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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요 1:4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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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느 곳에 있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머무는 곳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곳에 있으면 좋은 영향을 받고 나쁜 곳에 있으면 나쁜 영향을 받게 됩니다. 또 머물러 있는 곳에 의해서 그 사람이 평가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늘 가려서 자신이 들어갈 곳, 서 있을 곳, 머물 곳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맹모삼천지교는 그것을 아주 잘 나타내주는 좋은 교훈입니다.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의 며느리인 룻은 "어머니가 가는 곳이 내가 가는 곳이 될 것이며 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지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아스라는 좋은 사람을 만났고 쓰디쓴 인생이 달콤한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또 하나는 사람이 어느 곳에 있을 때 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필이면 감추고 싶고 부끄러운 곳에 있을 때 보았다면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은 좋지 못한 것일 것입니다. 그는 떳떳하지 못한 사람으로 인식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무는 곳을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다나엘도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음으로 해서 주님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습니다.

  연말이 되어갑니다. 성도 여러분들이 잠시 들어가거나 머물거나 기웃거리거나 하는 곳이 결코 죄악된 곳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곳에 머물기를 힘쓰시고 영적인 곳에 머물기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중하게 여겨주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면 굳이 예수님께서 언급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며 또한 저 역시 설교제목으로 삼고자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리수가 부처에 관련된 나무이듯이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함께 예수님의 나무입니다. 성경에는 60여회나 무화과나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이 태어나고 포교한 이스라엘을 비롯한 지중해연안이 원산지이며 또 먹을 수 있는 열매가 달리므로 식량자원으로도 필요한 나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화과나무의 무성한가지와 잎이 짙은 그늘을 드리워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사람은 무화과 나무 아래서 육체적인 일을 했을 것이고 경건한 사람 그 나무 그늘 아래서 경건의 훈련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아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를 우리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아래 있었다는 것은 은밀한 중에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나다나엘은 은밀하게 홀로 있는 시간을 즐겼습니다. 기원 1세기 시간대와 그리고 갈릴리 지역의 맥락에서 이 말을 이해한다면  무화과 나무 그늘이란 자기만의 친숙한 서재나 사랑방, 골방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이 무화과 나무는 대충 땅에서 나무 키가 5미터쯤 크고 가지는 사방 8미터로 무성하게 덮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대체로 단칸 방에서 한 가족이 생활을 하기 때문에 혼자만의 사색을 원하는 사람들은 이런 무화과 나무 그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홀로 있는 시간, 홀로 있는 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왕 "은밀한 중에"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좀더 생각해 봅시다. 은밀한 중에 하는 일은 숨겨지기 쉽습니다. 홀로 하는 일은 감추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분이십니다. 참으로 주님이 보시기를 원하시분들은 은밀한 중에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사실 홀로 있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홀로 있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가 은밀한 중에 있었다는 것 때문에 그를 좋게 보신 것입니까? 그가 홀로 있는 시간을 즐겼다는 것 때문에 그를 우수하게 여겨주신 것입니까.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요, 안그래요? 은밀한 중에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다나엘은 무화과 나무 아래서 육신의 욕망이 아닌 영혼의 갈급함을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육신의 욕망을 쫒아 서만 사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묵상과 기도를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는 퇴근을 하거나 쉬는 날에도 세상 잔재미를 즐기로 가는 동료들을 뒤로 하고 무화과 나무 아래의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무화과 나무는 가지가 길게 뻗고 잎이 무성하여 채양의 효과를 내어 그의 기도하고 말씀보는 장소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나타날 메시아를 묵상하며 조용히 기도하였습니다. 바로 나다니엘이 주님을 위해 간절한 소원으로 진심을 드릴때 예수님 은 그와 함께 무화과나무에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독일 월드컵 조편성이 어떻게 되느냐, 축구를 어느팀이 이기고, 야구나 농구를 어느팀이 잘하는 것 따위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관심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적이지도, 육신적이지도 않고 단순한 그를 예수님은 아셨던 것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비록 인정받지 못하고 어리숙하고 진실하게 살았던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손가락질이나 받았을지 모르나 그는 예수님께 인정을 얻는 속사람이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3. 그리고 중요한 것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때가 어쩌다 한두 번이었다고 하면 주님께서 그것을 굳이 말씀하실 이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주, 아니 지속적으로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두 번 잘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줄기차게, 변함없이 잘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그처럼 귀히 여겨주신 것입니다.

  현대문명은 우리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가지 못하도록 우리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더욱이 지속적으로 무화과나무 아래에 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먹고 사는 모든 것이 풍요로운 세상에서 스트레스가 많고 고통과 좌절이 심한 이유는 우리가 무화과나무 아래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더라도 자주, 지속적으로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있으면 아무리 세상이 간사하고 어두워도 우리는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의 발목을 잡는 사탄의 세력을 이기고 주님과의 시간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의 부모가 잃어버린 주님을 찾다가 주의 성전에서 발견하고는 나무라셨을 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되는 줄 모르셨습니까?"
  누군가가 나를 찾으려면 마땅히 무화과나무 아래로 달려와야 한다는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그렇게 인식시켜가기 위한 영적 결단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송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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