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순절]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2) (눅 23:44-49)

  • 잡초 잡초
  • 467
  • 0

첨부 1


십자가 하면 기독교를 생각합니다. 십자가 하면 교회를 생각합니다. 그만큼 기독교와 십자가는 떼어놓으려야 떼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십자가가 없다면 기독교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사형 틀입니다. 죄수를 죽이는데 사용하던 도구입니다. 그것도 얼마나 잔인하고 고통스러웠던지 로마인 스스로는 아무리 중죄인이라도 십자가에 죽이는 법이 없습니다. 단지 로마가 점령하고 있던 이방 나라 백성들만 이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너무나도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형벌이기에 보는 사람들에게도 끔찍한 경고를 주는 형벌입니다. 그것도 로마에 대적하지 못하도록, 로마에 대항하였다간 이렇게 끔찍한 형벌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십자가를 사용하였기에 십자가에 죽는 사람은 주로 로마에 대항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반체제인사입니다. 독립군입니다. 소위 정치범을 죽이는데 사용하던 형틀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로마로 볼 때는 정치범이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이 세상 공중 권세를 누가 잡고 있습니까? 바로 사단입니다. 악한 마귀는 죄와 권력과 우상숭배와 배금주의로 이 세상을 휘어잡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 사람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죄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단의 체제를 뒤엎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지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단이 휘어잡고 있던 체제를 무너뜨리는, 사단으로서는 두고 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사람들을 동원해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외쳐댔던 것이요 이제 그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려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에 대해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손과 발에 못 박히시고 매달리신지 어언 몇 시간입니까? 어느덧 낮 열두 시쯤 되었는데 온 땅에 어둠이 덮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깜깜한 밤과 같은 시간이 흘러 세시까지 계속이 됩니다. 그 고통의 시간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무 고통도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 시간은 하나님도 고개를 돌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것만으로도 이만 저만 아픈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상태로 매달려 있습니다. 그야말로 몸이 찢어져나가는 아픔이 예수를 휘몰아칩니다. 거기다가 몸이 늘어지니까 숨도 쉬기가 어렵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숨을 쉬려니 못 박힌 손과 발을 의지해서 몸을 끌어올려야 하는데 그때의 아픔이 얼마나 대단하던 지요? 수술을 하고 수술 자리에 덮어 씌었던 거즈를 뜯어내는데도 그 아픔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정말 치를 떨며 이를 악물던 생각이 납니다. 하물며 못이 박혀 있습니다. 그 자체로만으로도 치를 떨 만큼 아픈데 거기다가 숨도 쉴 수 없어 그 아픔을 딛고 몸을 세워야하는 그 찢어지는 아픔을 그것도 계속해서 상처를 통해 피는 빠져나가고 기운은 점점 더 빠져나가고 그런데도 이를 악물고 이를 참아내는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만큼 철저한 고통을 주님이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각오하고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통해 다시금 마음을 다지고 십자가를 지셨건만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 주님이 외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얼마나 힘드셨기에 얼마나 아프셨기에 예수님이 이렇게 울부짖으셨을까요?
이윽고 주님께서는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시고는 “다 이루었다” 하시면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 순간 온 땅이 흔들리면서 성전의 휘장 한 가운데가 둘로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이 엄청난 죽음의 고통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우리를 건져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죄악의 결과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위해 지옥불 속으로 던져질 수밖에 없는 저와 여러분들을 건져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사실은 내가 죽어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내가 당해야 할 형벌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고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백보좌 앞에서 생명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세상 사람 모두가 자기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지우리니 이는 곧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 대신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내가 당해야 될 고난을 주님이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 고난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주님께서 그렇게 부르짖으셨겠습니까?

그런데도 주님은 그런 고통 가운데서도 십자가 밑에서 조롱하고 있는 무리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그런 고통 가운데서도 세상에 남아 마음에 고통을 담고 살아가실 육신의 어머니를 생각하시면서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이렇게 끝이 없으십니다. 마지막까지 고통 속에서 몸부림을 치면서까지 용서와 사랑을 베푸신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이 지금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다. 그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을 무엇으로 대신 할 수 있습니까?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생명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을 대신하기 위해서는 죄 없는 생명이 죽어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죄 없는 어린 양을 잡아 대신하였듯이 온 인류의 생명을 대신하기 위해 죄 없으신 주님이 죽어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은 생명으로만 대속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살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모든 고난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내가 당해야 될 지옥의 모든 고통을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주님의 생명과 내 생명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지옥불 속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더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한없는 고난을 통한 용서와 사랑의 은혜에 우리가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요 우리 또한 고난 가운데서도 서로 용서하며 감싸주는 귀한 사랑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에 들어간 사람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그토록 비난하던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구경하러 모여든 무리도 그 일어난 일을 보고 모두 가슴을 치면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가슴을 쳤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위의 모습과 되어지는 일들을 끝까지 지켜본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 붙잡혀 왔던 여인을 앞에 두고 “모세는 이런 자를 돌로 치라고 하였는데 당신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었던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부터 시작해서 이 여인을 돌로 치라” 그때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했습니다. 그 누구도 죄 없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돌을 던졌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아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향해 조롱과 비난을 계{속해서 퍼부어 댔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고통 속에 울부짖는 예수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마지막 온 세상이 어둠으로 깜깜해진 가운데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는 순간 온 땅이 흔들렸습니다. 순간 저들의 가슴도 흔들렸습니다. “아 이게 아니었구나. 우리는 죄 없는 자를 죽였구나” 하는 후회가 저들의 가슴을 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가슴을 치며 힘없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랬다고 해서 저들이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가슴을 쳤지만 가룟 유다가 자신의 죄를 뉘우쳤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멸망 가운데로 빠져 들어간 것처럼 저들 역시 구원의 자리로 나아오지를 못하고 그냥 돌아서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뉘우침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한 첫걸음은 될 지라도 그 자체로 구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을 보면서도 끝까지 예수를 저주받을 자로 몰아갔던 제사장들과 장로들에 비하면 그래도 이 사람들은 낫다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뉘우침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구원의 자리에 있지 못하기는 매 한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아는 사람들과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다닌 여자들은 어떻습니까? 저들은 다 멀찍이 서서 이 일을 지켜보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까지는 저들 역시 구원의 자리에 도달하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모든 예수님의 역사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저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구주로 아직은 고백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가 없고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믿고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심을 우리는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여기 십자가 밑의 백부장은 어떻습니까? 백부장은 그 일어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합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
저는 메시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은 지켜보면서 그리고 일어난 모든 일을 보면서 그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고백을 하였던 것이요 그 고백이 이 백부장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구원에 이른 최초의 인물이 바로 이 백부장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백부장이 제일 먼저 믿음의 고백을 통해 구원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었단 말입니다.

바로 이 믿음의 고백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비결입니다. 바로 그 고백을 통해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나대신 예수님께서 죽어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더란 말입니다. 죄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되더란 말입니다. 나는 본래 죄 가운데 태어나 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시인하고 고백하며 그런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신 주님이야말로 나의 구원의 주님이 되심을 고백하고 그 주님을 나의 구주로 내 마음에 모시어 들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고백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는 줄 믿습니다. 아직까지 이를 믿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나를 위해서라고 하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을 내 마음의 주님으로 모시어 들인다고 고백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더 이상 저주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요 하늘나라 백성이 됩니다. 이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사랑의 자리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사야서 53장 4절로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약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으셨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으셨습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약함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 우리의 병이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서 제 갈 길로 흩어졌지만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의 저주와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 모두가 백부장의 고백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를 드리십시오. “주님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 나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고난을 당하시고 죽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나를 건져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로 하여금 죄와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예수님을 내 마음의 주님으로 모시어 들입니다.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만을 위해 살게 하시고 주님의 베푸신 사랑으로 나도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합니까? 끝까지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나를 힘들게 만듭니까? 더욱 감싸 안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신 것에 비하면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비하면 내가 당하는 고통과 아픔이야 무엇 대단하겠습니까? 물론 힘들 것입니다. 힘들기에 더 사랑해야 합니다. 더 이상 미움이 내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만 내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어놓으신 이 귀한 사랑의 자리에 우리가 머물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잃게 될 수 있단 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이루신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항상 함께 베풀며 나누는 성도들이요 그로인해 하늘의 영광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진수입니다. 아픈 만큼 아니 아프기에 그 사랑은 더 귀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 귀한 것처럼 내 마음의 아픔을 딛고 함께 나누는 사랑이야말로 진정 십자가의 은혜의 사랑입니다. 주님이 이 아픔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아픔을 안고 사랑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더 풍성하게 누려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아프기에 더 사랑해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나누어야 할 사랑입니다. 우리가 받은바 은혜가 무엇입니까? 죄인 된 나를 하나님이 사랑하셨습니다. 나를 위해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고 죽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나 역시 죄인 된 사람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은혜와 사랑의 자리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동행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