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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소경의 무지 (마 1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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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무식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형의 말을 잘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형제가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게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형제가 어떤 집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대문에 한글로<만사형통>이라고 써 붙인 글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 글을 읽고 서 있던 형이 동생에게 아는 척을 했습니다.“아우야! 만사형통이 무슨 뜻인지 아냐?”“몰라. 형은 알아?”하고 묻습니다. 동생의 그 말에 형이 자랑스럽게“알지. 잘 알아둬! 만사형통이란 모든 만사를 형을 통해서 해야만 한다는 뜻이야 알았지?”하니까 동생이 신기하다는 듯이 형을 쳐다보면서“와! 형 진짜 유식하다.”하더랍니다.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이것만큼은 내가 잘 낫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재물에 있어서 우월감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식에 있어서 월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명예만큼은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대인관계에 있어서 자신감일수도 있고,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용기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신감과 용기가 지나쳐서 교만이 되어버리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자신감은 어디까지나 자신감일 때 유익한 것이요, 용기는 언제나 용기일 때 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지나쳐서 하나님보다 앞설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살 때 모든 문제가 생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모든 문제의 앞에서의 해결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 진심으로 그를 믿고 의지할 때 모든 문제의 해결을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한계는 이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느냐 입니다. 문제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 문제해결의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참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매사에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 나와 있습니다. 왜 나왔습니까? 예배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러 나왔습니다. 한 시간 때우는 것도, 목사한테 얼굴 보이러 나온 것도 아닙니다. 이 자리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흠향하고 계심을 알아야 됩니다. 고로 기도할 때, 찬양할 때 형식적으로 하지 마십시오. 교회 나올 때도 형식적으로 나와서는 안 됩니다. 비록 세상에 살 때는 내 몸 하나 추스르기 힘들었지만, 참 불편한 일도 겪고 편치 못한 마음으로 지냈지만 이 시간만큼은 은밀한 중에 돌보시는 하나님을 봐야 합니다.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끔씩 저녁 예배 때 보면 예배시간 직전까지 자다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와서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온 모습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유감스러운 이야기이지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지만 모두가 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눈을 뜨고 있습니다만 그 눈에 각각 다른 것을 보고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앉아 있지만 무엇을 향해 마음을 열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게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비틀어지면 별의 별 소리를 다합니다.“내가 여태껏 교회 다니면서 얻은 게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교회 나가는 동안 한 시도 마음이 편안한 날이 없었다.”고 악 소리를 하며 떠나가는 겁니다. 그동안 무엇을 보며 누구를 만나며 신앙생활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두 나그네가 말을 타고 여행을 나섰습니다. 한 사람은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밤이 되자 들판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는 이튿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말채찍을 집는다는 것이 반쯤 얼어붙어 딱딱해진 뱀을 집어 들었습니다. 이걸 본 다른 사람은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뱀이요, 빨리 버리지 않으면 위험하오.”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말채찍이 너무 좋은 것이라 샘이 나서 하는 말로 여기고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여행이 계속 되었습니다. 낮이 되자 햇빛은 점점 강해졌고 이 사람의 손에 들린 뱀은 햇볕에 녹아 원기를 회복하였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보지 못함으로 그토록 자신이 믿고 자랑했던 채찍이라고 여긴 뱀에 물려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눈이 있다고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눈이 있어도 잘 안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시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안경을 쓰고 다닙니다. 안경 쓰는 사람들 안경 벗으면 잘 못 봅니다. 시력이 좋아서 안경 안 쓰는 분들은 정말 행복한 것입니다. 시력이란 이렇게 중요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소경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 보면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눈이 있으나 보이지 않아서 소경 된 사람도 있습니다만 다르게는 볼 수 있는 눈은 있으나 스스로 보지 못해서 소경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지난 이틀 동안 버스를 타고 교회에 출근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바보짓을 했는지 제 아내와 아이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버스를 너무 오랜만에 타다 보니까 실수를 했습니다. 집에서 나올 때 아내가 버스에 오르면서 카드를 꺼내어 요금 함 옆에다가 갖다대기만 하면 요금정산이 된다고 하기에 버스를 타면서 카드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다가 갖다대야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뒤에 사람들은 올라오고 해서 현금으로 계산을 하고 운전석 바로 뒤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하는 것을 유심히 살폈더니 어렵지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갈 때는 잘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저녁에 버스를 탔는데 너무 우스운 사람 될까봐 꽤 신경 썼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카드 사용은 잘 했는데 아뿔싸! 집에 가는 버스를 잘못 탔지 뭡니까? 중간에 내려서 할 수 없이 걸어갔습니다. 그 날 저녁에 날씨는 얼마나 춥든지 아주 고생했습니다. 집에 갔더니 제 아내와 아이들이 아주 배꼽을 잡고 웃습니다.“사람이 아무리 똑똑 한 척 하면 뭐하나, 버스도 탈 줄 모르는데...”아직도 놀립니다. 고로 사람이 눈이 있다고 다 보는 게 아닙니다. 또한 꼭 안 보여서만 못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볼 수 있는 눈은 가졌어도 스스로 보지 못해서 망하고 실패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똑 같습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하나님을 못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다니는데 그 인격에 하나님을 만나지를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안 보일 때는 안경을 쓰면 잘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시력이 없을 때는 영적안경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만날 수 있고, 말씀도 보이는 것입니다.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말씀을 보지 못하는 그 영적 시력을 회복하는 안경이 필요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잘 보면 이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가리켜서<소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눈을 감아 버린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눈이 어두워 안경을 써야 되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영적으로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깨달음이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가만히 보니까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듣고도 깨닫지 못합니다. 어떻게 보면 깨달을 수 있는 그 귀한 은사를 잃어버렸다는 게 옳습니다. 깨달음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인데 더는 이 믿음이 생기지 못하도록 마음이 꽉 닫혀 열리지를 않습니다. 속이 아주 비틀렸습니다. 듣는 것마다 비뚜로 듣고 오해만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십시오. 이들을 소경 되게 한 그 무엇이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이런 영적소경이 되게 한 것일까요?

먼저 그들은<착각>으로 인해서 소경이 됩니다. 시쳇말로“착각은 자유”입니다마는 이 착각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릅니다. 모르고도 아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정말 알기는 틀린 사람이라고 봐야 합니다. 아무것도 못하면서 모두 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진정으로 할 수 있기는 틀린 것입니다. 오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하고 율법을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전혀 아는 것도 없고 지킨 것도 없었습니다. 특히 율법을 잘 해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착각 때문에 깨달음도 얻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 바리새인들이 소경 된 것은<교만>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신만만했습니다. 안다는 것으로 교만하고, 의롭다 하는 것으로 교만하고, 거룩하다는 것으로 교만하고, 남보다 죄를 덜 지었다는 생각으로 교만했기 때문에 결국은 깨달을 기회가 없는 무지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릇된 지식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고 맙니다. 참된 지식은 배움이 더할수록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참된 지식은 배움이 더할수록 모르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교만하기 때문에 마음의 문이 닫혀있는 사람은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나아가 교만한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남들은 가르쳐야 되겠다고 덤벼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배우는 것이 먼저입니다.

여러분, 교육이란 내가 백 가지를 알아야 남에게 한 가지를 가르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물며 신앙이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언제나 깨달음이 먼저입니다. 왜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교만의 지수가 높아지는 걸까요? 아는 게 많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교회생활을 안다는 것이지요. 교회행정을 내가 잘 안다는 것이지요. 심지어는 교회법을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들이 자꾸 쌓여서 교만이 되고 이것 때문에 신앙에 대해서는 깨달음을 거부하는 영적 소경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장로님 중에 한 분이 늘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신앙생활 하면서 천국 가는 최상의 비결은 믿기 시작하면서 3년 내에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라고...아무것도 모르고 순수한 믿음의 열정과 모든 것이 새로워서 배움이 즐거울 때가 제일 좋고 3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아는 척 하는 교만 때문에 아름다운 천국은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도 모르면서 남은 가르치고 인도자가 되겠다, 선생이 되겠다고 하는 것처럼 큰 잘못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식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학식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신앙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믿음에 대한 깨달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양지바른 산중턱 큰 바윗돌 옆에 짐을 풀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다가 우연히 호랑이 꼬리를 발견했습니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호랑이가 큰 바윗돌 갈라진 틈에 앉아있는 것이었습니다. 도망가나 그대로 있으나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이 사람은 호랑이의 꼬리를 움켜쥐고 두 발을 바윗돌에 버티어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기고 있었습니다. 진땀을 흘리며 얼마동안 시간이 흘렀는데 그 길을 지나는 스님을 보고 반가와 하며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큰 돌을 집어 호랑이 머리를 쳐서 죽여 달라고 부탁을 하자 스님이 하는 말이“나는 불도를 닦는 사람인지라 살생을 할 수가 없소”하고는 그냥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생각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다시 스님을 불러서“내가 이 호랑이 꼬리를 놓으면 우린 둘 다 물려 죽을 텐데 그래도 괜찮겠냐?”고 물었습니다. 고민하던 스님이 반문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그러자 그 사람이 얼른 대답합니다.“내가 호랑이를 죽일 테니 스님이 이 꼬리를 잡고 있으면 우리 둘 다 살 수 있습니다.”그리고는 임무를 교대했습니다. 이 사람은 여유를 부리며 땀을 씻고는“스님의 말씀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감동되는바가 있어 이제부터 나도 불제자가 되어 살생을 금하겠나이다.”하면서 합장을 하고 유유히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잘 가르치고 잘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교인과 사귀어보니까 하나같이 못되었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형편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얼마나 불행입니까? 만나는 교인마다 전부 바리새인들만 만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 신앙생활 하기 참 어렵습니다. 소경을 만난 소경, 얼마나 불쌍합니까?
소경을 따라야하는 소경도 불쌍한 사람이요, 소경이 되어서 소경을 인도하겠다는 사람은 더욱 한심하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내가 눈을 떠야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막중한 책임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선 내가 눈을 뜨고 항상 새롭게 깨달음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고,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다른 사람을 더 밝은 빛을 인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철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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