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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릇 네 마음을 지키라 (잠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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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물이나 사항을 보고 해석하는 데에는 시각이나 관점이라고 하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해석의 틀이 있습니다. 이 해석의 틀에 따라서 같은 내용이 전혀 다르게 판독되어지고 해석되어집니다.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삶의 구조와 경험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해석과 느낌과 감동을 갖게 됩니다. 그릇된 해석을 할 수밖에 없는 삶의 사고와 경험의 영역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비틀어진 해석과 느낌과 감동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의 틀을 가진 사람들은 어떠한 삶의 상황에서도 그 삶을 행복의 꽃으로 수놓게 됩니다. 불행의 틀을 가진 사람은 그 어떠한 삶의 상황에서도 그 삶을 불행이라고 하는 과정과 결과로 물들이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은 이와 같이 삶을 바라보고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갑을 잃어버렸거나 반대로 남을 속이거나 훔쳐본 사람들은 붐비는 전철 안에 옆에 있는 사람들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피해를 받았던 사람들 남에게 피해를 끼쳤던 사람들 마음에 상처가 깊기 때문에 상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늘 그 상처로 인하여 자신도 모르게 피해의식 속에서 살게 되고 남들을 가해하며 살게 됩니다. 의외로 우리 주변에는 이와 같은 경우가 많이 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처를 받았다면 속히 치유 받기 위하여 애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받은 상처의 상흔으로 말미암아 괴로워하고 다른 사람을 더욱 상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괴롭게 만들고 그것 때문에 더 괴로워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한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괴로움에 갇혀 스스로 자신을 피해자로 여기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누구나 있는 죄악으로 인한 삶의 상처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씻고 건강한 삶의 시대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의 건강한 삶이라는 것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비틀어진 우리의 왜곡된 자아가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지고 펴지게 되며 그것이 우리의 비틀어진 삶의 실제 생활까지도 바르게 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우리 마음을 지키며 즉 우리 마음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세계로 아름답게 유지하고 이루어 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세계의 능력을 마음껏 구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며 오늘 주신 말씀을 따라 은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 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첫 번째 생각하는 것은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사고구조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사람의 행동과 삶과 역사는 마음의 생각하는 바에 따라 결정됨을 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삶의 순간과 모든 상황 속에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바른 구조를 가져야 합니다. 바른 구조를 가진다는 것은 바른 사고의 원칙을 소유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원칙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삶의 장 가운데에서 기둥과 같은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원칙이라는 기둥을 세우고 그 원칙이라는 기둥사이를 왕복하며 누비게 될 때 그것을 구조 혹은 시스템이라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 역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분명한 삶의 원칙이 있고 그것이 일관성을 이루게 되고 바른 원칙일 때 그 결과에 따른 행동도 바를 수밖에 없음을 보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의지가 약해서 원칙을 세워놓고 지키지 못할 때도 있으나 결국 긴 시간을 합쳐서 생각해 보면 다르게 원칙을 세우고 원칙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결국 우리들에게 바른 삶임을 보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기독교적 사고의 원칙을 세워야 합니다. 마음을 지키려면 생각의 원칙을 가져야 되는데 그 가운데 우리는 믿음의 생각의 원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가장 어려운 경우가 일관성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대해야 할 때입니다. 즉 변덕스럽다는 것입니다. 좋을 땐 좋은데 상황에 따라 혹은 기분이나 상태에 따라 참 대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원칙 따라 움직이지 못하고 감정따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 감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한낱 감정에 의해서 이끌려만 다닌다면 사실은 언제나 심정적인 분위기에 의하여서 끌려 다니게 되고 기분과 상태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중의 하나였습니다. 재산이 무척 많았는데 주식이 폭락해서 재산이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나 실망했습니다. 많은 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살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절반의 재산을 잃었다고 할지라도 아직까지도 쓰고도 남고 좋은 일을 하고도 남을 많은 재물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좌절이라고 하는 감정적인 요인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실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감정 따라 움직여졌기 때문에 그는 아까운 목숨을 잃었고 그가 사용해야 될 많은 것을 사용도 못해보고 그는 그의 삶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생각의 원칙 기초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이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사람들 보면 항상 불안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고 시간 지나면 부담스럽고 결국은 어려운 경우를 겪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생각의 원칙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을 바로 보고 바로 이끌 수 있는 원칙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그것은 결국 인정과 점검과 수정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죄악의 백성이므로 우리의 자아는 비틀려져 있고 우리는 가만 놔두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으니 언제나 우리 자신이 죄악의 성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수시로 점검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수정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질 때 우리의 삶은 바른 원칙 가운데 움직여질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속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주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왜 내가 기쁨과 주의 뜻과 영광을 이루기 때문에 기쁘다는 마음이 들면 우리는 바른 원칙 속에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원칙이라는 것은 처음과 끝이 같은 것입니다. 상황과 끝이 달라지면 그것은 원칙이 아닙니다. 오히려 원칙으로 상황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거나 아니면 불행해 하는 것은 행복할만한 여건이 주어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행복할만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못해서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태가 지속돼도 또 내가 원하는 것과 상황이 달라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마음을 가지면 우리는 그 어려운 상황을 오히려 해석하여 하나님의 기쁨으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사고의 원칙은 더욱이 주님의 사랑에 기초해야 합니다. 내가 용서 받음과 같이 용서받고 또 용납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사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신적 질환에 시달리게 됩니다. 사람에 따라서 내 마음이 상하면 꼭 원수를 갚아야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의 위로를 바란다면 그 마음은 상처 속에서도 치유를 받고 위로를 받게 되지만 원수 갚음으로 그 심정적인 보상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 상처는 더욱 깊어지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어려움 덩어리가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경우가 무엇인가 하면 세상에 한을 품은 사람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한을 품은 사람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그 힘을 휘두르게 되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이 다치고 고통스럽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한을 품었기 때문에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한을 풀었기 때문에 비로소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께 용서받았듯이 내가 다른 사람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없다 내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 없다 생각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믿음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에 기초한 원칙이 세워져야 함을 말씀드립니다. 더욱이 상대방에 대한 최선의 배려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존중해 주셨고 배려해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정말 마지막 사투의 기도를 벌이실 때 십자가를 지기 원치 않으셨지만 마침내 져야 함을 마음속에 수납하실 때 그 고통을 우리는 생각합니다. 제자들에게 나를 위해서 기도해다오 원했지만 제자들은 그 시간도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와 같은 제자들을 보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그들의 상태를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을 배려하고 존중해 주었던 것입니다. “적어도 마음에는 원함이 있었으나 너희가 육신이 약해서 그 일을 못했지. 너희가 마음까지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라고 그들을 인정하고 배려해 주셨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가야바의 뜰에 있을 때 세 번이나 면전에서 부인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찌할지언정 나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의 면전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욕할 때 예수님이 만약에 그 마음이 분노가 일어나서 “이런 나를 수제자라고 따르며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의 믿음을 치켜세웠던 네가 나를 이렇게 욕하고 부인하다니” 생각해서 그 자리에서 원수 갚는 심정으로 “저 베드로는 내 제자입니다”라고 얘기했다면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잡혀서 예수님처럼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초대교회에 베드로가 이룰 수 있었던 모든 사역은 이루지 못하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고 용서하고 용납해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약함을 생각해서 그것을 배려하셨고 베드로가 그렇게 약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의 인간적인 심정을 예수님께서는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에게는 기회가 다시 주어졌고 그는 회개하였고 성령 충만을 받고 나아가서 초대교회를 세울 수 있는 귀한 초석과 같은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요즘 많이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위대한 사랑입니다. 위대한 사랑,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모두를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모두를 진정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으로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돌아와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 속에 그들의 삶을 드렸던 것을 생각을 합니다. 한 번의 징계보다 더 큰 것은 또 한 번의 사랑과 용서와 배려와 존중인 것을 생각합니다. 주님이 이러하실진대 누가 누구를 잘 못했다 힐난하거나 타박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내 자신의 인격이 초라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저도 교회에서 일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야단칠 때가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야단치고 나면 제가 큰 자괴감이 빠지게 됩니다. 무슨 자괴감이냐 하면 “네가 감동을 못시키니까 사람이 변화되지 못하고 네가 교육을 잘 시키지 못했으니 이런 결과가 이루진 것인데 그것을 야단한다는 것은 네 인격의 한계가 아니냐” 제 스스로 야단을 칠 때 느끼는 것은 제 인격의 바닥을 보는 것 같습니다. 내가 감동을 시켰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내가 더 잘 교육을 시켰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왜 내가 잘못해놓고 내가 야단을 치나 그것은 제 자신의 인격의 한계이고 바닥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심히 상심함을 가지게 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힐난하고 타박할 때마다 드는 것은 우리 인생의 우리 인격의 바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정말 큰 위대한 사랑을 생각해 봅니다. 용서할 수 없을 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을 때 사랑하지만 그것은 진실로 우리가 해야만 할 일이고 우리들에게 가장 유익한 일임을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의 요인은 바로 용서와 용납 그 가운데 이루어지는 원칙입니다. 사실은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내 마음이 불편하니 어렵고 힘들 때마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더 진보해야만 합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입니다. 사랑은 용서와 감사와 기쁨과 행복입니다. 미움은 공격과 가해와 분노와 불행입니다.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사랑이 생기고 행복해지는데 나는 괜찮고 상대나 상황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미움이 생기고 불행해집니다.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이러 저러한 생각의 때에 나 자신을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의 심정을 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 말씀처럼 우리는 형통할 땐 찬송하지만 곤고할 때는 무척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의 마음을 무장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행복한 사고의 원칙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니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니 우리는 삶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니 우리는 늘 기대 속에서 삽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에 어떤 마음으로 일어나셨습니까? 제가 한번 여러분에게 여쭤볼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 다 열어보셨지요? 다시 한 번 여쭤 볼게요.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 다 열어보셨지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안 열어 본 사람은 좀 회개하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어제 오늘 눈이 많이 온다는 것을 아마 다 어떤 형태든지 아셨을 텐데. “야 눈이 왔구나. 온 세상이 정말 흰백설로 다 덮였을 텐데 정말 오늘 한번 어디 세상을 보자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계를 만드셨는가” 하는 적어도 우리 삶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내 삶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뭐 그렇다고 내가 좋아지는 것도 없고.’ 이렇게 되면 사는 게 참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기대가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한 번에 또한 호흡을 주신 것은 나에게 또한 기대가 있고 생명의 연장을 주신 것은 내게 대한 사명이 있고 주의 은혜를 주심을 감사합니다.’라고 마음에 기대를 가지고 시작하셔야 합니다. 그 기대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기대입니다. 나 자신에 능력으로 보면 기대할 것 없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를 드리러 오셨지요? “야 오늘 내가 예배를 드리는구나. 길이 미끄러운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올 수 있어서 참 감사하다. 내가 하나님께 찬송하고 기도하고 또 하나님께 내 마음을 드리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내 마음에 새로운 양식으로 삼아야지. 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가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 이 시간 예배를 드리면서 마음에 감격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나의 종교적인 의무가 된다면 이 시간은 우리들에게 인내와 고역을 치루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기대하게 되면 소망과 기대와 삶에 대한 기쁨이 생기게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사람에 대한 신뢰와 믿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나뿐 아니라 그에게도 섭리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나 하나만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라 그도 역시 하나님의 작품이며 그를 통한 하나님의 뜻과 은혜의 섭리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무시하거나 믿지 못한다는 것은 내 인격의 한계입니다.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가 있을 때 그 삶이 행복해집니다. 사람의 실수와 허물이 있으되 결국은 그 삶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니 내가 판단자 되어 판단하고 결정해 버리면 내가 하나님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저절로 따뜻한 사람, 용서의 사람, 이해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수시로 내 부족을 인정하고 주님의 은혜로 수정하려고 하며 사랑을 심정을 가지고 내 주변과 상황과 사람들을 기대하고 섬기며 주님의 섭리를 믿고 기대하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원칙으로 삼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인도하면 마음은 평안하고 기뻐집니다. 그러나 세상의 사단이 우리를 인도하게 되면 마음에는 분요가 있고 시기와 질투가 있고 미움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결정, 내가 하는 행동 과연 주께서 원하시는 것일까? 주님이 하시는 것일까? 생각하면 우리 마음을 결정하게 되고 우리 마음을 지키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생명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내용입니다. 마음의 생각에 따라 결정함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도 하고 사단의 종노릇을 하기도 하니 우리는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도 살고 사단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성경을 보면 안타까운 인물 중에 하나가 바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입니다. 사울왕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가장 준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수레바퀴 밑에 숨을 만큼 정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서 그를 세우실 때 ‘나는 아닙니다’라고 말할 만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마음에 시기심이 들었습니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올 때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과 더불어 승전의 행진을 합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 이 한마디에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천의 능력을 가진 이가, 만의 능력을 가진 이를 품었으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 자인가라고 생각했으면 그에게 행복은 유지될 텐데 마음에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들끓어 올랐던 것입니다. 결국 사울의 그와 같은 시기심은 자기를 찌르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상 18장 10절을 보면 ‘악신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주변을 돌아봐도 정말 악신이 그에게 힘 있게 내리는 경우를 보지 않습니까? 내게도 그런 경우가 있다면 큰 문제입니다. 악신이 힘 있게 내렸습니다. 그렇게 되니 어떻게 했습니까? 사울이 창을 가지고 다윗을 찔렀던 것입니다. 물론 그 창은 빗나갔습니다. 악신이 힘 있게 그에게 임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가 어리석은 일을 할 때 악신이 우리에게 힘 있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사울왕이 어리석은 사단의 종노릇하는 순간입니다.

사도 바울은 반대로 그는 예수 믿는 사람 핍박하고 죽이고 옥에 가두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사단의 종노릇에서 하나님의 종노릇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 믿는 것을 위하여 그의 삶을 걸었고 그는 복음전파를 위해서 그의 삶을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라는 한 인물 안에 있던 두 가지 자아를 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고백 위에 주님께서는 지상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자아는 예수님의 면전에서 살기위해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아였습니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자아가 쟁투할 때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그 순간 우리 마음에 평안과 기쁨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행복이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사단의 종노릇하며 우리는 저 슬픈 어둠 속에서 우리는 고통 속에 울부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지키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도 하고 그의 삶을 누추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엘리야는 그릿시냇가에서 3년 동안이나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음식을 먹으면서 누추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불이 지펴져 그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갈멜산의 대 전투의 승리를 이룹니다. 그러나 이세벨의 암살 위협에 그는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목숨하나 부지하려고 도망치는 순간 그는 지치고 지쳐 로뎀나무 밑을 찾습니다. 죽기를 각오합니다. 하나님께서 물과 떡을 주셔서 그가 광야로 갈 수 있었지만 그의 공적인 시간은 끝나게 됩니다.

우리 올해 표어를 정했습니다. 이제 12월 되니까 이미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져 가고 완성이 되어가고 있으십니까? 이제 조금씩 조금씩 하다보니까 다 완성이 되셨지요? 자, 따라서 합시다. ‘한 수준 높입시다. 헌신합시다. 마음을 넓힙시다.’ 이제 12월쯤 되니까 이제 거의 다 익어서 완성되셨지요? 우리 한 수준 높아져야 합니다. 전에는 마음에 감당할 수 없어서 마음이 들끓었는데 이제는 편안해요. ‘괜찮아. 내가 부족해서 그렇지 뭐, 사람인데 다 그럴 수 있지, 내가 부족해.’ 그렇게 생각하며 우리는 이해할 수 있고, ‘아이, 내가 이 수준에서 머무르지 말아야지.’ 우리는 한 수준 높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헌신해야지 내가 이렇게 살다 갈 수 있나’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들을 수 없는 말을 들으며 이제는 견딜 수 없는 일을 견디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 올해가 한달도 안 남았는데 정말 우리의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만약에 조금씩 조금씩 못 이루었으면 한번에 결단해서 이루세요. 조금씩 조금씩 못 이루면 한번 뚝 자르는 심정으로 결단해서 이루시고 이제는 헌신도 결단하시고 이제는 마음을 넓히는 것도 결단하셔야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이루는 게 제일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안 될 때는 한번에 뚝 잘라서 우리 마음을 그저 결심하는 것이 우리가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대 역사를 이루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베라 지역에서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내 힘으로 부족하니 나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정말 모세가 그때 어떻게 했으면 더 좋았을까요? ‘하나님 제가 주의 일을 하는데 정말 저에게 지금 맡겨주신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내 능력이 안됩니다. 하나님 제게 은혜를 주셔서 정말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이 제게 호흡 주셨으니 이 일을 감당하라고 하신 것인데 제게 감당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했으면 더 좋지 않았겠는가 생각합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더 겸손히 그 일을 간구했을 때 모세에게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이 있지 않았는가 생각을 합니다. ‘힘들다’라고 말하기 전에 ‘은혜를 주십시오’라고 간구하는 것이 우리의 더 성숙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늘 우리 인간관계나 일을 할 때나 우리 살아가면서 제가 여러 가지 말보다 세 가지 말만 하면 된다고 말씀드렸죠? 자, 여러분이 잊어버리지 않으셨을텐데 한번 연습해 봅시다. 우리 여러 가지 살아가는데 구차하게 설명하고 얘기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자 한번 따라서 합시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늘 감사한 것뿐입니다. 나 같은 사람 이렇게 하나님이 사용해 주시고 또 나 같은 사람을 이렇게 인정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마음 상하게 해서 또 여러 가지 부족한 일을 해서 죄송합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내가 잘못했으니 그만 두겠습니다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면 제가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내가 뭐 당신 아니면 만날 사람이 없어? 내가 여기 아니면 있을 때가 없어? 내가 이 일이 아니면 할 일이 없는 줄 알아? 라는 마음이 아니라 정말 겸손하게 정말 내게 기회를 한번만 더 주신다면 제가 정말 열심히 해서 잘해보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이 가진 겸손의 덕목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삶에는 그렇게 많은 말이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여러 말로 표현해 설명해야 한다면 그때는 침묵하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고 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 내가 다 해버리면 하나님이 하실 일이 없어집니다. 벌써 할 말이 많다 생각되면 내가 성령에 지배받고 있지 않고 내가 사단에게 끌려 다닌다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말씀에 순종치 못하면 이 말씀이 은혜가 되지 못하면 나는 사단에게 벌써 끌려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되도 내 마음에 시험이 있으면 은혜가 안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맛있는 음식도 환자에게는 입맛이 써서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내가 은혜 받지 못하고 있으면 내가 환자라는 것을 속히 인식하고 자신을 치유하기를 애써야 합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내부에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마음을 지키고 그 마음에 큰 은혜를 입는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데 합당한 말과 행동만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절제해서 문제가 아니라 너무 절제하지 못해서 문제입니다. 말이 적어서 문제가 아니라 말이 많아서 문제고 너무 늦게 말을 해서 문제가 아니고 너무 생각과 마음에 책임을 질 결심도 하기 전에 빨리 나와서 문제입니다. 행동이 늦어서 문제가 아니라 행동이 너무 빨라서 문제입니다.
사람이 어렵게 되는 과정을 보면 실수합니다. 자신을 성령으로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입니다. 실수를 속히 회복해야 하는데 그 기회를 또 놓칩니다. 마침내 자기의 실수를 스스로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점점 더 최악의 상태로 이르는 길을 봅니다.

믿음의 사람은 잘못했을 때 속히 돌이키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범죄했지만 하나님께 돌이켜 회개할 때 징계는 받았으나 용서를 받았습니다. 징계를 받기는 받았지만 용서를 받아 다시 삶의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는 베드로는 결국 회개하고 다시 주님의 일을 했지만 가룟 유다는 결국 슬픔 속에 좌절하고 자결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입니다. 마음지킴은 우리의 육적인 건강과 영적인 건강을 결정하게 됩니다.
마음을 지켜야 우리의 영적인 건강과 육적 건강을 지킬 수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을 지키려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내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고 수시로 씻음 받아야 합니다. 매일 씻어도 씻을 것이 있는 것처럼 매일 회개해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씻어내야 합니다. 어려운 것은 우리 인생은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너무나 큰 방향전환이 일어나고 한순간의 오판이나 거짓말이나 혹은 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고집으로 인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접어듭니다. 정말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데 한 순간 실수하고 한순간 오판하고 한순간 거짓말하고 한순간 고집하는 것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고 고집하다가 결국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닌데 아주 나쁜 길로 가는 것입니다. 너무 안타까운 경우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손해나는 일이 아니라 가장 기쁜 일입니다. 우리 마음을 스스로 기쁠 수 있게 합니다. 내 주변 사람이 잘 돼서 기쁜지, 아니면 내 주변 사람이 좀 못 되서 내가 좀 우월하다고 생각해서 기쁜지, 우리 자신의 상태를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서 기쁜가? 내 뜻이 이루어져서 기쁜가?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풀 한 포기에도 하나님의 진실한 섭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이 점점 버려지게 되고 하나님의 소원을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성숙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내가 모든 일에 이해의 심정을 가지고 대하는가? 오해의 심정을 가지고 대하는가? 우리는 깊이 살펴봐야 합니다. 목사는 여러 가지 일, 예상치 않은 일을 처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밤중인데 아주 깊은 밤중인데 전화가 왔습니다. 밤중에 전화가 오니까 또 마음에 걱정이 되잖아요. 얼마나 급한 일이면 이 밤중에 목사 집에 전화를 걸었을까? 남자 성도였는데, 교회에는 그렇게 열심히 나오시지는 않지만 그래도 매주 나오세요. 그래서 제가 얼굴도 알고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거의 반 울음이에요. 남자 성도님이고 나이도 드셨는데 “목사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급한 일인가? 급할수록 저는 차분해져야 되잖아요. 천천히 얘기하십시오. 그랬더니 아마 두 분이 다투셨나봅니다. 그래서 아내 되시는 분이 베란다에 다가서 뛰어내리겠다고 하셔서 저보고 어떻게 해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을 거 같아요? 전화 바꾸라고 해서 뛰어내리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후에 두 분이 잘 지내셨고 오랫동안 다니셨고 작장 때문에 지방으로 가시기 전까지 잘 지내셨습니다.
어느 한 자매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저는 전혀 알지 못하는 분입니다. 저희 교회에 출석하는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의논하실 일이 있다고 해서 또 찾아오셨기에 잠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희 교회에 본인의 자매되시는 분이 있고, 두 내외가 있는데 그분들 사이에 문제가 있어서 어떤 사람이 잘못했고 어떤 사람이 또 이런데, 저보고 얘기를 해서 해결해 주라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을 듣고 그분께 이렇게 말씀을 드렸어요. “일단 이런 얘기는 본인이 아니면 얘기하시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본인들이 얘기하셔야 될 일이고 그 전까지 다른 사람이 얘기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자매님이 저에게 얘기하셨을 때 제가 그 얘기를 듣고 그 두 사람에 대해서 어떤 일정한 편견을 가지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두 사람의 내용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는 얘기를 듣고 ‘두 사람이 이런 문제가 있구나, 두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해결해 주어야지’라고 생각하면 마음에 어떤 편견이 생길 수 있습니다. 또 다 알고 있는 분들이고 또 예배 참석하고 계신 분들이고 활동하고 계신 분들인데 만약에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좋지 않겠죠. 그래서 제가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어떤 일에 마음이 다급해서 어떤 일을 처리하는 것도 좋지만 중요한 것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두 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전혀 다를 수 있는데 제가 두 분의 사실을 알지 못하고 개입해서 이렇다 저렇다 판단해서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두 분 시간이 지나니까 문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저는 잘 모르겠는데 잘 지내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예배 잘 나오시고 잘 지내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분에 대해서 이런 얘기를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시고 저도 그 얘기 듣고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제가 언제나 성도들을 대할 때 가지고 있는 원칙이 있습니다. 편견을 갖지 말자. 그리고 판단하지 말자. 사람을 판단해 버리면 편견을 가지게 되면 올바로 사람을 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 대해서 판단하지도 않고 편견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혜를 가지고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아마 오셨던 분이 “목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정말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절대 혹시 이런 생각을 가지고 그 분에 대해서 목사님께서 어떤 생각을 안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가셨습니다.

정말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는 오해하려고 들면 한 없이 오해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해하려 들면 한없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완벽한 삶이 아닙니다. ‘천의무봉’이라는 말을 아시죠? 천사의 옷은 꿰맨 자국이 없다는 뜻입니다. 천사의 옷은 꿰맨 자국이 없습니다. 완벽하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천의무봉’한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삶의 상처들이 있고 삶의 고통과 아픔들이 있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제껏 꿋꿋이 살아온 것입니다.

저는 요즘 큰 나무에 대해서 많이 생각합니다. 큰 나무라는 것,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특별한 일 한 것이 없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 오래 있었더니 큰 나무 된 것입니다. 특별히 잘난 것도 없고 그냥 그 자리에 오래 있었더니 그냥 큰 나무된 것입니다. 큰 나무일수록 흠이 많습니다. 큰 나무면 늘어져서 가지가 부러지기도 하고 벼락 맞아서 한 부분 떨어져 나가기도 하고 벌레도 많이 파먹었고 흠집도 많고 사람들이 많이 와서 가지도 꺾고 이리저리 흠집 난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우뚝하니 있으니 큰 나무가 되고 많은 곳에 영향을 끼치는 이와 같은 큰 나무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천의무봉한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상처들을 품고 살아가고 우리의 삶의 역사를 이룰 때 마음을 지키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쓸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큰 믿음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숲이라는 것은 아름답죠. 자유롭게 숨쉴 수 있고 자연의 모습은 아름답죠. 저는 늘 생각하지만 자연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아무리 인간이 노력해서 애를 써도 아무리 아름답게 사진 찍어도 아무리 아름답게 그림을 그려도 자연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자연의 숲 속에 있는 것을 봅시다. 모두가 수려한 나무만은 아닙니다. 썩은 나무, 벌레 먹은 나무, 그리고 벼락 맞은 나무, 그리고 불탄 나무 그리고 꺾어진 나무, 모두 이러저러한 모든 것인 합해져서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고 그와 같은 것들이 우리들에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늘 완벽해서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내게 완벽을 추구하지 않을 진데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해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을 지킬 수 있고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침묵정진의 삶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지금은 그 건물이 새로운 건물로 지어져서 없어졌는데 그 도서관에 가면 늘 맨 구석에서 세 번째 자리에 개인적인 좌석이 있었습니다. 그 도서관에 늘 그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바로 그 위에 ‘침묵정진’이라고 하는 ‘박윤선 박사님’이 써놓은 휘호가 있었습니다. 항상 그 자리에 앉아서 침묵정진한다. ‘침묵정진’,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는 침묵 속에 정진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벌써 내 일에 말이 많아지면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닙니다. 내가 벌써 정상이 아닌 혼란된 상태입니다. 답답한 만큼 침묵하셔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만큼 침묵하고 내 마음을 고요의 상태에 안치하면 마음에 평안의 소리가 들립니다. 힘들다고 소리 지르면 우리 안에 있는 사단의 사자는 더욱더 포효함으로 말미암아 더욱 다루기 힘들어집니다. 고요 속에 들리는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오늘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어요. 저는 우리 성도들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 여러분 한 시간 예배드리는 것 참 행복하고 축복받았다고 수없이 말씀드립니다. 정말 그래요. 우리가 숨쉬고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지금도 호흡하기 어려워 호흡기에 도움을 받아야 하고, 한 시간 앉아 있을 수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희 교회에 계신 집사님이신데 이분은 의사였습니다. 교회에 그렇게 열심히 다니시지는 않으셨어요. 이렇게 왔다갔다하시기도 했는데 여기 와서도 그러시기는 했는데 그래도 감사하게도 교회에 와서 목사를 상당히 좋아하셨어요. 저보다 연세가 많은 분인데요. 이분은 목사인 저에게 뭐라고 지칭하시는가 하면 ‘그 양반’ 이것이 목사의 대한 지칭이셨습니다. 굉장히 무뚝뚝한 분이셨습니다. 목사에 대해서도 이 양반, 그 양반 이렇게 얘기하셨습니다. 존칭으로 사용하시는 거겠죠. 안타깝게도 암에 걸리셨어요. 그런데 왜 그러셨는지는 모르는데 그 아픈데도 참으셨어요. 나중에 너무 아파서 가 보니까 이미 모든 것이 상태가 아주 나빠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을 정리하고 집에서 투병을 시작하셨습니다. 저한테 이렇게 얘기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요 앞에 산을 다녀오곤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 생각하면서 아, 이 양반이 늘 건강해야 하는데 이렇게 기도하곤 합니다.’ 하면서 목사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말씀하세요. 그래서 앞에 있는 산을 다녀왔다고 좋아하세요. 그 다음에 갔더니 ‘목사님 이제 제가 산은 못가고 아파트 앞에 단지를 걸었는데 아주 마음이 상쾌합니다.’ 그 다음에 갔더니 ‘제가 밖에는 못나가고 집에서 조금 어정어정 합니다.’ 그러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집에서도 다니지 못하고 누워계셨습니다. 목사가 가니까 일어는 나시더라고요. 그 다음에 갔을 때는 못 일어나더라고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앞에 있는 산을 갔다가 아파트 단지 걸으셨다가 집에서 좀 다니시다가 일어나시다가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계시다가 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치 촛불이 꺼져가는 듯한 느낌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살아있는 생명이 촛불처럼 조금씩 조금씩 꺼져가는 것을 눈으로 훤히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정말 촛불처럼 꺼져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또 한번 우리 성도님을 보았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있게 살던 분이셨습니다. 정말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아무리 자신있게 살고 인정을 받고 살아도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 어려운 지경이 되서 병원에 갔습니다. 그 분도 역시 그렇게 열심히 다니던 분은 아니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병상에서 세례를 드렸습니다. 교회 여러 번 오셔도 끝까지 세례를 안 받으셨어요. 그런데 제가 세례를 드리고 며칠 있다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사정이 어려우시니까 목사가 이렇게 찾아뵙잖아요. 그런데 몇 번 찾아뵙는데 하루는 가니까 ‘목사님 오늘은 제가 좀 기도를 하겠습니다.’ 그러시는 것입니다. 본인이 기도하시겠다고 하셔서 그러시라고 했더니 종이를 꺼내시더라고요. 종이에다가 또박또박 기도문을 적어놓으셨던 것입니다. 본인이 그것을 또박또박 읽는데 거기에는 모든 인사를 다 차렸더라고요. 교회에 감사하고 성도들에게 감사하고 기도해주시니 감사하고 또 목사님 특별히 기도해주셨으니 감사하고 그런데 그것을 끝까지 읽을 수 있겠습니까? 그냥 읽다가 울다가 결국 그것을 마쳤어요. 본인이 기도하고 싶은 거예요. 저는 그분의 심령에 주의 은혜가 임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세상을 떠나셨어요. 저도 그 모습을 보면서 정말 마치 겨울에 잔설이 남아 있다가 봄이 되면서 스르르 녹아지지 않습니까? 그 잔설이 녹는 것처럼 우리 삶이 이렇게 녹아져 가는 것 같아요.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게 호흡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것인가. 제가 늘 그런 말씀드리잖아요. 아파도 걸어 다닐 수 있으면 감사하다 약 먹고 그래도 다닐 수 있을 정도 되면 그래도 괜찮다. 그래도 참을 수 있을 정도면 괜찮다, 우리의 삶을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신다는 것은 완벽한 모든 것이 갖춰져야만 축복은 아닙니다. 지낼 수 있으면 감사할 수 있으면 기뻐할 수 있으면 편안하게 호흡할 수 있을 정도면 우리는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때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기쁨과 은혜를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주의 성도라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지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속에 건강도 지키고 우리 마음의 기쁨도 지키고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성도들이 돼야 됩니다. 주를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주의 은혜와 은총이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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