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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뜻대로 행하시는 하나님 (욘 1:1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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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발을 짚고 입장을 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건강한 모습으로 예배집례를 위해서 입장을 하면서 제 자신도 무척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여러분도 보기 좋으셨죠? 목발을 짚는 모습, 참 마음 아프고, 여러 가지 염려가 컸는데, 꼭 5주만에 건강을 회복하게 되어서 감사를 드리고, 그 동안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팔을 다쳐서 수술 하신 우리 강재규 집사님, 찬양대 보니까 오늘 나오셨습니다. 격려박수 한 번 하시지요. 병원에 더 입원해 계셔야 하는데, 우리 아들 딸들이 보고 싶어서 몸살이 나서 매일 밤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서 아빠 얼굴 봐야 한다고 그렇게 아이들이 아빠를 사모하고, 또 주일에 귀한 사역도 담당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가끔씩 느끼는 것인데, 성도들 중에 목회자보다 익은, 혹은 헌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 것을 느낄 때 목사로서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고, 도전을 받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사명을 주시지만, 우리가 그 자리에서 헌신할 때 가장 귀한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과 함께 ‘뜻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다보면 우리 개인의 삶의 여정 속에, 한 국가의 진로 속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섭리, 간섭이 분명히 계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인도하고, 역사하신다고 하는, 오늘 우리와 동행하신다고 하는 실제적인 신앙의 고백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에 오늘 우리의 말씀도 은혜가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서 4장에 보면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백성에게든지, 하나님께서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할 자가 없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주인공 다니엘은 실제로 그가 하나님을 순결하게 열정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주님을 섬기는 그런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영광을 돌리게 된 줄로 믿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르게 살고, 제대로 살면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이요, 영광이지만,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는 줄 믿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 하고 살면 말씀대로 세상사람들에게 밟히면서 살게 됩니다.

밟히며 살게 되는 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그럽니다. 저 사람은 집사지만 괜찮은 사람이야. 그것은 모든 집사들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저 사람은 목사지만 믿을만 해. 그것은 정말 견딜 수 없는 모욕이예요.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의 자녀 답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일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 자신들이 진정으로 내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세상으로 파송하신 삶의 자리에서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운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다니엘서는 바로 그 자신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과 당시 특별히 최고의 권력자 다리오왕에게도 ‘너의 하나님이 너를 지켰느냐?’

그는 사자굴에 들어가는 위험과 그리고 모함과 억울함을 겪었지만 그는 그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그 믿음을 신뢰했던 그의 사람됨을 신뢰했기 때문에 그가 가진 믿음까지도 신뢴하려 했던 왕조차도 너의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시기 바란다고 하는 소망을 가지고 새벽을 달려서 그를 찾아와서 너의 하나님이 너를 지켰느냐?라고 물어보았던 왕의 질문에 다니엘은 대답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 때 다니엘만 기쁨과 영광을 누린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던 사람들과 왕의 입에서 너의 하나님을 송축할 지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제대로 살면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13절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도 그런 말씀을 드린 기억이 납니다만 우리는 삶의 태도가, 그러나라고 하는 역접으로 시작하면 안되겠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동의하는, 동참하는 자세를 가지고 그러므로라고 나가야 하는데, 그러나하고 삐딱하게 나갑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주의 종이 하는 일에 삐딱하게 그러나라고 삐딱선을 타는 사람들이 있어요.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말로 테클을 거는 사람이 있어요. 그냥 그러므로하고 순종하면 좀 바보 같고, 좀 덜 떨어진 것 같고, 좀 수준이 떨어진 것 같고, 그러나라고 하면 좀 괜찮은 것 같고 그렇습니까?

죄송하지만 우리 신학교의 분위기도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정말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고, 오늘도 함께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런 고백을 하면 쟤는 학문적으로 떨어지는 애 같고, 좀 자유주의신학을 이야기하고, 해방신학을 이야기하고,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면 똑똑한 것 같은 한국신학대학교 안에도 있어요.

기도모임하고, 웨슬리전도모임하고 그러면 좀 질이 떨어지는 애들이 그러는 것 같고, 데모하고 나가서 으쌰으쌰하면 뭔가 의식이 있는 것 같고, 이 교회 신앙 안에도 있다는 말이예요.

교회에서 장로님들이 목사님에게 그러나 그러나 하면 똑똑한 장로님 같고, 그러므로 좀 바보 같고, 그래서 어떤 분들은 우리교회 장로님들은 목사님한테 항상 순종만 한다고 별로라고, 이런 기가 막힌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오늘 본문말씀을 보니까 그러나, 바로 12절까지 어떤 말씀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대풍을 주셨습니다. 풍랑이 일어난 것이 어려운 문제가 생긴 것이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목적을 가지고 큰 지중해의 순풍에 돛 단 듯이 나가는 그 요나의 앞길에 대풍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자기의 계획대로 해 보려고 이렇게 저렇게 계획을 하는데 척척 들어 맞잖아요.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하는데, 배도 있어요. 티켓도 있습니다. 좌석도 있습니다. 배도 파도 없이 촥 미끄러져갑니다. 자기가 계획한 것이 너무너무 잘 맞아 떨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럴 때 이렇게까지 이야기 하죠. 이게 하나님의 뜻이야. 하나님의 뜻이라는 건 자기 계획대로 잘 되면 하나님 뜻이고, 자기 계획대로 잘 안 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이런 이상한 공식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을 버리셔야 합니다. 그런 공식을 가지셨다면 오늘 이 시간에 다 내려놓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하나님의 뜻이지만 풍랑을 주실 때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광야의 길을 가게 하실 때도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우리로 하여금 광야의 길을 걷게하신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투표를 했습니다. 제비뽑기를 했더니 요나가 뽑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비뽑기란 말씀의 제목에서 우리가 고백했듯이 제비뽑기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줄 믿습니다. 사람이 이를 작정하지만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요나가 뽑혔습니다. 사람들이 요나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너를 해야 이 풍랑이 잔잔해 질지 말해라. 이제 더 이상 요나는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 풍랑은 나의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간 이유 때문에, 저 때문에 여러분들도 고통을 받은 것입니다. 제 책임입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어떻게 질 것이냐? 저를 바다에 던지세요. 목숨으로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최고로 책임을 지는 것이 뭐예요. 자기의 결백을 좀 밝혀야 되는데, 안 되면 사람이 죽음으로 결백을 밝히려고 그러지요?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은 그 방법도 옳지가 않아요. 생명이 누구에게 있어요? 주님께,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아무리 결백을 밝히기 위해서 목숨을 걸지만 목숨을 담보로 해서 그래서는 안 되지요.

결국 그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한 번 더 수고해보자. 그리고 그들은 노를 저어서 배를 육지에 대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정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나 인간의 방법으로 수고할 노를 젓는 일이 얼마나 고단할 일입니까? 풍랑을 만났을 때 노를 젓는 일이 얼마나 고단한 일입니까?

수고 했지요. 팔 다리가 알이 배기도록 수고했지요. 그러나 아무리 수고했어도 그 수고는 격려받을 수고가 아닙니다. 그런 수고를 뭐라고 그래요? 헛수고. 때때로 우리는 헛수고 할 때가 많아요.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말합니다. 사람들을 죽이고 대적하고 핍박하는 사울에게 내가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너 헛수고 하지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 네가 괜히 헛수고 하지 말라.

점점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흉흉함으로 그들이 능히 못한지라. 그들이 알고도 하나님의 뜻을 재껴놓고, 자기들의 방법으로 온갖 수고를 해 보았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 노력을 그들이 기울인 이유가 뭘까요? 나는 그들이 순수한 의미에서 그랬다고 생각을 합니다.

요나가 제비에 뽑히기는 했지만 어떻게 당신을 저 험한 바다에 던질 수 있을까? 동정심 때문에,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당신 때문에 우리 물질이 손해를 보고, 당신 때문에 육체적으로 큰 환란을 당했지만 그러나 당신을 저 바다에 던질 수 있느냐? 인간적인 동정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동기가, 인간적인 동정심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동정심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라면 죄인 줄로 믿습니다. 그럴 때는 동정심이 발동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또 한 편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 풍랑을 만난 이 배에 며칠동안 한 배를 타고 있었는데 의리라고 하는 감정이 생겼습니다. 그래도 산전수전 겪으면서 같이 고생하고, 같이 있었는데, 소위 한 배를 타고 우리가 살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저 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의리 때문에 교회 생활 안 하는 사람, 의리 때문에 충성하는 사람, 의리 때문에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적인 방법을 따르는 사람들, 정신 차려야 합니다. 동정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의리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버리는 사람들, 가끔씩 보면 부인이 잘 못 하는데, 남편이 따라가요.

남편이 잘 못하는데, 부인이 따라가요. 정신나간 사람들이잖아요. 무언가 잘 못 된거를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배우자가 되고, 파트너가 되어야 하는데, 그냥 의리 때문에, 동정심 때문에 그냥 따라가요.

군에 있으면 아주 이상한 의리가 생깁니다. 훈련소 가고, 부대에 가면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봐요. 경기도에서 왔는데요. 경기도야? 하면서 눈이 동그래져가지고 경기도 인구가 천만이 넘는데, 경기도 어디야? 부천입니다. 부천이야? 하면서 뭐 그냥 부천 인구가 85만이예요.

막 그리고 훈련해도 무슨 작업을 해도 챙겨주는 거예요. 야, 별꼴이다. 언제 봤다고 저러나. 좋으면서도 전혀 상관없는데 같은 부천사람이라고, 같은 경기도 사람이라고 그렇게 챙겨주는 거예요.

제가 부대 있을 때는 제일 고참이 전라도 사람들이었고, 그 중간이 경상도 사람이었고, 그 다음이 경기도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제일 고참들이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을 매일매일 팼어요. 그러니깐 이를 갈면서 이제 저것들만 제대하면 우리가 아주 어떻게 하나 봐라하면서 이를 갈아요. 그들이 제대하고 나니깐 그 다음에 경상도 사람이 고참이 되니까 또 두들겨 패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세계에서 같은 동향 사람이 제일 고참이 전라도 사람인데, 전라도 사람이면 내가 열외가 되는 거예요. 같은 전라도 사람이니까, 경상도 사람이 권세를 받으면 같은 경상도 사람이라고 보호해 주는 거예요.

저는 고향은 경상도 마산인데, 본적은 옮기잖아요. 부천으로 옮겼기 때문에 본적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부천이라고 이야기하지요. 부천이라고 사랑받고, 경상도라고 사랑받고, 전라도 사람들은 경상도를 미워하니까, 너 고향이 어디야? 부천이요. 그래서 피하고, 경상도 사람들이 권세를 잡으면 너 고향이 어디야? 마산인데요. 그래서 사랑받습니다. 참 옛날에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데, 그런 것 때문에 괜히 의리가 생겨서 보호해 주고, 더 미워하고, 이런 이상한 의리가 생깁니다. 세상집단도 그런 의리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런 의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일에 쓰여진다고 하면 그런 동정심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에 따라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은 정해졌는데, 사람들은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어떻게 우리의 의리로, 어떻게 요나를 흉흉한 바다에 던질 수 있겠느냐?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접어두고 인간적인 노력을 해 왔어요. 하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전도서 1장 3절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해 안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하나님을 제외한 인간의 수고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인간의 노력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결국 그들은 14절에서 새로운 결단을 내렸습니다. 14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이제야 비로소 자기들의 방법을 내려놓고, 인간적인 생각들을 내려놓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하나님의 뜻에 맡겨드리는 비로소 신앙고백적인 태도가 나와요.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저가 이루리라.

그것이 비로소 신앙적인 태도가 나온 거예요. 하나님 뜻대로 하세요. 우리가 우리의 방법대로 해 봤는데 안 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맡깁니다. 놀라운 것은 온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는 기도의 모습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그들은 모두 자기가 믿는 각각의 신을 향해서 어려움이 생겼을 때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믿는 그 신을 찾았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었던 그 신들은 환란 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엘리야가 갈멜선상에서 850명의 바알과 선지자들과 대항할 때에 오전이 지나도록 그들이 자기 몸에 칼로 피를 내면서 자기의 바알과 아세라를 불렀지만, 전혀 응답이 없었어요. 엘리야가 말합니다. 너희 바알과 아세라가 잠을 자나보다. 더 크게 외쳐라.

지금까지 세상사람들이 의지하던 그런 신들은 사실은 신이 아닙니다. 성경이 신이 아닌 것을 신처럼 여기고, 그것이 바로 우상아니겠습니까?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그 우상에게 우리의 모든 삶의 중요한 부분들을 빼앗기면서도 그것이 어리석은 삶인지도 모르고 살게됩니다.

지금 그들이 각각의 신을 부르며 간절히 구했지만 전혀 응답이 없었던 그들에게 이제 드디어 창조주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새로운 결단이 시작된 줄로 믿습니다. 합심하여 기도합니다. 부르짖어서 기도합니다. 간절함으로 기도합니다.

너희는 내게 나와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크고도 비밀한 일들을 너희에게 보여주시리라.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저는 평안의교회가 지난 22년동안 수많은 하나님의 응답과 역사가 있었지만 부르짖는 응답에 있어서는 잊지 못할 2가지 사건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김경원장로님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20년 전에 우리 김경원집사님이 허리디스크를 앓았는데 완전히 반신불수가 됐어요.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서울 메디컬센터에서 이제는 제가 박정자집사님보고, 이제 당신 남편은 반신불수가 됐습니다.

의사도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20년 전에 미국에서 100만원을 들여서 어떤 디스크에 맞는 주사를 맞을 수는 있는데, 하지만 가능성은 1%입니다. 의사가 1%라고 말하면 그것은 희망이 없는 거예요. 한 번 위로삼아 맞아 보는 건데, 20년 전에 100만원이면 지금 500만원, 1000만원 가치가 되는 큰 돈이잖아요. 그런 돈도 없었거니와 그 때 제가 심방하고 비가 억수로 오는 그날 주일예배를 마치고, 메디칼센터로 그 덜덜거리는 봉고차를 끌고 왔어요.

집사님, 이 병원도 포기하고, 제 마음에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집사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전도사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가족 중에서 할렐루야 기도원을 갔으면 좋겠다라고 해서 저는 사실 할렐루야 기도원이 좋지 않은, 정상적인 기도원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가족이 강권해서 갔어요.

입구에 비가 억수로 오는 날 가서 딱 서니까 우리 차를 막아요. 못 들어오게 해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하니까 이제 우리 기도원에 들어오려면 우리 안수하는 집사들이 있는데, 그 집사들이 안수해 보고 영이 통하면 받아주고, 안 통하면 안 받아준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평안의교회 전도사입니다. 그랬더니 전도사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기다리라고 하고 들어가더라구요. 그래서 김경원집사님 보고 어떻게 할거냐고 제 마음에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다행히 전도사님, 저도 같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하면 좋냐고 한얼산기도원으로 가십시다.

70,80년대에는 한얼산 기도원이 참 우리에게 은혜를 많이 주었어요. 환경은 열악하지만 참 은혜의 동산이었어요. 우리 추교철장로님, 김경원장로님도 처음 예수믿을 때 한얼산기도원으로 갔는데, 우리 추교철장로님은 가방이 없어가지고, 신혼 때 가지고 다니던 가방 있잖아요. 그 가방 가지고 한얼산기도원으로 올라가서 방언 받았어요.

한얼산 기도원에 가서 성전 제 뒷벽에다가 이불을 놓고, 이렇게 끌어다 놓았어요. 죄송한 표현이지만, 무슨 산 사람 같지 않아요. 그렇게 붙들고 기도하는데 제 마음에 그런 마음이 들어요. 우리 집사님이 걸어 내려가지 않는 한 나는 이 산에서 내려가지 않겠다. 그 분은 갈 수 없는거고, 그래서 둘이 작정을 했어요. 걸어가지 못하면, 일어나지 못하면 우리 내려가지 맙시다.

그 때는 개척교회 때니까 교인도 많지 않을 때고,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며칠이 지나고 나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밖에 나가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은 거예요. 한얼산기도원은 은혜의 동산이라 기도하는 동산에는 뱀이 없거든요. 그 산에서 중고등부시절부터 얼마나 골짜기 깊이깊이 들어가서 골짜기에서 개구리 울 듯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기도했어요.

그래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깊이는 못 들어가도 그 입구 초입에 바위에 겨우겨우 부축해서 그 몇 사람이 부축해서 앉혀놓고 2-3m 떨어진 바위에 앉아서 기도하려고 그러는데, 그 우리가 기도하려는 바위 틈에서 뱀이 나온 거예요.

제가 그 오래토록 기도원을 다녔어도 그 기도원에서 뱀을 본 사람이 없는데, 그 깊은 산도 아니고, 초입인데, 바로 그 곳에 뱀이 있었어요. 저는 뱀을 보면 일단 돌을 들어서 뱀을 수십번 짓이겼어요. 그 뱀을 던져버리고 나서 다시 마음을 정리하고, 집사님 다시 기도합시다. 하면서 기도하기로 하고 나도 자리를 정했는데, 눈을 감으니까 뱀이 오는거예요. 눈을 감으면 뱀이 자꾸 오는 것 같아서 손을 자꾸 눈 감고 쫓아내는 시늉을 하는 거예요.

그러다 생각하니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가. 다른 사람이 밖에 봤으면 대낮에 이상했을 거예요. 눈은 감았는데, 자꾸만 손을 휘젓고 있으니까, 뱀이 자꾸 올라오는 것 같아요. 아, 그 때 깨달았어요. 우리가 작정을 하고 큰 믿음으로 기도하려고 하니까 사탄 마귀도 크게 우리가 기도 못하도록 하는 거예요.

결국 이 것이 사단의 도전이라고 생각이 들고, 더 크게 더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그 주말에 김경원집사님, 지금 이 김경원장로님과 제가 걸어서 내려온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나서 20년동안 지금까지 70이 다 될 분이 전국을 다니면서 당신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오늘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줄로 믿습니다.

또 한 큰 간구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은 이형훈장로님의 딸 지연이, 안산에서 교통사고로 급보를 듣고 갔는데, 죽었어요. 다 죽었어요. 죄송하지만 얼굴모습을 보니까 얼굴은 다 깨지고, 완전히 다 죽었어요. 제 생각에 1%도 희망이 없어 보였어요.

그냥 시체실로 가야할 것 같아요. 근데 부모가 포기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 성도들이 차를 타고 안산에 가서 안산병원에 가서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그 주변에 모르는 교회에 쫓아가서 교회 들어가서 얼마나 눈물로 기도했는지, 저는 성도들이 기도하자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간절하게 중보기도를 한 것을 본 적이 없어요.

결국 지연이는 살아나고, 주일 저녁마다 경배찬양 때마다 율동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 아이는 100% 죽은 건데, 저렇게 살아서 저렇게 이쁘게 주님의 일을 하다니...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께 구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할 때,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오늘도 의지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하세요. 이제는 주님의 뜻에 맡겨드립니다.

언제 역사가 일어납니까? 내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시작하려고 할 때부터 역사는 시작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구하고 부르짖을 때에도 본문에서 보면 여전히 풍랑은 흉흉하고, 여전히 무리들은 죽을 상황에 모여 있었습니다.

결국 15절에 보면 바다에 던지매 바다에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우리가 우리의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에 결단을 내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향해서 부르짖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시작해서, 기적은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왕에게 권면합니다. 왕이여, 순종이 제사보다 낫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어떤 태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방법, 그것을 고집하느라고, 순종해서 멀어진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기적을 여는 열쇠와 같은 키워드가 무엇입니까? 바다가 잔잔해 지는 것, 그들이 소원하고, 그들이 원했던 하나님의 역사는 바다가 잔잔해 지는 것이었는데, 그 응답의 역사는 순종할 때에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환란날에 날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겉보기에는 사람의 뜻대로 흘러가는 것 같고, 운명대로 어떤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방식으로, 법칙으로 세상이 흘러가는 것 같아도 사실은 하나님의 뜻대로 운행되는 줄로 믿습니다. 뜻대로 행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드리면서 간구와 순종의 삶을 통해서 진정한 응답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게 간구와 순종을 겸한 그러한 신앙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함으로써 믿음을 말하면서 여전히 인간적 인정과 의리를 통해서 인간적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제쳐 놓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전심으로 하나님께 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 때, 깨닫았을 때 순종하며 결단과 용기까지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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