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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겔 33:10~11, 요일 3:14~17, 요 6:6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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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가 생각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속도로 위에서 바쁘게 차를 몰고 달려갑니다. 저 사람들은 무엇이 그렇게 바쁜 걸까, 어디를 향해서 저렇게 달리는 것일까. To the end of the world, 세계의 끝을 향해서 달린다. 이런 대사가 생각이 났습니다. 요사이 그 영화가 생각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전체가 하나의 죽음을 향해서 그대로 달음질치고 있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쓰나미에 놀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뉴올리언즈에서 카트리나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또 파키스탄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전 세계에 조류독감 경보가 매일같이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조류독감은, 1918년에 5000만명을 죽였던 독감과 비교했을 때 1300가지의 유전자 서열 중에서 10개만 다르다고 합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게다가 이라크에서는 끝이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전 세계에 테러가 계속되는 등 언제 죽을 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많은 죽음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한국입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도 20대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이러한 죽음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전 우주 가운데에서도 지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이 때 사람은 죽음을 향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향해서 살도록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유혹하는 자가 와서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만을 먹지 말라고 하시는데, 왜 먹지 말라고 하시는지 아느냐. 정말 맛있는데다가, 저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사람이 하나님처럼 될까봐 먹지 말라고 한 것이다. 저걸 먹는다고 절대 죽지 않는다.

하와는 참 탐스럽기도 하고 하나님처럼 되어보고도 싶어서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죽으리라고 경고하셨던 과일을 따 먹음으로써 죽음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명이 지배하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동산 주위에는 불칼이 가로 놓여 있어서 다시는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담의 가정에서는 가인이 질투심으로 인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후로 가인의 후손인 인류는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을 되풀이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죽도록 내버려두십니까. 하지만 결국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 값으로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에스겔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너희는 지금 너희들이 지은 죄 값으로 죽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죽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신다. 너희가 그 죄를 회개하고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아와 살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에스겔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뉘우치고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죽음의 세력을 없애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뭔지 아느냐.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것은 바로 생명이다. 이러한 생명의 길은 바로 나이며, 나를 통하지 않고는 생명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은 이 생명의 길을 열기 위해서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그 고귀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서른 세 살의 귀한 생명을 십자가에 못박고,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든 피를 다 흘리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기 위한 사랑의 염원이었습니다. 그 염원의 결과가 바로 예수의 부활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진리를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결국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근본적인 진리는 이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탐욕을 가진 때에 생명은 죽음으로 바뀌어졌다. 이것은 창세기에서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을 거쳐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될 하나의 진리입니다.

교회에서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성서에서 가장 명백하게 복음을 이야기해 준 부분이 바로 요한 일서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읽은 요한 일서 4장 14절-17절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죽음의 나라 속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생명의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생명의 길이 열려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응답하고 사는 때에 죽음은 생명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바로 이 말씀의 진리입니다.

오래 전에 버클리 대학의 뇌신경학 연구팀이 쥐를 가지고 이러한 연구를 했습니다. 한 통에는 쥐를 혼자 집어넣고 먹을 것을 줍니다. 다른 한 통에는 쥐를 여러 마리 집어넣고 먹을 것을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통에는 쥐를 여러 마리 집어넣고 먹을 것을 주되, 사람이 그 쥐를 보듬어주고 쥐에게 음식을 먹여줍니다. 이렇게 세 종류로 나누어서 실험을 해 보니까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먼저 혼자서 먹고 사는 쥐는 융통성이 하나도 없고, 굉장히 사나우며 600일 만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쥐들과 함께 먹고 살던 쥐는 700일을 살았습니다. 반면에 사람이 먹을 것을 주며 돌보아주었던 쥐들은 950일을 살았습니다. 짐승들의 세계만 하더라도, 이렇게 혼자 사는 것과 함께 사는 것, 그리고 자기들을 초월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밖에서 사랑해주는 것에 따라서 생명은 모두 달라집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몸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서  신학자 율겐 몰트만(Jurgen Moltmann)은 “아파티”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아파티란, 세상일에 대해서 별 관심 없이 덤덤하게 살아가는, 괴로운 일이나 자기에게 손해될만한 일은 다 피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무관심으로 인해 그 사람의 휴머니티는 결국 죽게 되고 몸뚱이만 살아 있게 됩니다. 슬픈 것을 보고도 슬퍼할 줄을 모르고, 아픈 것을 보면서도 아파할 줄을 모르고, 사람을 대할 때 가슴에서 따뜻한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은 채 식어버린 마음을 가지고 덤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파티란 병에 걸리면 하나의 습관이 되어버립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참된 생명이란, 마음이 즐거울 수 있고, 고통스러울 수 있고, 따뜻할 수 있고, 아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생명을 가지고 살아있는 징조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다 무디어져 버린 채 덤덤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삶은 몸만 살았지,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이 요즘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복음을 믿는 크리스천들은 한국 인구의 1/4이고, 전 세계 인구에 있어서도 1/4입니다. 그러나 이 많은 크리스천들은 오늘 이런 죽음의 행렬 속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가 이 죽음의 길을 생명 길로 바꾸는 참된 선교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열매를 거두고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반도라는 땅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땅입니다. 한 번 폭발하면, 한반도의 인구를 모조리 몰살시키고도 남는 수많은 살상 무기가 한반도에 있습니다. TV를 보니 지금 휴전선에 묻혀있는 지뢰수가 100만개라고 합니다. 이런 땅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전쟁이 없는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겠습니까.

생명을 위해서 돈을 쓰지는 못하고 무기만 만들어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요즘에는 평양에서 김정일과 정동영 장관이 한 번 만나고 나니까 평화통일이 다 된 것으로 알고 평화만을 외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한 대학교수는 6.25전쟁이 미국인만 아니었다면 다 통일되었을 전쟁이었다고 강의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그러한 자유는 허용되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분명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저는 이런 현실을 보면서 예레미야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예레미야는 평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평화가 다 이루어진 것처럼 평화, 평화 외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아, 입을 좀 다물어라.

또한 요즈음 보니 황우석 교수가 하는 줄기세포는 생명을 해치는 것이라고 카톨릭과 기독교에서 주장하곤 합니다. 지금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고 있는데, 이렇게 죽어가는 이 생명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다고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저렇게만 주장합니다. 그 사람들은 그것이 생명을 해치는 것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저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런 설교를 하는 당신께서는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정말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사실 저도 예수님을 생각하면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서른 세 살에 돌아가셨는데, 저는 여든 여섯 살 될 때까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힘을 얻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기를 원치 않는다. 네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서서 살아주기를 바란다. 내가 대신 죽어주지 않았느냐. 이런 음성이 저로 하여금 살아가게 하고, 그 분께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

1981년에 이 교회를 지을 때 신학적인 면에서의 설계는 제가, 기술적인 면에서의 설계는 김수근씨가 했습니다. 저는 모든 분들이 여기서 예배드리는 동안, 이 앞에 걸려있는 저 높은 십자가를 향해서 예배드리도록 설계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예배드릴 때에 우리가 그 동안에 잘못 살았던 것을 뉘우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배에는 죄에 대한 고백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 후에는 너희의 모든 죄를 내가 용서한다 하는 용서의 선언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배가 끝나서 마음의 부끄러운 것을 털어놓고 일어나 나갈 때, 바로 저 앞에는 여러 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십자가가 있습니다. 세상에 나가서는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겠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우리는 이렇게 교회를 나가서도 또 넘어지고, 와서 다시 뉘우치고, 또 넘어지기를 반복할 것입니다. 아마 숨을 거두는 시간까지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이다. 네 안에는 내가 산다. 세례를 받던 그 날에 선악과를 따먹던 너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내가 네 안에 살고 있다.

바로 그 분이 우리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넘어지는 우리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죽음의 길을 걸어온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주실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이 예배를 드리고, 세상에 나가서 죽음의 길을 생명의 길로 바꾸는 선교의 전선에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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