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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사랑의 실체 (막 12: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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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도의 사랑의 행위는 하나님의 백성의 선택 사항이 아닌 의무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기 원합니다. 인간의 삶에서 “사랑”이 공급해 주는 과거의 추억과 현재의 기쁨과 미래의 소망이 없다면 인간은 세상에서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러한 삶의 능력을 공급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구조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사랑의 겉모습은 다양하게 변할지라도 그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구조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그 효과와 영향도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증상들이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모두 평강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의 동경과 갈망으로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사랑의 애착과 집착으로 정신적인 질병을 얻기도 합니다. 각종 사건과 사고로 사랑하는 대상을 잃거나 사랑이 변질되어 갈등과 괴로움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사랑에 울고, 웃습니다. 사랑 때문에 행복해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감성적인 사랑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랑의 안목으로 성경의 사랑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오해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의 속성에 대한 오해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계명을 인간의 감성적인 사랑의 속성처럼 오해합니다. 성도의 사랑의 실체는 감성적인 것이 아닙니다. 행동화된 행위입니다.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적입니다. 사랑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순종해야 할 의무사항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특성은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큰 줄기의 흐름입니다. 막 12:28-34는 그 사랑의 실체적 흐름을 알려줍니다.

본문의 정황을 보면,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라고 답변하십니다. 첫째 계명은 구약의 신 6:4-5의 말씀이며 둘째 계명은 구약의 레 19:18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들은 서기관은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라고 반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의 반응이 지혜 있는 대답이라고 칭찬하시며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라고 격려하셨습니다. 큰 계명인 사랑의 실체의 이해가 정확하다는 칭찬입니다.

예수님의 답변과 서기관의 반응이 일치하였습니다. 그 답변과 반응 중 제일 중요한 부분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째 계명과 이웃을 사랑하는 둘째 계명은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는 고백과 선언에 의해 주어지는 계명입니다. 즉 “사랑”은 “하나님은 유일한 주”라는 고백적인 사건에서 나오는 행위입니다. 예수님과 서기관은 하나님의 정체성 선언에서 나오는 “사랑”의 계명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째 계명도 “하나님은 유일한 주”라는 경험적 고백에 대한 반응 행위입니다.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둘째 계명도 “하나님은 유일한 주”라는 경험적 고백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요구하시는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역사 속에서 나타내 주신 하나님의 정체성 고백에 대한 순종과 의무의 행위입니다. 정서적인 반응을 주고받는 정적인 상태의 사랑은 그 순종과 의무 이행의 결과입니다.

2. 사랑의 실체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공동체 속에 들어가는 충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사랑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랑이 나타난 경험적 사건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서기관이 첫째 계명으로 동의한 “하나님 사랑”은 신 6:4-5의 인용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유지시켜 주는 “쉐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매일 규칙적으로 두 번씩 이 본문을 암송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성적인 사랑의 감정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체성 선언 앞에서 확인된 이스라엘의 정체성 확인의 응답입니다. “사랑”의 요구가 등장한 정황을 이해하면 그 실체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기관이 생각한 모든 계명의 중심은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출 19:4에서 그들에게 먼저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라고 서론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인도하신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친히 보고 목격하고 경험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신 후에 출 19:5-6에서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하신 백성들의 정체성을 선포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첫째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둘째 “제사장 나라”입니다. 셋째 “거룩한 백성”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은 그 정체성의 특성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계명의 요약인 “하나님 사랑”은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 확인의 행위입니다. 신 6:4-9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차세대 백성들에게 그 정체성 확인의 행위를 재차 확인시켜 주는 본문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까지도 “쉐마”라는 이름으로 계속 이어져 오는 정체성 확인의 말씀입니다.

쉐마의 첫 구절인 신 6:4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듣습니다. “독수리 날개 아래 보호하시며 구원해 주신 여호와는 단 하나이신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절대주권의 단 하나이신 하나님이시다.”라는 선언을 듣습니다. “유일신”의 선언을 듣습니다. 그동안 신이라고 들어왔던 모든 존재 위에 계신 한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을 듣습니다. 그들이 그분의 소유이며 나라이며 백성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신 6:5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의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유일하신 하나님 되심의 선언에 대한 신하의 반응입니다. 즉 그분의 보호와 인도하심 속에 구출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소유됨과 제사장 나라 됨과 백성 됨의 반응으로서 행하는 충성 행위입니다. 목숨 건 충성으로서 유일신 하나님의 소유와 나라와 백성의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충성의 행위가 사랑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쉐마를 마음에 새기고, 부지런히 가르치며, 아침저녁으로 강론하고 암기하며, 손목과 미간과 문설주에 기록하며 기억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충성인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공동체 속에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유일하신 주권자인 하나님의 신하로서의 목숨 건 충성인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개 아래에서 구원해 주신 그 은혜의 공동체 속에 들어갑니다. 즉 하나님 사랑에서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목숨 건 “충성 행위”입니다.

그리고 레 19:18을 인용한 둘째 큰 계명인 “이웃 사랑”은 절대 주권자에게 충성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동지애, 전우애입니다. 하나님의 “하나이신 여호와”이심의 정체성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분 하나님을 향해 충성하기 위해 취해야 하는 공동체 회원 사이에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가 “이웃 사랑”입니다. 즉 이웃 사랑은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한 공동체 속에서의 순종의 행위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신하의 충성 자체이며, 이웃 사랑은 그 충성을 위한 모든 순종의 행위입니다.

결국 모든 사랑은 하나님의 구원자 되심과 그분의 유일신 되심을 듣고 고백하며 믿음으로 반응하는 백성들이 그러한 백성의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해서 행하는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순종의 행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충성과 순종의 행위로서 사랑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과 서기관의 견해가 일치되었던 부분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경험적 고백에서 나온 서기관의 답변은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라는 칭찬을 듣기에 합당할 정도입니다.

3. 사랑의 실체는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의 정체성 유지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실체는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의 정체성유지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듣고 반응하는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충성과 순종으로 보여 드리는 정체성 유지의 행위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요구는 이러한 사랑의 정체성 유지 행위의 요구입니다. 제자들의 사랑의 요구들도 모두 이러한 사랑의 개념으로부터 출발된 요구들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는 공동체의 정체성 유지의 행위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요 13:34-35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는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고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그 구원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사랑으로 충성하며 순종할 때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의 정체성이 유지됩니다.

요일 4:11은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하십니다. 요일 4:21은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째 큰 계명”을 지키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는 둘째 큰 계명”도 지키게 됩니다. 둘 다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 불러 주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순종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랑이 하나의 사랑으로 함께갑니다.

성경에서 “사랑”은 마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에 사랑의 감정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사랑이 감정의 문제에 불과한 정서적인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온전한 사랑일 수 없습니다. 우리를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하는 것이 그 정서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원한다고 해도 그 사랑을 줄 수 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사랑의 감정이 없는 한 하나님의 명령인 그 사랑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보다 우리의 감정이 더 앞서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은 정서적인 마음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을 향한 행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고, 하나님의 유일하신 하나님 되심을 믿고 고백하는 믿음을 지닌 성도라면 반드시 나타낼 수밖에 없는 충성과 순종의 행위가 사랑입니다. 자신을 구원하여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친히 바라보며 경험한 성도들은 그 경험적 고백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충성을 나타냅니다. 그 충성을 위해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하는 순종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절대 왕권, 절대 주권, 절대자 되심을 듣는 피조물 된 신하가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영역을 보존하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충성이라는 하나님 사랑의 행위입니다. 백성들 사이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웃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항상 쉐마를 암송하고 낭송하며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공동체 속에 들어가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날마다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사랑의 실체는 마음의 감동과 감성적인 이해로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로 부름 받고,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부름 받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이 그러한 부르심으로 불러 주신 하나님의 유일하심과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듣고, 반응할 때 나타나는 행위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사랑의 마음”을 품으라고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또한 시몬 베드로의 고백을 듣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도마의 고백도 듣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이러한 쉐마를 듣는 우리들은 그 경험적 고백의 공동체 속에 들어가는 충성의 행위로서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 순종의 행위로서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 명령은 천국백성이 짊어지고 가야 할 멍애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멍애를 매고 유일하신 하나님의 주권 밑에 들어오는 자들을 그의 소유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누리는 모든 행복과 평강의 삶을 약속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군주에 대한 충성 행위의 성격으로서의 하나님 사랑과 그 충성을 위한 공동체의 지체 사이의 순종 행위로서의 이웃 사랑을 우리의 어깨 위에 얹으셨습니다. (김종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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