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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을 사랑합시다 (시 11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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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19:140) 주의 말씀이 심히 정미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라 합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샤를마뉴 대제(742-814)의 무덤은 대왕의 실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까지 세 번(1001년, 1165년, 1215년)에 걸쳐 그 무덤을 공개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시체는 제복을 입은 채 대리석 석판에 놓여 있었다합니다. 그리고 한 손에는 왕의 홀이 들려 있고, 다른 한 손은 무릎 위에 놓인 신약 막 8:38을 가리키고 있다합니다. '누구든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이 구절은 그가 세상에 있을 때 가장 두려워하던 말씀이라고 전해집니다.

우리는 말씀을 어떻게 대하며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시 19:10)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고 합니다. 꿀송이(honeycomb)에서 뚝뚝 떨어지는 꿀보다도 더 달다는 뜻입니다. 진짜 벌집에서 딴 꿀이 송이 꿀입니다. 그 꿀이 얼마나 달고 맛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보다 더 달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편 119:103).”라고 했습니다. 성서(성경)주일을 맞아 말씀을 사랑하는 신앙을 다시 한 번 회복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과 영생의 도리를 가르치는 말씀을 사랑합시다.

(시 119:41)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 합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에 했습니다. 

성경이 쓰여진 목적을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합니다.

  김진규 목사는 기독교 방송을 '새롭게 하소서'를 통해서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17년 동안이나 불교에서 스님 생활을 하다가 목사가 된 분입니다.  그 분은 원래, 경북 영양군 일월사 주지의 아들이었는데 스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시주를 받기 위해 길을 걸어 나온 적이 있었답니다.  이 집 저 집 가정방문을 하던 중, 어느 집에 들어갔더니, 한 청년이 책을 한 권 가지고 나오면서, 내가 당신에게 줄 것은 이것 밖에 없으니, 하나님 말씀을 읽고, 예수나 믿으세요. 말하더랍니다. 마음속으로 당신이나 평생 예수 믿고 사시오. 라고 중얼거리며, 그 집을 나왔는데, 손에 들려 준 성경책을 내버릴까 하다가, 갑자기 호기심이 생기더랍니다. 그래서 절로 돌아오자마자 그 성경책을 들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단숨에 읽기를 시작해, 다섯 번이나 성경을 읽고 나니, 불경의 가르침과 성경은 전혀 다른 교훈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죄를 지으면 지은 만큼 댓가를 지불해야 속죄를 받는다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예수를 믿는 자마다 무조건 사함 받는다는 속죄의 가르침이 달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영생하시사 하늘나라에 계시다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죽은 석가가 부활했다는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불교는 모든 속세를 떠나 홀로 득도해야 부처가 된다고 가르치는데 반해, 기독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직접 이 세상에 와서 사람들을 만나 주셨는데, 그 중에서도 소외된 민중과 죄인들을 직접 찾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율법적인 종교로 고행과 수도생활을 통해 생로병사 108 번뇌를 극복해야 해탈에 이른다고 가르치는 데 비해, 기독교는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집까지 거저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목사가 되어 가는 곳마다 불교의 허위성을 증언하는 강력한 집회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가끔 극렬 불교도들이 집회 현장에까지 나타나 소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러한 구원의 말씀을 사랑하는 모두가 됩시다.

  바울과 실라를 붙잡은 관원들의 상관들은 두 전도자를 매를 때리게 하고 그들을 넘겨주어 밤새 가두어 지키게 했습니다. 나무 차꼬에 채워져 꼼짝할 수 없는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 기도와 찬송을 했습니다. 그때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벽이 흔들리고 죄수들을 묶고 있던 줄이 다 풀리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잠이 깬 간수는 급히 달려왔으나 바깥쪽에서 캄캄한 옥만을 보았기 때문에 아무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죄수들이 다 도망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가 칼에 엎드러져 자결하려는 순간 급히 소리쳐 멈추게 했습니다. 그때 그는 (행 16: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행 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행 16: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 구원아 말씀을 사랑합시다.

인간의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한 개인뿐 아니라, 민족을 구원하는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모르고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합니다. 그리고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합니다. 예수님을 가르쳐 주는 성경이 없는 사회는 참된 진리가 없습니다. (요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하십니다. 진리가 없는 사회는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배와 같아서, 언제 암초에 부딪쳐 침몰할 모르는  불안한 항해의 연속입니다. 구원과 영생의 길을 알리는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합시다.

  모라비아 교회 선교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최초로 그린랜드에 파견되었을 때 그들은 그 곳 사람들에게 먼저 자연 종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단 한사람의 개종자를 얻는데 무려 17년이라는 세월이 걸릴 정도로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카야르낙이라는 매우 사악한 사내가 선교사의 움막에 들렀다가 우연히 선교사가 성경 읽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때 선교사가 읽고 있었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원주민은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으며, 죄인들은 그 분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희미하게나마 알게 되었고 그에 대해 자세히 듣기 위해 선교사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저에게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저도 구원받고 싶습니다." 뜻밖의 일에 선교사는 깜짝 놀랐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카야르낙과 그의 가족은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린랜드에서 구주께 드려진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선교사들은 죄인들에게 가장 먼저 설교해야 할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희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디럭스바이블-The Teacher-가장 먼저 전해야 할 말씀)

  어느 날 아침 9시경의 일이다. 오전 8시 50분발 기차가 역에 도착했습니다. 승객들은 대기실에서 나가 기차를 떠났고, 역장은 기차가 출발한 것을 확인하고 출입문을 다시 통제했습니다. 바로 그 때였습니다. 한 신사가 급히 달려왔습니다. 그는 역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기차를 타려고 25달러짜리 티켓을 샀는데 오늘 늦어서 그 기차를 놓쳐 버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역장이 그 신사의 말을 듣고 차분하게 대답했습니다. "자, 안심하시고 저 안에 들어 가셔서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신사는 역장의 친절한 말을 듣고 역 안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방안에는 큰 책상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수많은 전도책자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 책들은 매우 정돈이 잘되어 있었고 사람의 눈길을 끌만큼 훌륭했습니다. 신사는 자리에 앉아 그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역장이 플랫폼에 서 있었습니다. 기차가 도착하자 한 신사가 내리더니 역장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역장님,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아, 물론 기억합니다. 당신은 전에 기차를 놓쳐서 곤란을 겪었던 분이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그 때 저는 기차를 놓쳐 당신의 도움을 청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날 아침에 나는 기차를 놓친 대신 나의 구세주를 발견했습니다. 그 전까지 나는 하나님을 생각할 만한 시간 없이 사업으로 눈코 뜰 새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나는 당신의 방에서 그 분에 관한 책을 읽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모두가 됩시다

  의로운 규례 되는 말씀을 사랑합시다.

(시 119:62)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

한 농부의 집에 송아지가 두 마리가 있었는데... 점점 송아지가 자라면서 힘이 세지니까 주인이 이제 송아지의 코에 코뚜레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두 송아지를 불러다가 코에 시뻘건 쇠로 코를 뚫습니다. 그러자 형님송아지는 아무 말 없이 코뚜레를 했는데. 동생송아지는 다급해졌습니다. 주인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주인님~ 주인님 저는 그런 것 안 해도 열심히 주인님의 말에 순종하며 형보다 일을 곱으로 하겠습니다. 통사정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동생송아지의 간절한 간청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정말 동생송아지는 형 님 송아지보다 더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두 달 지나니까 꾀가 생기고 머리에 뿔도 나기 시작하자 걸핏하면 주인을 뒷발질하고 뿔로 받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형님소가 밭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저녁에 돌아오니까 동생소가 안보였습니다. 궁금해서 주인께 여쭈어보았습니다. 주인님 동생이 어디를 갔습니까? 어디가긴 어디가 ~ 하도 말을 안 들어서 도살장으로 보냈지!(정채봉씨의 생각하는 동화- 코뚜레)

코뚜레가 처음엔 그것이 나를 잡아 죽이는 듯 한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것 때문에 안전하게 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들으면서 자꾸 제어하고 내 하고 싶은 것을 막는 것 같지만 결국은 말씀이 살려줍니다.

  캐나다에 있는 나이아가라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10미터 앞까지는 물결의 흐름이 일정하게 내려오다가 십 미터를 지나면서부터는 갑자기 급류를 이루어 폭포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때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폭포가 있는 것도 모르는 채 배를 타다가 계속 잔잔하리라 믿고는 끝없이 가며 폭포 속으로 말려 들어가는 사고가 과거에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나이아가라 폭포 위를 지나다 내려다보니까 배 한 척이 급류를 향해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10미터만 가면 죽으니 그만 돌아가시오" 하여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배 위에 탄 사람들은 잔잔한 물결 위에서 잘 가고 있었는데 거짓말 그만하라고 하면서 계속 가다가 폭포 속으로 휘말려 영영 살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죄로 인하여 한 걸음씩 죽음을 향해 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길이 아니니 돌이키라고 가르치는 규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사랑하는 모두가 됩시다.

  남아메리카 서부의 밀림에 사는 피로 인디언 부족의 추장인 모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내가 잘못된 것을 할 때 내가 아내에게 "여보,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 이렇게 말씀하고 있소."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가요?"라고 말합니다. 아내는 성경을 건네 받고 혼자서 그 말씀을 읽고, 그 다음에는 더 이상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할 때면, 아내가 내게 부드럽고 온유하게 말합니다. "여보,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는지요?" 그러면 이번에는 내가 그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는 그것을 하지 않습니다.

  전 세계의 모든 신자가 이 모란 부부처럼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헌신되어 있다면, 교회는 부흥할 것이며, 신자들의 삶은 거룩케 될 것이며, 세계가 복음화 될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을 바르게 하는 규례이니 이 말씀을 사랑합시다.

  콩고에서 일하는 선교사가 성경 없이 단지 듣기만 하는 콩고 교인들의 성경 지식을 검사해 보다가 몇 가지 놀랄 만한 사실들을 발견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야이로의 딸 이름을 삭개오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린 병자는 열대마마를 앓았다고 하였습니다. 또 바디매오는 한 눈이 먼데다가 학질을 앓고 문둥병에 걸렸다고 하는가 하면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가져올 것을 잊었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아기 예수를 성전에 바쳤을 때보고 기뻐한 이는 다윗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디럭바이블)

성경을 보지 않고 남에게 들은 것만 가지고 가르치며 일주일에 한 번 주일학교에서만 성경 말씀을 듣는다면 그같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경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것으로 족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규례입니다. 할 수 있는 한 정확하게 전달되고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이 규례의 말씀을 사랑합시다.

  정미한 말씀을 사랑합시다

“정미(精美)”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정교(精巧)하고 아름답다” 혹은”깨끗하고 아름답다”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말을 “순수(pure)”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정미(체루파)는 용광로에 있는 금속과 관련된 용어로 ‘제련된’ ‘정제된’ 등을 뜻합니다.  마치 잘 제련(製鍊)된 금이나 은처럼 불순물이 섞이지 않고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은 찌끼와 불순물이 다 제거된 값비싼 금속과도 같이 순수하고 진실하다는 말입니다. 시인은 말씀이 너무도 순결하고 진실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 약속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주의 말씀에는 전혀 위선적이거나 사람을 속이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보석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보석을 좋아하는 것처럼 이 세상 어느 보석보다 더 맑고 깨끗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실합니다. 그 말씀은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 말씀을 사랑합시다.

말씀은 정직하고 순결합니다. (시 19: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합니다.

말씀은 정직하고 선하여 그 도로 교훈합니다. (시 25:8)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 합니다.

그래서 말씀은 죄인을 정미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편 51:1-7).합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 했을 때, 마음이 한없이 죄로 인해 혼탁했을 때 정미한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죄악을 말갛게 씻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온갖 사리사욕으로 눈이 어두워졌을 때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면 말씀이 눈을 밝게 해 줍니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치는 글자가 무슨 글자가 “J” 자로 아이가 자라면서 처음으로 배우는 글자가 J자입니다. J자는 “지하드(Jihad)”의 첫 글자로 바로 성전(聖戰)을 가리키는 J자입니다. “너는 커서 이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지하드 용사가 되어야 한다.” “성전에 나가는 것은 알라신이 너에게 부여한 신성한 의무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하드에 나가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는 것 아닙니까? 참 무섭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여호와(Jehovah)도 J자로 시작합니다. 정미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배우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우리도 하나님 말씀부터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이 말씀이 자녀를, 가정을 즐겁게 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된 말씀을 배워서 세상을 파멸로 몰아넣고 있는데, 심히 정미한 하나님의 말씀을 t사랑하며 배워서 세상을 구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147-148절).” 라신 말씀대로 이른 새벽에 일어나 정미한 하나님의 말씀부터 듣고 배우며 하루를 시작하며 말씀을 사랑하는 모두가 됩시다. 구원의 말씀 규례인 말씀 정미한 말씀을 사랑하는 모두가 됩시다, (강성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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