 대답을 못했습니다.
사람은 분위기에 좌우됩니다. 목사도 분위기에 좌우됩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분위기가 중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위기와 위치와 환경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약해지거나 시들해 지는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수 천명을 만나도 회개하고 예수 믿어야 구원 얻습니다.
단 한 명을 만나더라도
회개하고 예수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라고 전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복음전파의 중심입니다.
이것은 오늘 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와 믿음 - 헌 옷을 벗지 않고서는 결코 새 옷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새 은혜를 맛보기를 원하십니까?
새로운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이 세상에 물든 마음과 생각들을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3년간의 에베소 사역을 회상을 하면서 자신의 사역을 간증했습니다.
그리고는 현실로 돌아와 자신의 심정의 각오를 말합니다.

1) 지금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으로 가게 하는 것이 성령님이라는 것입니다.
22절 [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에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
상당히 논리적인 바울이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은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모르고 올라가는 길입니다.
성령의 사람에게는 이런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았는데
성령님께서 나를 어디론가 보낼 때가 있습니다.
마치 성령님이 빌립을 광야로 이끌어 가서
구스 네시를 만나 복음을 전하게 하듯이
전혀 예상치도 않은 곳에 보낼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이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성령이 한 가지 가르쳐 준 것은
이번에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당할 것을 느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에게 얼마나 고민이 되었겠습니까?

이렇게 성령이 우리에게 때로는 기쁨을 주고 확신을 주고 비전을 주시지만
때로는 어려움이 있다 고난이 있다 고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쁨을 주고 비전을 주는 일에는 아멘 하기 쉽습니다만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있다는데 아멘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비장의 무기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성령님이 가라고 하면 그냥 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기 싫어도 성령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니 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철이 들수록 깨닫게 되어지는 것이
아하~! 신앙생활은 단순하게 해야 하는구나 !
사람이 언제 단순해집니까? 하나만 알 때입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어린아이 일 때입니다. 어린아이는 엄마 밖에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엄마만큼 잘 나고 엄마만큼 큰 사람이 없어 보이는 거예요.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내게는 제일 크신 분이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이라면 그냥 믿고 따르는 거예요.
아버지 하나님이 더 잘 알아 하시기 때문입니다.

벌 집 모양이 육각형으로 생겼지요?
왜 벌들이 네모나 세모나 동그랗게 하지 않고 육각형으로 집을 짓겠어요? 하나만 만드는 게 아니고 수없이 많은 벌집을 만들어야 되는데
벌들은 집을 꼭 육각형으로 짓습니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육각형으로 짓는 게 가장 적은 양의 원료를 가지고 가장 많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게 바로 그 벌집 모양이라는 겁니다.
과학자들이 연구하고 연구해서 얻어낸 결과가 이미 자연 속에 있는 거라고요.
그러면 어떤 게 좋겠습니까.
연구해 보고 계산해 보고 아 육가형으로 짓는 것이 좋겠구나
그럴 필요 없이
하나님이 만드신 그 모양이 가장 좋은 모양이라고 믿어 버리면
괜히 복잡한 수학 물리학 그런 거 필요 없이 그냥 믿어 버리면 되잖아요.
그것처럼 우리의 신앙의 삶에 있어서도,
어떤 삶이 가장 아름다운 모양일까
내가 계산하고 따져보고 시행착오를 해 보고,
그래서 얻은 결과가 이미 하나님이 이끌고 있는 삶의 방법과 같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을 때
가장 복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는 거예요.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것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뭔가 잘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뭔가 뛰어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다만 내 중심적으로 보는 시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한 번 이끌려 지기를 원한다는 거예요.
바울은 예수님 만난 이후 이것을 깨닫고
성령이 인도하면 그냥 달려가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비장의 무기란 바로 고난의 대가를 치를 각오였습니다.
그래서 24절
[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이것은 바울의 사명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사명 선언문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어떻게 사명을 위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할 만큼
생명 바칠 각오를 했겠습니까?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제일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믿는 자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제일 귀한 것이 ‘목숨’입니다.
내 목숨보다 귀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럼 어떤 인생이 위대한 인생이냐
목숨보다 더 큰 것을 가지고 있는 인생이 귀한 인생입니다.
즉 사도바울은 자신의 목숨보다 더 큰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 증거 하는 사명’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기보다 더 크고 귀한 것이 있기에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더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놓고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목숨보다 더 큰 사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나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영원한 생명에 눈이 뜨여지고 보니
육신의 생명은 조금도 귀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목숨보다 더 큰 가치의 사명을 붙들며 사는 인생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목숨을 드릴 수 있는 삶으로 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목숨보다 귀한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고 헌신할 수 있는 믿음의 종이 되길 바랍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자신의 심정과 신앙의 결단을 피력하면서
어떻게 하면 교회를 잘 섬길 수 있는가? 권면을 합니다.
바울의 권면 중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데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26-27절에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고 고백하면서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내가 에베소 장로들에게 얼마든지 권면할 수 있는 것은
신앙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겔3:17-21절 까지 말씀을 상기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내가 전도하지 아니해서 지옥 가면
그 피 값을 네게서 찾겠다는 말인데
바울은 적어도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다 복음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 양심의 결백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십일조 성수주일 지킨다고 신앙양심에 거리낌이 없습니까?
피에 대하여 깨끗합니까? 신앙양심에 거리낌이 없습니까?
그러면서 권면하는 말이 28절에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
지난 주 우리 교회에 많은 직분자들을 세웠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기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교회는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피 값을 해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바른 교회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흘리신 피 값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리신 피는 하나님이 흘리신 피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듯이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섬기면서
꼭 경계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29-30절에 보면
[ 양 때를 어지럽게 하는 흉악한 이리를 조심하라 ] 고 권면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돌보는데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흉악한 이리떼라고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동안에 흉악한 이리떼를 경계하라고 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바로 양떼들을 흩어 놓고 물어뜯는데 있습니다.
흉악한 이리떼는 이단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당시 가만히 들어오는 율법주의자들도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은혜의 복음입니다.
살리는 복음이요 구원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자기가 기준이 되어 자꾸만 편을 가릅니다.
그래서 교회사에서 나타나는 이단들이나 불건전한 사이비들은
특징이 독선적 분파주의입니다.
말로는 자기들이 제일 잘 믿고 자기들만이 옳고
기존 교회는 부패하고 섞었다고 공격합니다.
이러한 이리 떼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1) 말씀으로 잘 양육 받아야 합니다.
31절 [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워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
즉 말씀으로 잘 양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평생 동안 말씀으로 양육 받아야 합니다.
지금 밖에서도 평생교육이라는 것이 있지요.
신앙도 평생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32절에[ 그 말씀이 너희를 든든히 세운다 ] 고 합니다.
2) 32절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자녀들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지금 대학 들어가면
온갖 세속문화와 무신론사상, 다원주의사상에 대책이 없어요.
마지막으로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당부하는 말이 있습니다.

물질에 탐하지 말고 약한 사람을 도우돼 35절 주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
남에게 유익을 끼치고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없어도 부자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있어도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서울 강남에는 10억 재산 가지고도 가난하게 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파트 33평이 10억이나 하니 남 줄 것이 없어요.
그 기준은 - 주면서 살려고 하느냐? 받으면서 살려고 하느냐? 입니다.
사실 저희 교회 설립 표어가 행20:35절 말씀입니다.
[ 주는 것이 복이 있느니라 ] 어떻습니까?
내가 살아오면서 지금 하나님께 드려지고 남에게 준 것이 많습니까?
나를 위해 쓰고 나를 위해 저축해 놓은 것이 많습니까?
주고 싶어 하고 줄 것이 있는 사람은 부자입니다.
그러나 얻고 싶어 하고 모으려고만 하는 사람은 거지입니다.
어느 목사 딸이 집에 돌아오다가 차비가 떨어져 발을 동동 굴리다가
둘러보니깐 구걸하는 거지가 손에 돈을 들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순진한 딸내미가 하는 말이
[ 아저씨 나 차비 없는데 차비 좀 빌려 줄 수 없어요 ] 하니
[ 벼룩의 간을 빼 먹어라 ] 고 하는 것이 아니라
[ 야 나 오늘 부자되었네 ] 하면서 흐믓해 하면서
나도 그냥 얻었으니 너도 그냥 가지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딸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이 그 다음 주일 설교 제목이
[ 나도 그냥 얻었으니 너도 그냥 가지라 ] 고 하더랍니다.
그냥 나눠 줄 수 있는 부자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서울에서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어떤 차에 보니까 '리턴 공차' 라고 해서 선전을 하더라고요.
리턴공차가 뭘까? 그게 뭐냐면 지방에서 화물을 싣고 서울에 왔는데,
내려 갈 때는 빈 차로 내려가야 되는데 그걸 연결 해 가지고
일반 화물차 보다 아주 싼 가격에 짐을 싣고 내려갈 수 있도록
주선하는 업체를 말합니다.
그냥 운전자끼리 소규모로 알선해서 했었는데
이제는 아예 사업화해서 그렇게 한답니다.
어때요 천국으로 돌아갈 때 리턴 공차가 되지 말고
천국 금은보화 실고 가는 하늘마차가 되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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