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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조건? (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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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몇 달 전 남산교회 장로님이셨고 달서구청장이셨던 황대현 장로님께서 별세하셨습니다. 노회 임원들과 함께 문상을 갔는데 동산병원 장례식장 전체를 세를 내어 4일장을 치른 것입니다. 장례식장 안과 밖에 진열된 조화들이 끝없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누가 보냈는지 리본의 문구를 다 읽지도 못할 정도입니다. 그 넓은 장례식장에 손님들로 가득찼습니다. 지역 국회의원, 대구시장, 고위 공무원, 시의회의장, 평소에 그를 존경하며 따르던 후배들, 클럽 회원들, 경제계, 문화계, 교육계 등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 조문을 왔습니다. 옛말에 “정승이 죽으면 조문객이 없지만,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故 황장로님의 장례식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두 달 뒤에 고인의 장남이 결혼을 하였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결혼식장에는 어처구니없이 축하객이 적었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정치인도, 지인들도, 각계각층의 지도자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승이 죽으면 조문객이 없지만, 정승집 개가 죽으면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는 옛 말이 사실임이 입증된 셈입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임이 여실히 드러난 것입니다. 내 이름을 드러내는 자리,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자리, 소문난 자리에는 기를 쓰고 참석하려고 합니다. 직장인들은 벌써 송년회로 바쁜 시기입니다. 올해 송년회에도 이리 저리 다니며 눈도장 찍기에 바쁜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2. 선거철만 되면 야당에서 여당으로, 여당에서 야당으로 옮겨다니는 정치인들을 철새 청치인이라고 비난하지만, 평범한 우리도 이해관계에 따라 이러 저리 옮겨다니지 않습니까?
우리사회는 힘센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움켜쥐고, 힘없는 사람은 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정글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사회입니다. 강자에게는 사람들이 몰리고 약자는 늘 외롭고 쓸쓸하기만 한 우리 사회가 아닙니까? 이 사회에 몸담고 살아가는 우리도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힘없는 사람보다 유능한 사람, 힘있는 사람, 가진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회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영광 가운데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님으로 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들 모으시고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예수님의 보좌 오른편과 왼편에 있을 사람으로 구분하십니다. 오른편에 있는 양같은 사람들은 영원한 복을 받을 사람들, 왼편에 있을 염소같은 사람들은 영원히 저주받을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양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꼭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감옥에 갇혔을 때” 그들이 어떻게 했는지 말씀합니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마시게 하였고, 영접하였고, 옷을 입혀주었고, 돌아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너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평가에 대하여 양편에 앉은 사람들의 반응은 꼭 같이 매우 놀랍니다.
오른편 사람들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그렇게 하였습니까?”
왼편 사람들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놀랍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는, 오른편과 왼편에 앉은 자들 모두 놀랍니다. 의외의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두 번 놀란다고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이 천국에 온 것이 정말 놀라운 일이고, 또 한 가지는 꼭 천국 올 줄 알았던 사람이 오지 못한 데 놀란다고 합니다.

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고 하십니다.
주님의 책망에 대하여 왼편 염소편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황당합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대한 적이 결코 없거든요. 예수님께서 주리셨거나, 목마르셨거나, 나그네되셨거나, 헐벗으셨거나,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본 적이 없거든요. 주님이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 처하신 것을 우리가 보았다면, 우리가 당연히 보살펴 드렸을 것입니다. 우리 아파트에 모셨을 것입니다. 내가 못 먹어도 주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주님은 당연히 우리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실 분 아닙니까? 주님은 우리 위하여 희생하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있는 힘을 다하여 지극 정성으로 섬기고 보살펴드릴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러신 적이 없지 않습니까? 참으로 억울합니다.

이렇게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충격적입니다.

왼편에 있는 사람들이 왜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했을까요?
‘내 코가 석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쓸 수 있나?’
‘나도 아직 아파트 하나 장만하지 못했는데, 다른 사람을 도울 겨를이 없어.’
‘내 갈 길이 먼데. 내 일도 많아 정신없는데, 누구를 도와준단 말인가.’
이 사람은 아주 분명한 사람입니다.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입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주님을 위해서라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을 무엇이 잘못 되었다고 책망하십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 한 것이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이들의 문제점은 이것입니다. 주님의 일과 세상의 일을 구분했습니다. 소위 교회안에서의 일과 교회 밖에서의 일을 구분한 것입니다. 교회 일에는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세속의 일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일도 주님의 일인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사랑에 조건을 달았습니다. “주님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교회의 일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기독교인인가? 교회 잘 나오는가? 안 믿는다면, 교회 나올 생각이 있는가?
같은 고향 사람인가? 같은 사상을 갖고 있는가?
이런 식으로 조건달린 사랑을 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참 사랑은 국경, 피부색, 이데올로기, 지역색, 종교를 뛰어넘습니다.

4. 국제구호개발단체인 월드비전의 긴급구호팀장으로 활동하시는 한비야씨가 쓴 책 <지구 밖으로 행군하라>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케냐의 이동병원에서 봉사하고 있는 케냐인 안과의사가 있습니다. 그를 만나려면 대통령도 며칠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유명한 의사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케냐의 깡촌에서 전염성 풍토병 환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만지며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한비야씨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유명한 의사이면서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런 험한 곳에서 일하고 있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과 재능을 돈 버는 데만 쓰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일이 내 가슴을 몹시 뛰게 하기 때문이에요.”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험한 시골 구석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풍토병 환자들을 보살피는 일, 그 일이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른편에 있는 영생의 복을 받을 사람들의 말을 다시 되새겨봅시다.
37-39절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그들은 주님의 그런 모습을 본 적도 없고, 그런 식으로 주님을 도운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들은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갇힌 사람, 소외된 사람들에게 무슨 조건을 달고 사랑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착한 사람이니까. 기독교인이니까. 예의 바르니까. 고마워할 줄 아니까. 도와주니 뭔가 달라지니까 사랑을 베풀어주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무슨 종교적 보상을 바라고 섬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언제 우리가 그렇게 했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한 적 없는데요. 봉사하고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게 참된 사랑이요 참 봉사입니다.

5.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서 중요한 것을 하나 발견합니다. 오른편과 왼편에 있는 사람들 모두 예수님을 “주여” 라고 부릅니다. 그들 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 또한 우리에게는 충격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오른편, 왼편으로 나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신앙의 진위를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은 바로, 삶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무조건 사랑을 베풀 줄 아느냐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제 성탄절을 얼마 앞두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성탄절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한 성탄절,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가는 성탄절이 되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번 성탄절에 우리 이웃의 지극히 작은 자들을 초청하여 함께 예배드림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들려줍시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드립시다.
한비야씨는 그의 책에서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으로 남아프리카에 있는 작은 나라 말라위에서 일한 경험을 실었습니다. 말라위의 어린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거기의 아이들은 한결같이 누더기 옷을 입고, 팔다리는 꼬챙이같이 가늘고, 갈비뼈가 다 보이는 몸통에 배만 수박처럼 잔뜩 부풀어 올라 있습니다. 배가 부풀어 오른 것은 많이 먹어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안 먹으면 먹고 싶은 게 많아서 헛배가 부푸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에게 식량이란, 칡처럼 생긴 나무뿌리, 독성이 강한 콩, 동물이나 먹는 야생 과일뿐입니다. 깨끗한 물조차 없습니다.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이십대 젊은 부부를 만났습니다. 일주일 전 첫째 아이를 잃었다고 합니다. 그 어린아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 남편이 담담하게 말합니다.
“며칠을 걸어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우리 아이는 병에 걸린 게 아니라 먹지 못해서 그런 거니까 집에 가서 잘 먹이면 낫는다고 했어요.”
백방으로 곡식을 구하러 다녔지만, 결국 야생과일만 먹다가 그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을 조금만 더 넓게 떠서 세계를 봅시다.
지금 세계에는 7초에 한 명의 어린아이가 영양부족이나 그와 비슷한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5명 중 한 명의 어린이가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합니다.
4명 중 한 명의 어린이와 그 가족이 하루 1,000원의 수입으로 살아갑니다.
12명 중 한 명의 어린이가 채 5세도 되기 전에 간단한 질병으로 죽어갑니다.
지극히 작은 자, 이 아이들을 돌볼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오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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