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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델이 되는 일꾼들(롬 16: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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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찌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우리 미스바교회의 사무총회에서, 전도사님을 목사님으로, 세분의 장로님, 일곱분의 안수집사님과 일곱분의 권사님을 추대는 투표와 임직을 통해 일꾼을 세우는 일을 지난 주에 했습니다.??이 귀한 일을 진행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사랑하시어 그동안 충성된 모습을 보시고, 귀한 직임을 맡겨 주셧습니다. 앞으로 우리교회의 세우신 일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감당하여 교회를 성장시켜 주시고, 개인적으로는 축복해 주시고 더욱 아름답고 복 되게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교회의 일군을 세운 목적은 무엇보다 하나님 축복의 전달자가 되기 위해 세워 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세상에 있고, 배후에 마귀, 사탄의 역사가 계속되기에 끊임없는 문제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 이 때 임직을 받은 그리스도의 군사 된 사명자는 십자가를 지고, 문제와 어려움을 감당하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직분자가 신앙생활에 믿음의 본을 보이고, 순종의 본을 보이며, 예수님을 잘 섬김으로 축복받은 증거를 전하는 사명자가 되어야 우리 미스바교회가 은혜로운 교회로 세울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먼저 받아 성도들에게 아름다운 간증의 전달자가 될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교회일군의 자리, 교회일군의 위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담임목사님과 교역자를 협력하고 돕는 자리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하고 가치 있는 일인지 임직자는 믿음과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만이 이 귀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교회일군의 모범이 되는 모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1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 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충성 이라는 말속에는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충성의 모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교회일군은 적어도 많은 교인들에게 사람들에게 “나를 본받으시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정도의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초대교회의 모범이 되는 일군의 모델들, 모범이 될 만한 사람들을 추천하고 또 칭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성경에서 나오는 모델이 되는 일군들의 그 모습들을 통해서 우리가 교회의 어떤 일군이 되어야 할 것이냐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이 본문을 읽으면서 제 마음속에 한 번 더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에 나간 군인이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지휘관이 지휘와 통솔과 전력투입을 적절하게 잘해야 하지만 일선에서 싸우는 전투병이 잘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이 전투병이 잘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후방에서 지원하는 지원병의 역할도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가정이라고 하는 공동체가 잘 되려고 하면 밖에 나가서 일하는 사람들, 공부하는 학생들이 잘해야 하지만 가정에서 이들을 뒷바라지하는 주부의 역할도 잘해 주어야 합니다.

교회가 잘 되려면 일선의 목회자가 잘 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를 후원하는 교회의 일군들의 역할도 큰 것입니다.??성도 여러분! 사도바울과 같은 사도에게도 후원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 수 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어떤 분이었습니까? 여러분 사도 바울하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신약성경 27권 중 13권을 저술하고, 삼층천을 경험하고,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기사를 행했던 능력의 사도였습니다. 사도바울하면 한마디로 성령의 충만한 분, 강력한 은사와 미ㅐㄷ음의 역사가 나타난 능력의 사도, 선교 목표를 위해 달려갈길 다하도록 뒤동아 보지 아니한 강인함과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복한 완벽함, 신령한 은혜와 은사를 체험한 신앙 슈퍼스타처럼 여겨 집니다.??그는 유럽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수 많은 교회를 전도하여 세웠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나가면 병든 자들이 벌떡 일어났고, 그의 손수건만 가져가도 귀신이 쫓겨났고, 마귀가 지배하는 곳에 마귀를 쫓아내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영혼을 변화시키며, 어둠의 구너세를 몰아내고 십자가로 승리의 깃발을 꽂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사용하신 위대한 능력의 사자요. 대단한 은사와 은혜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바울 혼자 이 위대한 선교사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능력의 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을 돕고 협력하는 후원자, 동역자들이 있었기에 위대한 사자로 쓰임받았습니다. 바울은 `나는 혼자서도 할 수 있다.`이런 말을 할 만한 능력자인데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여러명의 협력자를 소개할 뿐만 아니라 로마서에 소개된 것 만해도 37명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바울의 사역에 동역하고, 협력한 일꾼의 이름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헌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고린도전서 3: 9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독불장군 없듯이 신앙생활에도 독불장군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사람 “인”자가 말해주듯이 서로 돕는 동역자가 되어야 하고, 또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서로에게 감사하고, 돕는 좋은 후원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은 이런 것을 보면 세상에는 혼자서 하는 것보다 함께 할 때 더욱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혼자서 하는 일이 능률이 나는 것도 있지만은 함께 할 때 능력이 더 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이렇게 후원하는 일꾼들이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사도바울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은 하나님과도 함께 동역해야 됩니다. 바울이 고백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말씀은 ”우리는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능력 주셔야 할 수 있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개인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 개인적인 신앙, 나 혼자 신앙을 잘하면 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것도 내가 금식하고 내가 부르짖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만 말씀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8:19에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 구하면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합심해서 기도할 때 응답의 역사가 더 큰 것입니다. 한 사람보다도 두 사람이 난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또 가장 약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도를 요청하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혼자서 해결하려는 사람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보고 독립심이 있다고 칭찬할지 모릅니다. 혼자서도 잘한다고 이야기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선언합니다. 서로 도와 가며 사는 사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 이런 사람이 축복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지체의식을 가지고, 십자가를 함께 지고자 하는 성도를 하나님게서도 귀하게 보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에는 교회의 일군의 모델을 크게 세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미스바교회 임직자들이 본받고 협력하는 기준을 삼을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그 첫 번째로 겐그레아교회의 일군인 뵈뵈라고 하는 여자 집사님처럼 되어야 합니다.??여러분 성경 1절, 2절 함께 보겠습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겐그레아교회의 일꾼인 뵈뵈에 대해 이렇게 얘기 합니다. 바울은 그를 가리켜서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고개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고 생각하면서 제 마음 속에 느끼는 바는 겐그레아 일꾼인 뵈뵈 집사는 진짜 부자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부자가 참 많이 있습니다. 돈 많은 부자, 부동산 많은 부자, 큰 기업을 하는 부자, 그리고 높은 권력을 가진 부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부자는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부자는 내 돈 내고 내가 먹는데 무슨 상관이냐 하면서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집을 가지고, 이웃의 불행과 상관하지 아니하고 잘 먹고 잘 삽니다. 그러나 진짜 부자는 이런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이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누어 줄까를 생각하며 나누는 사람인 것입니다.

겐그레아 교회 일꾼이 뵈뵈는 구제하기를 좋아했고, 봉사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의 집에는 항상 가난한 사람들이 찾아 왔습니다. 나그네들이 계속하여 찾아왔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며, 섬김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집을 교회로 내놓아서 모든 사람들이 신앙으로 살도록 자신의 집을 헌금했습니다. 심지어 사도바울을 전적으로 섬기고, 필요한 선교헌금을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그를 가리켜서 여러성도들과 자신에게 보호자라 고백합니다. 다시 말하면 후원자요. 울타리가 되어주고, 그늘이 되어주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긴 선교여행에서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몸도 부실하고 병도 얻지 않았습니까? 이 당시만 해도 해도, 육체가 노쇠하여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형펀이었습니다. 그때에 바로 이 뵈뵈가 동역하고 협력하여 보호자의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진짜 믿음이 부자이고, 좋은 섬김의 헌신자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가 로마서라고 하는 이 편지를 로마교회에 전달한 것 만 보아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지금 인생의 만년이었습니다. 그는 얼만 살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나님의 품에 가기전에 하고 싶은 일이 두 가지 목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교회를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교회를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기근 때문에 교회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먹고 지내기가 아주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유럽에 있는 그 개척 교회들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이 전도해서 만든 작은 교회들이 헌금을 해 가지고 이 헌금된 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전달하는 일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에도 나와 있지만 예루살렘에 가면 죽는다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얘깁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곳에 가서 돈만 전달할 뿐 아니라,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그리고 그들을 함께 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또 소원이 무엇이었느냐고 하면 로마에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선교 활동을 하면서 끝까지 그 맘속에는 로마가 머리와 마음속에 늘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자기가 가서 전도하기 전에 이미 로마에 교회가 세워졌었습니다.

자 이제 그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 되겠습니까? 예루살렘으로 갈까? 로마로 갈까?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거예요. 그러니 꼭 거기를 갈 필요는 없고, 그저 편지 한 장 쓰면 될 것 같고, 그리고 예루살렘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그 교회에 초대교회 아닙니까? 처음 시작된 교횐데 그 교회 교인들이 어려움을 당한다니 내가 찾아가서 보고 싶은 맘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뵈뵈집사가 나섰습니다. 제게 편지를 써 주시면 로마에 가겠고, 목사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된 겁니다.

여러분 그러나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가는 길이 대단히 멀고 험한 것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편지라고 하는 것이 어떤 내용일까 기독교 신앙에 대한 내용 아니에요. 하나님 잘 믿어라. 우리 기독교 교리를 잘 정리해 놨습니다. 그런데 당신들도 아는 것처럼 로마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잡아 죽이던 그런 시절입니다. 이 서편을 가져간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왔다 갔다 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또 시간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물질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시간을 투자하고, 오가는 길에 잠도 자고 먹는 일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사도바울에게 어떻게 돈을 달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 아무 것도 없어 지금까지 도와주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뵈뵈집사는 그러므로 자기의 가진 것을 이 사용한 것입니다. 또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 기록에도 나옵니다. 이 편지라고 하는 것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전달하는 사람도 중요합니다. 만약에 뵈뵈가 변절이라도 해보십시오. 믿음을 배반해보십시오. 그리고 고발해 보십시오. 로마의 교회가 무너지고 아울러서 이것 때문에 사도바울도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보통 사람에게 이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만큼 신뢰하고 그만큼 기대하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합시다. “교회의 임직자는 담임 목회자의 심복이 되어야 합니다.(발레몬 1장 12절)“

뵈뵈는 로마서라는 이 편지를 로마교회에 전달한 것으로 보아서 그는 대단히 진짜 부자 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시간 바쳐, 물질 바쳐 생명 바쳐 주를 위해 충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그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일꾼이라는 말에 3)자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밑으로 내려가면 집사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겐그레아 교회에 집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집사라고 하는 것은 그 교회의 일꾼의 하나의 직분인 것입니다. 오늘 같으면 집사 뭐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 않지만, 사실은 그 당시 집사 역할을 대단히 큰 역할입니다. 더군다나 여자가 집사를 한다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였습니다. 그 때에 오천 명의 숫자 속에는 남자만 들어갔지 여자의 숫자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여잔 숫자에도 안세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 남자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 할 때에 내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과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렇게 기도할 정도였습니다.

여자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가 없는 것입니다. 로마의 유명한 철학자 세네카는 토론의 제목을 뭘 삼았느냐? 여자도 사람인가 그 여자를 사람으로 칠거냐 짐승으로 칠거냐를 얘기 한 거예요. 그런데 교회는 얼마나 좋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좋은지,,,여자도 일꾼으로 세우는 것을 보면 교회 안에는 차별이 없고, 하나님이 우리를 다 사랑하는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뭐라고 해도 하나님 안에서는 다 사랑이고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사의 역할은 뭐냐? 크게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장로의 역할은 했습니다. 여러분 뭐 아시다시피 여자 분과 남자 분들의 만남이라는 것이 참 쉽지 않을 때 아닙니까? 그 때 여자들에게 장로의 역할을 했어요. 여자 성도들의 생활과 신앙을 지도를 하고 인도를 합니다. 새로 교회 나온 여성들을 가르치고 그로 세례 받게 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집사의 사명 가운데 중요한 것은 뭐냐? 구제하는 일입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돌아봤습니다. 예수를 믿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그는 나와 모든 사람들의 보호자가 되었다 그런 것이에요. 얼마나 잘 대접했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런데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얘기입니다. `겐그레아 교회 일군으 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이렇게 얘기한다 라고 소개한 것입니다. `자매 뵈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바울이 소개한 것일까요? 한번 이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자매라고 하는 말은 가족 간에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나하고 전혀 피도 통하지 않은 사람을 형제다 이렇게 얘기할 때 얼마나 가까운 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형제사이에 무슨 차별이 있습니까? 형제는 그저 도와주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자매였단 말이에요. 나이 어린 교인들에게는 어머니가 됐습니다. 나이 많은 교인들에게는 누이동생이 됐어요. 젊은 사람에게는 누나요. 언니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가정처럼 그런 사랑을 베풀었던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그 부함을 가지고 나를 알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사치를 위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했던 것은 자기를 나누었던 것이에요. 어떻게 자매처럼....... 사실요, 남을 돕는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참 받으면서 비굴함이 없고 참 치사하다 이런 느낌 안 들도록 정말 사랑으로 이렇게 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사람을 알아 달라는 말씀합니다. 로마 교회의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하면서 하는 말이 "너희는 예수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최고로 대접하라는 권하고 잇스빈다. 하나님도 이런 사람을 기뻐하시고 이런 사람에게 은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세상에 부자처럼 `나를 알아달라.`가 아니라 내 것을 나눔으로서 세상이 나를 알아주고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는 그런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같은 교회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 3절, 4절 보시겠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아니라 이방인의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저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보면서 참 훌륭한 부부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부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좋을 때는 다 잘하다가 어려울 때도 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좋은 때는 잘하는데 어려울 때는 잘못한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IMF이후에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떠난 그 아내들의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었습니다. 그러나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참 훌륭한 부부였습니다. 그것은 이들의 결혼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 브라스길라는 아내고, 아굴라는 남편입니다. 남편이 앞서지 않고 부인이 앞서는 거예요. 그것은 부인의 역할 때문입니다.

이 브리스길라는 귀족 집안의 딸입니다. 그런데 아굴라는 천민 출신입니다. 귀족 집안의 딸이 천민 출신의 아굴라와 결혼을 했어요. 평강공주가 온달하고 결혼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평강공주가 온달을 장군으로 만들었듯이 브리스길라도 아굴라를 교회지도자로 만들었습니. 참으로 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의 역할 가운데 하나가 나 때문에 당신이 잘되는 그런 역할 마땅히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말씀하기를 남편하나 전도 못하냐고 잘해서 간드러지게 해가지고 남편들도 변화시켜보라고 했어요. 어떤 여자 성도가 믿지 않는 남편을 어떻게 전도할까 생각하다가 `그래, 내 남편 무뚝뚝한 남자지만, 목사님 말씀처럼 내가 간 드러지게 해봐야겠다`했어요. 그래서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나는 당신 때문에 너무나 행복하고 내가 당신 만난 것이 인생의 최대의 축복인 거 같습니다."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얘기하니까 이 무뚝뚝한 남편이 하는 말이 "와이카노? 니 미쳤나?"하고 한마디로 핀잔하고 끝을 내더더럽니다. 이 부인이 `그래도 내가 해야지`하고 그 다음날 "여보, 당신하고 결혼한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너무나 감사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 감사했어요. 여보, 사랑해요. 내가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도 당신하고 결혼하겠습니다" 그랬답니다. 그러니 남편이 어제도 그러더니 오늘도 그런다 말이에요. 얼마나 미안해요. 그래서 조금 정도를 낮춰서 한다는 말이 "여보, 괜히 쓸데 없는 소리하지마" 그러더랍니다. 그 다음날이 됐습니다. 또 얘기했대요. 그러니 그 남편이 하는 말이 "여보, 실은 나도 그래. 잘 알았어. 나도 교회 나가줄게!" 하더랍니다. 여러분, `여보, 당신 때문에 정말 행복합니다.` 이런 말이 필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요, 어떤 모습으로든지 나 때문에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식이 잘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좋은 사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는 또한 주의 일에 동역자였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얘기해요.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동역자인 브리스 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나의 동역자라는 거예요. 사도바울과 같은 일을 했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복음 전하는 일에 같이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또 `그들은 내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그랬습니다. 목숨을 내놓았대요. 어떻게 생각해보면 귀족집안의 딸이 천민하고 결혼하는 것도 목숨을 내놓는 겁니다. 부귀영화를 다 내어버린거 아니에요. 이 브리스가는 이런 면에서 전공자인거 같아요.

사도바울을 위해서 같이 복음 전하는 것도 목숨 내놓은 거예요. 그런 것이 너무나 감사했던 것 같아요. 오늘 사랑하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너무나 감사해서 이것을 가지고 없는 사람을 살리우는 일을 했어요. 아굴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에 감사해서 사도바울이 하는 일에 두 부부가 도왔던 것입니다. 목숨까지 내놓고...... 다시 말하면 사명을 위해 살았어요.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는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은 자지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자지가 해야 할 일을 하면 사는 것이 사람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사람이다라는 말이에요. 사명없이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사명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나 때문에 아무개가 잘되고, 목사님이 잘되고, 교회가 잘되는, 이런 사람이 진짜 사명자요. 훌륭한 하나님의 일군일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꼭 그런 일군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보면 여자들 얘기만 나오는 거예요. 알고 보면 여자들이 대게 센 거예요. 그래서 요새 시중에 떠도는 얘기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어요.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딸 때문에 걱정하지요. 그런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딸을 둘 가진 부모는 비행기를 탄데요. 그런데 죽을 때도 비행기를 타가지고 비행기 안에서 죽는대요. 딸을 하나 두면, 이게 또 문제에요. 안방에서 설거지 하다 죽고, 죽긴 죽는데...... 아들 둘을 두면요, 이집 갈까 저집 갈까 며느리 눈치보다가 길거리에서 죽고, 아들 하나 두면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방에 갇혀서 죽는 답니다. 요건 세상 사람들 이야기에요.

그러나 우리는 한 형제 자매가, 자녀가 되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세상사람들의 얘기를 따르지 않고 아들이 됐든 딸이 됐든 며느리가 됐든 사위가 됐든 상관하지 아니하고 우리 부모님들을 기쁘게 잘 섬기는 사명자로서 사는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얘기되는 것은 에배네도와 같은 교회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5절 말씀 같이 봅니다.??"또 저희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에배네도는 보면서 참 좋은 사람이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성격적으로 굉장히 조용한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라` 그랬습니다. 다시 말해서 처음 믿은 신앙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거예요. 충성을 하는데 끝까지 충성하는 것이지요.??변하지 않는 거예요. 자리를 지켜 주는 것이지요. 나는요. 우리 교회에도 이런 자리를 지켜주는 분들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 분들 귀하게 여겨야 돼요.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몸 아픈 거 마다하지 않고 그래도 `내가 가야지 우리 목사님이 힘이 나실 거야` 교회 일군은 이런 사람도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어느 집에서 가족들끼리 외식을 하러 갔답니다. 요새는 음식점에 가지만 옛날엔 다른 종류의 음식점이 있었습니다. 그거은 잘 기른 개 한 마리를 가지고 나가서 먹을 수 있는 음식점이 있었습니다. 그래 집에서 기른 개를 잡아 목으려고, 목을 줄로 묶어서 잡아가지고 잡아 먹려고 대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이 개가 죽는 것을 알았던지 발버둥을 치다가 줄이 딱 끊어져서 도망가 버렸답니다. 허탈해서 어떻합니까? 그래서 식당에서 기른 닭을 잡아 먹었답니다. 아마 그 닭도 참 미안합니다만 운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아뭍튼 개대신 닭을 잡아 먹었답니다. 그리고 잘 놀다가 저녁 때 해가 뉘억뉘억 질 때 집에 돌아왔답니다. 그런데 집에 가족들이 다 함께 갔으니 아무도 없어야 정상입니다.??문이 닫혀 있는데 개 한 마리가 와서 꼬리를 살살살살 흔들더랍니다. 무슨 개였겠습니까? 목에는 목줄을 걸고, 그 줄이 끊어진 채로 목에 상처를 입었는데 자신을 죽이려는 주인에게 찾아와서?그래도 기다렸는데 이제 오느냐고?꼬리를 흔들더랍니다.. 이것을 본 주인과 가족들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아나 후회했지 않겠습니까? 먼저 번에 "다시는 개잡아 먹으면 개자식이다."라고 한분은 다른 분이고, 이 분들은 신앙생활하는 분들이었습니다.그래서 그 다음 주일날 예배당에 갔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서 "제가 간증꺼리가 있습니다" 하면서 이 분이 성도들 앞에 나가서 죽 그동안의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 개를 보고 밤새도록 하나님 앞에 회개를 했습니다. 나를 죽인다 하는 그 때까지도 충성하는 이 개처럼 오늘 하나님은 죽도록 충성하라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기분 좋으면 충성하다가 기분 나쁘면 가고 그런 것이 저였어요. 저는요, 개보다도 못한 장로였습니다." 라고 고백했답니다.

교인들이 다 은혜를 받았답니다. 목사님도 그 말을 다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 나도 개보다 못한 목사입니다." 그리고 또 뭐라고 말했냐하면??"우리 교회 교인들은 개 같은 교인이 되고, 개 같은 장로가 되고, 개 같은 목사됩시다." 그랬답니다.??때로는 개도 좋은 뜻에 쓰이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개만도 못한 놈이다. 왜냐하면 우선 후각 능력에서 개보다 훨씬 못하다."고 박동현씨라는 분이 이야기 했습니다.

시골의 외딴 집에서 살던 어느 봄날 오후의 일이었답니다. 하루는 운동 좀 하라고 기르던 세퍼트의 목줄을 풀어 주고 일하다 보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답니다. 돌아다니다 나타나겠지 했는데 그날 밤 그리고 그 다음날도 개는 나타나지 않았답니다. 똥개도 아니고 족보(?) 있는 세퍼트인데. 며칠 후 우체부가 건너편 길에 자전거를 멈추며, 밭에서 일하던 그를 불렀는데. 박씨 개가 어느 부락 아무개 집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토바이 계기로 5Km가 넘는 먼 곳인데 왜 거긴 갔을까? 찾으러 갔을 때 주인의 오토바이 소릴 알아차리고 그 집 마루 밑에서 기어 나왔는데, 몸이 너무나 축나 있었답니다. 화가나서 오토바이에 끈으로 매달고 집으로 달려왔답니다. 개 혀가 축 늘어지도록 오토바이를 달린 것입니다. 이때는 너무나 지쳐서 세퍼트의 눈빛도 위용도 없고 잡견 같이 보였답니다.

얼마 후 그 집 똥개는 세퍼트 혼혈 잡견을 일곱 마리나 낳았고, 박씨는 교미 비용도 받질 못했답니다. 요구했지만 언제 부탁했느냐며 돈은커녕 새끼 한 마리도 안 주어서 받지 못한 것입니다. 봄날의 미풍을 타고 날아온 암캐의 그 냄새를 맡았고 개 목줄을 풀어주자마자 비호처럼 암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답니다.

그는 말하기를 "눈에 보이는 똥과 된장을 구별 못한다. 코를 가까이 들이대기까지는" 그렇게 말하며 개보다 못하다는 것을 실감했답니다.

서울로 다시 이사를 올 때 아파트에 살게 되어 덩치 큰 세퍼트를 데리고 올 수가 없었답니다. 땅과 집을 산 분에게, 개장사한테 보신탕용으로 팔지 말고 가족처럼 함께 데리고 살라고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사하던 날 트럭에 짐을 다 실고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를 부르고 트럭에 타려 하자, 사랑했던 애견 존은 늑대 울음처럼 하늘을 향해 울었답니다. 그도 눈물을 억제 못하고 눈물을 닦자 교우들이 “우리와 헤어지는 것보다 개와 헤어지는 것이 슬퍼?”라고 하더럽니다.

덜컹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달리면서 “너의 일방적인 충성 우정, 야단친 것은 기억 못하고, 칭찬만 기억하고, 밤이고 낮이고 산이고 들이며, 늘 곁을 지켜주었지. 너 때문에 외딴집이 외롭지 않았고, 철부지 꼬마아들 둘이 밥그릇에 들어가 앉고, 등에 타는 등, 못살게 굴어도 주인으로 이해했고, 낮선 사람이 나타났을 때는 사자 같은 용맹으로 동네잡견들을 눈빛으로 누르고, 밤중에는 집 주위를 지키며 주인의 냄새를 확인하던 너. 어떻게 잊고 살지 죤! 너의 어미 센과 너는 우리의 가족이었는데...

네가 눈빛으로 말할 뿐 언어로 말하지 못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단다. 말할 수 있었다면 무슨 말을 할지 난 알고 있었단다.

지금도 개가 나에게 보였던 충성에 비하면 난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얼마나 불충한가를 알기 때문에, 난 나 스스로를 개만도 못하다고 생각하며, 어떤 사람에게 마음 속일지라도 개만도 못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충성은 끝까지 개처럼 충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복이 있고, 이런 사람들에게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좋은 교회일군들이 누구를 보고 배웠을까요? 사도바울은 선언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처럼" 라고 하였습니다. 이들 세 사람 바울의 동역자들도 주님을 본받았습니다.

여러분, 뵈뵈 여집사가 보호자가 되고 진짜 부자일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생명까지도 나누어 주셨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부자로 살 수 있었습니다.??주님은 자신이 죽어서 우리를 살 리셨고 주님은 좋은 분이었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부르스길라 아굴라 부부가 목회자를 위해 헌신하되 어떻게 목이라도 내놓을만한 헌신이 가능했겠습니까? 주님을 생각하고ㅛ 따르고자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에베네도도 마찬가지 였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천사도 흠모하는 귀한 성직을 맡겨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만큼 주님을 본받고, 바울을 본 받고, 바울이 소개한 신앙의 모델들을 본 받아 충성하는 미스바교회 임직자 여러분이 보두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미스바교회 임직자 전부가 좋은 교회의 신앙의 본을 보이는 모델이 되어서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네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아멘> (황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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