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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삼상 18:1-5, 롬 5:5-11, 요 15:1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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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림절 마지막 주일이며 성탄직전 주일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 오시기를 그렇게 사모하였는데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을 향한 그런 간절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이 귀하던 시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란 오직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 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주일 교회 가서 말씀 듣는 것이 그렇게 복되고 즐거웠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일주일 내내 주일날 들은 말씀을 반추하고 또 반추하면서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또 다음 주일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생활은 항상 가슴 설레는 것이었고, 간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환경과 여건이 좋아지면서 이런 설렘과 간절함은 사라졌습니다. 신앙은 단지 형식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말씀에서 주님은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라고 책망하셨을 뿐만 아니라 계속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토하여 내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성탄절을 기다리던 그런 마음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처음 예수 믿을 때 그 신비함과 사모하던 마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것을 일컬어 신앙인의 불신앙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이방인 보다 소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주님은 바로 저와 여러분, 우리들 교회를 향하여 “회개하라”고 촉구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대림절은 매우 의미 있는 절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 시대 유명한 종교인이었던 씨 함석헌 선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마치 결혼 날짜를 받아놓은 처녀와 같다고 했습니다. 신랑을 사모하며 결혼식의 그날을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손길은 바빠집니다. 그러면서도 그 수고가 하나도 수고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수고로 여겨지기는커녕 오히려 기쁘고 즐겁기만 합니다. 이것이 대림절을 지나는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하며, 주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 마음이어야 할 줄 믿습니다.

1. 이제 우리는 다윗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한 장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의 우정입니다. 나중에 요나단이 전쟁터에서 죽었을 때 다윗이 조가를 지었는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 하였도다”. 이런 요나단과의 우정을 가지게 된 것은 숱한 고난을 받는 다윗에게는 천군만마와 같은 힘이 되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다 나름대로의 친구가 있습니다. 어릴 때의 소꿉친구, 초등학교 동기생을 비롯한 각급 학교를 거치면서 사귄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다윗과 요나단이 친구로 맺어질 때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새 번역에는 “요나단은 다윗에게 마음이 끌렸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은 왕자요 다른 한 사람은 목동출신의 시골뜨기입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과도 같은 이런 신분상의 간격을 넘어서 서로 마음이 통했습니다. 이심전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인간적인 조건이 아니라 서로 마음이 통하게 된 것이 그들로 하여금 친구가 되게 했습니다.

사람이 좋은 친구를 가졌다는 것보다 더 보배로운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좋은 친구라고 하는 것은 서양 속담에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했듯이 어려울 때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윗에게 요나단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요나단이 죽고 난 다음에 다윗이 그 자녀들에게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께서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좋다는 친구가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친구, 비록 세상에서는 친구가 없는 사람에게도 유일한 친구이신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이 왜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세상에 오셨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기 위해서입니다.

나중에 요나단은 다윗이 위기에 처할 적마다 친구로서의 우정을 지키면서 적절한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윗 또한 요나단 사후 그 자녀들이 멸망할 수밖에 없을 때 친구의 우정 때문에 그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친구이신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어떻게 해주셨습니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내가 달려야할 사형틀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내 대신 그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죄와 저주와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탄절에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2. 오늘 사무엘서 본문 1절 하반절과 3절에서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였다”고 했습니다. 새 번역에는 “마치 제 목숨을 아끼듯 다윗을 아끼는 마음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국민이 국가를 위하여 또는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때, 그런 국민, 그런 신하를 애국자라 충신이라고 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때 효자라고 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때 열녀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는 “목숨을 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신적인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 아가페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꼽히는 기독교 변증가요, 시인, 작가, 비평가, 영문학자인 C. 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이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는 사랑을 이렇게 구분해서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으로 이것을 헬라 말로 “storge”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친구 사이의 우정으로 이것을 “philia”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이성간의 애정으로 이것을 “eros”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다 합해도 따를 수 없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인데 이것을 “agape”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리라”고 하셨을 때 그것은 세상적인 친구 정도가 아닙니다. 죄인을 위하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그 독생자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마침내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버리신 절대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신 그런 친구가 되신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요나단의 목숨같이 사랑한 이 우정이 다윗이 위기에 처했을 때 엄청난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같은 죄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며, 그 사랑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얼마나 놀라운 힘이 될 것이냐 하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들의 머리로 생각할 수도 없고, 우리의 입으로 다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할 때 그것은 이런 엄청난 사랑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탄절은 바로 이 사랑이 구체적으로 이 땅에 실현되어진 날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성탄절을 마지하면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듯이” 그 사랑을 실제로 알고 체험하는 거룩한 절기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3. 오늘 사무엘서 본문에 사용된 두 가지 중요한 용어가 있습니다.

(1) 하나는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주 튼튼한 끈으로 동여 맨 것을 말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 건축 현장에 가끔 가서 공사하는 모습을 살펴봅니다. 그런데 소위 “코끼리 차”로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여러 번 봤습니다. 무거운 석재를 끈에 묶어 올리는 것을 보면서 아슬아슬한 마음을 가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끈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굵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끈이 얼마나 든든하였으면 그 무거운 물건을 지탱해 주겠습니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끈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주님의 사랑의 끈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의 끈으로 우리를 자신과 묶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내가 한 몸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아무도 너희를 내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또는 “아무도 너희를 아버지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처한 이런 위치를 알고 계십니까? 마르틴 루터는 그의 유명한 찬송가에서 “네 힘만 의지하면 패할 수밖에 없도다 /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 하여 싸우네 /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 당할 자 누구냐 반드시 이기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승리하셨으므로 주님과 사랑의 끈으로 묶여 한 몸 된 우리도 그 승리에 동참하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3절에 요나단이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맺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 “언약”이라는 말은 “자르다”라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약 당사자가 짐승을 잡아 쪼개 놓고 그 사이로 지나가던 옛 풍습을 말합니다. 그래서 만일 언약 당사자 가운데 누구든지 이것을 파기하면 이 쪼개진 짐승같이 처벌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언약이야말로 목숨을 건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저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드실 때 잔을 나누시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 짐승을 쪼개는 정도의 언약이 아닙니다. 주님이 친히 십자가에서 그 몸이 찢어지고 피를 흘리심으로 , 정말로 목숨을 바치시면서 맺은 언약입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언약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언약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 끝 날까지 지켜주시겠다는 언약입니다. 그리고 주님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겠다는 언약입니다. 주님은 단지 말씀으로만 하셔도 그 언약은 천지가 없어져도 없어지지 않는 언약이지만 십자가에서 목숨을 대속제물로 바치시면서 그 피로 우리에게 언약을 맺어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요나단이 이렇게 다윗을 사랑했을 때 다윗에게 당장 나타난 열매가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지혜롭게 행하였다....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다....온 백성들이 합당하게 여겼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우리가 저 베들레헴 목동 다윗만도 못한 초라한 인생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보장이 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목숨 걸고 우리를 위하여 언약을 맺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승리의 원동력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탄절을 마지하면서 이 놀라운 사랑을 확인하고 체험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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