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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전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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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성탄을 기다리는 성도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평강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교회 들어오시면서 뒤편의 방송실 유리에 부착된 커다란 플랜카드를 보셨는지요?
이렇게 맨 위에 써 있습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 :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라는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많이 해왔던 것이 아닌지요?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살까? 어떻게 하면 잘 살까? 행복하게 살까? 멋지게 살까? 등등...
그런데 정작 중요한 질문은 ‘왜?’입니다.
왜 살까?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적어도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인식을 하고 살아가려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자신에게 물었을 질문일 것입니다. 자신의 전 인격적 삶을 다해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몸부림 쳐 보지 못했다면 인생 또 하나의 불행이라면 불행일 수 있겠죠.

‘왜?’라는 질문은 목적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삶의 이유와 목적에 대해 자주 밝히셨습니다.

(요 12:47)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요 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사람은 ‘왜?’라는 질문을 하면서 인생을 알아가고, 또 성숙해집니다.
아이들 키울 때 다들 경험하셨죠? 한참 말 배울 때에 아이들 데리고 다니다보면 아주 귀찮을 정도로 물어보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왜?’라는 질문입니다.

저도 아이들 키울 때에 빛이 물에 반사되는 걸 보면, ‘아빠, 왜 물이 반짝거려요?’
햇빛이 건물 유리에 반사되는 걸 봐도, ‘아빠, 왜 그래요?’
다리 떠는 걸 못하게 막아도 ‘왜 하면 안돼요?’ ...
‘아빠 우리 식구는 왜 넷이예요?’
‘아빠, 왜 해가 우리 차를 계속 따라와요?’ 등등...

이런 질문은 사춘기가 되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바뀌어 갑니다.
‘학교는 왜 다녀야 하지?’
‘우리 부모님은 왜 나를 이해하지 않지?’
‘대학은 왜 가야 하는거야?’ 등등...

그런데 문제는 더 성장하고 삶의 분주한 소용돌이로 자신을 내 던지면서 이젠 더 이상 그런 ‘왜?’라는 질문이 사라져 간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왜?’라는 질문을 한다는 것은 나약한 사람이나, 의지력이 약한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우리 나라의 경우엔 군대식 문화가 깊이 배어 있어서 ‘왜?’라는 질문 자체가 불순하게 여겨지기도 하죠.

하지만 우리가 열심히 달리다가도 가끔은 길을 멈추고 던져보아야 할 질문은 바로, ‘왜?’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의 길을 걷고 있는 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내가 목회하는가?’, ‘왜 나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는가?’에 대해 자주 점검해 보지 않으면 금방 궤도를 벗어나 목표지상주의에, 실적지상주의에, 성장지상주의에 빠져 버리는 나를 발견하곤 합니다. 목사님들 사이에 자조적인 뉘앙스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꿩 잡는게 매지...’라는 말입니다. 교인 늘리고, 교회 성장하고, 사람 많이 모이면 다지 뭐... 이런 위험한 생각이 가끔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도록 부추기기도 하고, 때론 양심을 마비시키는 경우도 왕왕 생깁니다.
그럴 때마다, ‘교회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을 제 스스로에게 던져 보면서 방향을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 칠 때도 있습니다.

파리에서 죄수 한사람이 여자로 분장하고 탈옥을 했습니다. 목소리도, 몸짓도, 옷차림도 영락없이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도시 중심가에서 아주 쉽게 체포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패션 의상이 걸려있는 양장점 앞을 이 사람이 그냥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여자라면 그냥 지나갈 리가 있겠습니까?
이와 비슷한 얘기가 한국에서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정신병원에서 환자 한 분이 무단 탈출을 했습니다. 이 환자는 평소에 자기가 남자인데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유달리 옷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을 하다가 아마도 명동에 갔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고 가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패션 가게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그를 쉽게 찾았다고 합니다.
이 두개의 에피소드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인식하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죄수는 여장을 하기는 했지만 자기가 여성이라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남성처럼 행동하고 만 것이고, 반대로 정신병원의 환자는 남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여성이라는 여성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여성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그만큼 내가 누구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느냐 하는 자기 정체성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 내가 어떤 태도를 갖고 삶을 사느냐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자기 정체감 혹은 자기 정체인식(Sense of Identity)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바울이 쓴 모든 서신서의 첫 구절을 훑어 봤더니 큰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거의 모든 서신서 첫 구절에 자신의 목적과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한 선언을 한 것입니다.
빨리 한번 훑어 보실까요? 읽고, 들으시면서 한번 바울의 삶의 목적에 대한 자신의 선언에 중점을 두고 보시기 바랍니다.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고전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고후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갈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엡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빌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
(골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딤전 1: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딤후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딛 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몬 1: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이 서두를 한번 요약해서 정리해 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①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이다.
② 내가 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의 뜻으로 되었다.
③ 내가 종이 된 이유는 예수님의 명령인 복음전파의 사명을 위함이다.

이것을 한마디 말로 또 압축 시킨다면,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부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이 문장에서 바울의 정체성만 따로 떼어 말하면,
나는 부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렇다면, 바울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왜 만드셨는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그토록 많은 학문적 훈련을 받게 하셨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하셨는지?
왜 내가 바리새인으로 훈련받게 되었는지?
왜 내가 로마의 시민권을 받고, 헬라어를 구사할 수 있었는지...
왜 다메섹에서 내게 나타나셔서 나를 강제로 넘어뜨리셨는지...

바울, 그는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그의 온 생을 걸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결정하고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행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의 선언대로 그는 정말 멋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정말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딤후 4:7-8) 『[7]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8]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월계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만이 아니라 주께서 나타나실 것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아! 저에게도 이런 고백으로 마무리 되는 삶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서 남기셨던 마지막 말씀을 나도 할 수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돌아 가시면서, “다 이루었다.”란 말을 남기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다 완수하셨다는 선언입니다. 정말 부럽기 그지 없습니다.
왜 예수님의 생애가 다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그 답을 다음의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 6:38-39) 『[38] 그것은, 내가 내 뜻을 이루려고 해서가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벌써 지지난 달의 찬양이 되었네요.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란 찬양 기억하시죠? 그 찬양이 오늘 성경 말씀에는 딱 맞는 찬양이 될 것입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 서지 않겠네.

그렇습니다. 목적이 있는 삶은 뒤돌아 보지 않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요한1서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을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요일 2:17)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한국 말로는 영원히 남는다고 했는데 영원히 “남는다.”를 헬라어에서는 “메노”를 썼는데 이것은 혼자 어디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거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이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해 주신다고 하는 약속이 바로 이 말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 혼자서 거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거한다는 말을 헬라어에서는 해주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기도, 기도 많이 말하는데 정말 주님 뜻대로 아버지 뜻대로 사는 사람들의 그 기도와, 내 뜻대로 사는 사람의 기도는 다릅니다.

(요 9:31)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바울이 말하는 자신의 정체성은 ‘종’입니다.
종은 3대 부인이 따라야만 신실한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① ‘나는 주인이 아니다.’ 즉 무엇이든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말로서 주인의 뜻대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종의 입장입니다.
② ‘내 소유가 없다.’ 자신이 관리하는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 문제가 생깁니다. 실제로 알고 보면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소유에 대한 문제로부터 출발합니다.
③ ‘나는 권리가 없다.’ 나의 주인 되신 주님만이 마음대로 나를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세 가지의 부정이 없이 믿음 생활을 하면 혼란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내년을 바라보며 삶의 계획을 점검해 볼 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왔는지... 뒤돌아 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새로운 다짐을 하는 시간들이 있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정연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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