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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역자(同役者) (롬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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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rival)이라는 말은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두 사람이 같은 강(river)을 사이에 두고 맞서서 같은 강물을 마시는 경쟁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동역자(同役者) 헬라어 쉬네( )는 '함께 부림을 당하여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나의 동역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 부부는 바울의 전도 사역에 잊을 수 없는 희대미문(稀代未聞)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라의 이름의 뜻은 '늙다', '존경할 만한', '가치 있는' 또는 '제일의'라는 의미입니다. 브리스길라는 로마 출신이며 아굴라의 아내입니다. 그리고 브리스길라는 '브리스가'로도 불렸습니다(롬 16:3; 고전 16:19; 딤후 4:19).

브리스길라는 남편 아굴라와 함께 사도 바울의 복음전도 사역을 도왔습니다. 사도 바울과 이들 부부는 고린도에서 만난 이후 그들의 생업인 천막 만드는 일에 종사하면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신령한 일에도 사도 바울의 복음전도 사역을 돕는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바울과 함께 고난도 많이 받았습니다. 브리스길라와 남편 아굴라는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가장 아름다운 부부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이들 부부가 소개될 때는 주로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앞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그만큼 브리스길라는 모범적이고 훌륭한 여인이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Ⅰ. 노동의 동역자들입니다.

사도행전 18장 2-3절에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고 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원래 로마에 살았습니다. 로마 제국의 제 4대 황제 글라우디우스(Claudius) 제위 9년 A.D 49년경에 유대인 추방령에 따라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바울과 같은 천막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바울과 같이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브리스가는 브리스길라의 애칭입니다. 특히 바울이 브리스가의 이름을 먼저 내세우는 것은 남편 아굴라보다 바울의 사역에 더욱 열심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의 도리와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데 더욱 성숙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브루스(Bruce)의 말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 부부는 장막 만드는 업종으로 얻은 수입을 복음 사역에 아낌없이 사용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들은 건축업자였습니다. 예수님이 목수 일을 했듯이 유대인들에게 묵계처럼 되어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한 가지 장사하는 기술을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이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은 장막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전도자 바울의 노동으로 동역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개발하고 취하여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노동은 신성한 것입니다. 건강한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먼저 성도는 신성한 노동이 있어야 합니다. 건전한 노동력이 있는 성도는 노동으로서 주님의 동역자가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사명에 동역자가 된 것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바울의 동역자요 주님의 동역자였습니다.

Ⅱ. 신앙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본문 16장 3절에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을 향하여 강론할 때 이들 부부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행 18:2-10). 이들 부부가 구약에서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 즉 메시야에 관해서 자세히 알 수 있었던 것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였습니다.
계속되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신앙 행적은 바울의 신앙노선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전도자 바울과 신앙의 동질로서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신앙의 이질은 동역자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세계에서는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환경과 성장과정은 다르다 할지라도 신앙만은 동질이어야 진정한 의미에서 동역자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동질이 아니고서는 아무 일도 더불어 할 수 없습니다. 작금에 신학과 신앙이 이질인데도 불구하고 일치화를 부르짖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사도 바울의 신앙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Ⅲ. 복음사역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1) 순교적 신앙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 16장 4절에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으로 미루어 보건데 이 부부가 얼마나 바울의 복음 사역에 헌신적이었는가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의 목숨을 위한 일이라면 자기 목이라도 내어 놓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도끼로 사람의 목을 자르는 사형 집행자의 도끼날 밑에 자기 목을 내어놓는다' 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게 된 결정적인 동인은 확실치는 않습니다. 그러나 추측컨대 에베소에서 은장색 데메드리오와 유대인들이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는 바울의 말에 폭동을 일으켜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 무렵 바울의 생명을 구하고자 죽음을 불사했던 것을 생각하고 한 말인지도 모릅니다(행 19:1-41). 바울과는동병상련(同病相憐)어떤 경우든지 이 부부는 바울이 고난을 당할 때는 언제든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동원하였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18장 18절에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바울과 함께 하는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0절에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들 부부는 바울에게서 생명의 복음을 받은 후부터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언제나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의 신앙은 바울의 신앙과 잘 맞았습니다. 바울은 이들 부부의 순교적 신앙을 귀하게 생각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19절에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이들 부부는 전도자 바울이 투옥되어 있는 순간에도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옆에 두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심방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전도자로서의 말할 수 없는 온갖 사연들을 부담 없이 말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들 부부는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다가 성벽까지 함께 끌려가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도자 바울을 따라다니다가 결국은 순교로서 마감했습니다. 저들은 이 땅에서도 주님과 함께 살기를 고집했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기를 소원했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소위 땅에서 형통한 것으로 끝나기를 기대했습니까? 그렇다면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불행이지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이 같은 성공적인 삶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소원은 아무리 고상한 철학을 가졌다고 해도 결국 쾌락을 추구하는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소위 기복신앙은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이라고 할 수 없고 미신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복신앙의 목적은 참 신앙의 목적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복신앙은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히 광적이고 파격적입니다. 그러나 그 신앙의 방향과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고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에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계속해서 자기만족에 상승곡선이 유지되어야만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은 언제나 교회생활이 부담되고 신앙생활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2)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이 정립된 자들입니다.
사도행전 18장 26절에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고 했습니다.
이들 부부가 바울을 따라 에베소에 머물러 있을 때입니다. 그 때 그곳에 아볼로라고 하는 설교자가 나타나서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에베소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볼로는 풍부한 학식과 천부적인 능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에 능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볼로의 천부적인 능변과 풍부한 학식은 성경을 전하는데 유감없이 동원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복음의 핵심을 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볼로가 누구에게 어디에서 성경을 배웠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더라고 하는 것을 감안할 때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배운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아무리 열심히 설교하고 가르친다고 해도 세례 요한이 죽기까지 예수님에 관해서 부분적인 것만 배운 것이 그의 신학 지식의 한계였습니다. 때문에 아볼로가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인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회당에서 그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복음의 진수에 대해서 무지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복음의 진수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아볼로를 자기 집으로 정중히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설득력으로 아볼로의 설교를 교정해 주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아볼로는 복음의 진수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행 18:27-28).
이들 부부는 복음에 대한 분별력이 있는 자들입니다. 벌써 다른 사람이 전하는 설교를 듣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복음이 무엇이며 설교의 강조점이 무엇인지를 아는 신앙과 신학이 정립된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온갖 복음들과 설교들이 창궐한 이 때에 설교를 들어보면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바른 신앙과 바른 신학이 정립되어 있으면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Ⅳ. 교회를 섬기는데 있어서 동역자들 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9절에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라고 했습니다.
이들 부부는 전도자 바울을 위하여 지극한 충성을 다한 정도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집까지 성도들이 예배하는 예배처소로 내놓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유대인들의 방해를 피하여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마다 집안 식구들의 형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처소로 집을 제공한 일은 많이 있습니다.
오순절 교회가 다락방이었습니다(행 1:13). 가이오의 집이 교회였습니다(롬 16:23). 예루살렘 마가의 집이 교회로 제공되었습니다(행 12:12). 빌립보의 루디아의 집이 교회로 제공되었습니다(행 16:15, 14). 골로새의 빌레몬의 집이 교회로 제공되었습니다(몬 2). 라오디게아의 눔바의 집이 교회로 제공되었습니다(골 4:15).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해산하는 수고를 감수했던 전도자 바울의 동역자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전도자 바울의 복음 사역과 함께 하는 것이 이들의 삶의 의의요 목적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들 부부는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을 귀히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복음에 대한 분별력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이들이 당대의 부흥사 아볼로에게 한 행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들 부부는 하나님의 말씀이 저들의 삶에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날마다 말씀을 상고하며 그 말씀을 사랑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 진리를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가 이렇게 성경을 사모하고 묵상한 것은 성경이 저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진리를 깨달은 이들은 복음전파에 앞장을 섰습니다. 이들은 고린도에서 바울과 함께 동역을 하다가 같이 에베소로 건너가 교회를 설립하는데 앞장섰습니다. 나중에는 로마로 돌아갔다가 다시 에베소로 돌아와 열심히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집을 교회로 사용하면서까지(고전 16:19) 이들은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복음전파는 구원받은 성도를 향한 주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이들 부부는 이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헌신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헌신적으로 봉사하였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에서도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쳤습니다.
자기의 집을 교회로 제공하고 사도 바울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도 아끼지 아니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헌신이 있었기에 교회를 부흥케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켰습니다.

헌신이 없이는 사랑도 평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 주시는 희생과 헌신이 없었더라면 구원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받은 사명을 위하여 마땅히 목숨까지라도 내어놓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고린도전서 3장 9절에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였던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업에 동역하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 본질의 아들이요 바로 그가 하나님입니다. 그는 우리의 남편이요 우리는 그의 신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부부로서의 일체감을 이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지상에 있는 교회는 보이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이자 몸이기 때문입니다(엡 1:23; 4:32; 골 1:18). 우리는 교회와 일체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교회와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피조물입니다. 교회와 떨어지면 곧 파멸되는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한 신령한 노동의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동질의 신앙고백의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침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한 순교적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전하는 복음전파의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온전한 일체를 이루는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육체를 떠나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물을 떠난 고기가 혹시 산다 하여도 예수 떠난 사람은 사는 법이 없다'는 찬송은 시적감흥이나 음악적인 굴레를 벗어나서 신앙 고백적 차원에서 불리워지고 있는 것입니다.(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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