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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2) (마 22: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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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설교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가진 것 없고 많이 배운 것 없고 그다지 지체가 높지 못하고, 약하고 병들어 겨자씨 같이 하찮은 존재일지라도 여전히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존재를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 삼으시고 그 이름만 불러도 즐거워하시고 기뻐 노래하신다 했습니다. 세상의 부모는 낳은 자식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곧 사랑은 하나입니다. 이웃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지난 주 설교에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객과 고아와 과부”로 불리우는 이른바 사회적 약자들에게 지대하신 관심과 사랑을 보이시고 우리에게 그 관심과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구약 성경 레위기 23장 22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 두라.”(레 23:22)
또 신명기 24장 1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신24:19) 

이상 두 군데 말씀을 오늘날 우리 생활에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한 달 수입이 100만원이라면, 그래서 십일조 10만원, 감사헌금, 주일헌금 등으로 10만원, 생활비로 60만원, 교육비로 20만원 등이 지출된다면, 그렇게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다 쓰지 말고 어려운 이웃에게 언제든지 사랑을 베풀 수 있도록 생활비를 줄이든 교육비를 줄이든지 해서 10만원 정도를 남겨 두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신다.”는 뜻입니다. 오늘부터라도 이렇게 삶으로 여러분의 하는 범사에 하나님의 주시는 복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객과 고아와 과부”는 사회적으로 내세우거나 의지할만한 것이 없는, 자기 권리마저 주장할 힘도 없는 약자들을 말합니다.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거나 무시당하거나 이유없이 학대당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을 율법으로 규정하여 약자들을 보호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처럼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들에 대해 관심과 사랑을 베풀 것을 율법을 통해 명령하시는 이유를 신명기 24장 18절에서 분명히 밝히시고 있습니다.

(신24:18)  너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 너희가 애굽에서 압제당하는 생활에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받은 것
을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경제적으로 압제당하고 있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너희도 은혜와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생활로 자신이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고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1917년 레닌이 러시아를 장악한 이후 오늘날까지 약 1세기동안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살륙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집대성한 <공산주의 흑서>라는 책이 있습니다.(프랑스 역사학자 11명이 공동 집필) 이 <흑서>는 레닌 이후 오늘까지 지구상에서 공산주의 때문에 희생된 사람을 1억명 가량으로 계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레닌에서 김정일까지> 이어지고 있는 범죄,  공포, 압제의 기록입니다. 이 책의 제4부 2장 북한편은 53년 이후 북한 땅에서 기근과 병 때문에 숨진 사람을 50만명으로 추산했습니다. 북한편을 집필한 리굴로 국장은 “오늘날 2천3백만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북한 땅에서 지난 50년 동안 공산 체제로 인해 희생된 사람(기근으로 인한  아사자 제외)은 대략 3백만명 이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노동당 숙청으로 숨진 사람이 10만, 강제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이 1백 50만, 공산주의자들이 의도하고 조직하고 촉발한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이 1백30만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뒤 “정규적이고 살상적인 군 작전”으로 숨지는 사람을 계속 보태야 한다고 리굴로 국장은 덧붙였습니다. 그는 근년에 빚어진 북한의 식량난에 주목, “양식 부족으로 인해 직,간접으로 희생된 사람은 수십만에 달할 것”이라고 계산했습니다. 이렇게 북한 주민들의 인권이 말살되어가고 있음에도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북한과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거냐?”며 생트집을 잡고, 국보법 폐지, 주한미군 철수, 연방제 통일 등으로 이어지는 친북, 반미 세력들은 북한 “사또 비위 맞추려 눈치만 살살 보는 꼬락서니”에 우리나라는 추운 겨울을 맞고 있습니다. 우리네 동족들이 주리를 틀고, 피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훤히 알고 있음에도 “인권”의 “인”자만 입 밖에 내면 반민족, 수구 꼴통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거나, 경제, 정치적으로 압제당하는 어려운 이웃들을 외면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이웃들을 외면하는 행위에 대해 죄 없다 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그냥 지나쳤거든 뒤 쫒아가 사랑을 베푸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정치 경제적으로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어려운 북한 동포들과 이웃들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2. 그러면 어려운 우리의 이웃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겠습니까? 먼저 로마서 12장 15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롬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한 마디로 어려운 이웃들과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40절 이하를 함께 보시겠습니다.

(요4:40-42)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민족의 정체성을 더럽힌 혼혈족이라며 개처럼 취급하여 상종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죄악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 집으로 초청하자 기꺼이 응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기절초풍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못 마땅해 하며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들 집에서 가셔서 이틀 밤낮을 함께 지내시면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일로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하므로 죄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보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 훨씬 더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높은 기질, 아주 고상한 마음을 필요로 한다. 특히 타인의 성공을 우리 자신의 것 같이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아가 죽었을 때만 가능하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의 넓은 사랑의 마음으로 채워지시기를 소원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 하나 소개합니다. 미국에 존스 홉킨스 대학이 있습니다. 이 유명한 대학의 한 젊은 교수가 대학생들을 통해서 연구조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도 가장 취약한 뉴욕의 빈민굴에 아주 열악한 환경에 사는 청소년 200명을 조사했습니다. 대부분이 아편을 하고 있었습니다. 폭력배가 난무하는 곳이며 창녀 소굴입니다. 거짓과 아편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그들은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금 여기서 자라고 있는 200명의 청소년 중 90%이상이 훗날 필시 범죄자가 될 것이고 이중 대다수가 형무소를 제집처럼 드나들 것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25년이 흐른 후에 대학원생을 보내어 200명을 추적해 보았습니다. 그 중에 180명을 찾아내어 만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4명만이 감옥에 간 일이 있고 나머지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 사회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예상이 너무나 빗나갔습니다. 교수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알아보았더니 저들 모두가 한 여자 전도사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십 년 전에 여전도사님은 스스로 빈민굴에 찾아와서 지금까지 그들과 동거동락을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녀는 수줍어하면서 “저는 아무 한 일이 없습니다. 그저 내 아들딸처럼 사랑하며 함께 살아 간 것밖에 없습니다.” 이 한 사람으로 인해서 전형적으로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버려졌던 사람들이 이렇게 예상을 깨고 대부분이 훌륭한 사람이 되어있습니다. 겨자씨 같이 하찮은 존재들이지만 그들과 함께 하는 사랑으로 그들을 변화시켜 구원했던 것입니다.

성경 고린도 전서 12장 26절 이하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6-27)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창세기2장 23절 말씀으로 번역하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네 이웃의 뼈가 아프면, 네 뼈가 아픈 것처럼 함께 아파하고, 네 이웃의 살이 아프면 네 살이 아픈 것처럼 함께 아파하라는 것입니다. 욥은 이유도 모른 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에 되어 길바닥에 나앉게 되고 게다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서 기와조각으로 고름을 긁어내는 너무나 처참한 고통과 환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 욥의 아내는 욥과 혼인 서약할 때,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젊을 때나 늙을 때나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서로 사랑할 것을 서약합니까?” “아멘” 해놓고 욥이 그 지경이 되고 나니까 “그래 이 지경이 되어도 교회에 나간다고?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며 저주를 퍼붓고 가출해버렸습니다. 그래도 욥은 그런 마누라를 원망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그리고 되어지는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했습니다. 결국 욥은 하나님께서 새로 주신 아내를 얻게 되고, 모든 일에 갑절로 축복을 받았고, 고통을 함께 하지 아니한 욥의 본처는 그 축복에 함께 하지 못하고 슬피 울며 이를 갊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구명정이나 던져주는 분이 아닙니다. 직접 그 물속에 뛰어들어 목숨 걸고 죽어가는 사람을 건져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바로 고통당하는 사람의 고통을 함께 하고, 기뻐하는 사람으로 더불어 함께 기뻐하시는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모두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으로 한 몸, 한 지체가 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예수 믿으십니까? 어려운 이웃을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 가운데 함께 울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어려운 이웃이 여러분에게 껄끄럽거나 원수 같은 사람일지라도 자기 몸처럼 사랑해만 합니다.
로마서 12장 19절 이하를 함께 보시겠습니다.
(롬12:19-21)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원수 같은 이웃일지라도 오히려 그를 사랑으로 섬기고 축복하는 것이 승리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리챠드 범브란트 목사가 수십 명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공산 치하의 루마니아의 감옥에 갇혀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어느 날 감옥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감옥 속으로 던져졌는데, 어두운 감방 속에 있던 기독교인들은 곧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챘습니다. 그는 바로 자기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며 기독교를 포기하라고 강요하던 공산당 비밀경찰 대위였습니다. 그가 왜 감옥에 들어왔는지 궁금해 하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얼마 전, 열 두 살 된 소년이 자기를 면회 왔다고 하여 사무실로 들여보내라 했습니다. 주눅 들고 수줍어하는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오는 소년의 품에는 아름다운 꽃다발이 한 아름 안겨 있었습니다. 소년은 곧 입을 열었습니다. “대위님, 우리 엄마와 아빠를 체포해 가신 분이 당신이지요. 오늘은 우리 엄마의 생일이에요. 나는 엄마의 생일 때마다 예쁜 꽃다발을 사서 선물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어요. 그런데 금년에는 부모님이 어디론가 체포되어 가셨기 때문에 이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꽃을 선물할 수 없게 되었어요.

어머니는 언제나 내게 가르쳐 주셨지요. 원수도 사랑하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고 말이에요. 내게는 지금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대신 이 꽃으로 대위님 아기들의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 가지고 왔어요. 이 꽃을 대위님 부인에게 전달해 주실 수 있겠어요?” 대위는 말없이 그 소년의 꽃다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소년을 끌어안고 눈물로 사과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그의 마음에는 양심의 가책과 회개가 왔고 남은 생을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결심하여 이렇게 끌려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원수일지라도 자신의 몸처럼, 자신의 가족처럼 사랑하라는 이유는 바로 그 원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삶에 항상 함께 하시어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 여러분의 하시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동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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