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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를 위한 각오 (행 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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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수필문학 전집에 서울대 국문학 교수님이 쓴 꽁트 한 토막 소개합니다.
교수님이 살고 있는 동네는 서민층 동네인데
유일하게 자기 동네에 사장님이 한 분 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무엇하는 사장님인가 하면
교수님 집 담벼락 밑에 작은 손수레에 뻥튀기 기계를 올려 놓고
뻥튀기 장사하시는 아저씨입니다.
왜 뻥튀기 아저씨를 동네 사람들이 사장님이라고 하는가 하면
손수레 위에 간판이 하나 붙어 있는데 그 간판이 걸작입니다.
그 간판에 뭐라고 쓰여 있는가 하면
<한국 팽창 주식회사 > 라 쓰여 있습니다.
명색이 회사 간판을 달아 놓았으니
동네 사람들이 사장님, 사장님 하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교수님이 이 글을 쓸 때는
사람들을 한 번 웃겨보려고 쓴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뻥튀기 과자같이
어느 날 내 인생에도 뻥 하고 터질 날이 있을 거야 하고
막연한 기대를 갖고 산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가나안 농군학교 설립자 김 용기 장로님이
자기가 30년 동안 하나님의 복에 대해 연구를 해 봤는데
[ 교인들이 복 받을 짓을 하니 복 받고
복 받을 짓을 안 하니 복 못 받더라 ]
그러면서 덧부쳐 하는 말이
[ 한국 교인들 신앙생활은 개떡 같이 하고
축복은 찰떡같이 믿는다 ] 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결코 어느 날 뻥튀기 인생 같이
뻥 하고 터질 날은 없을 것입니다.
고난의 대가를 치를 각오를 가진 자만이
선 고난 후 영광의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의 복음사역이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를 위해 고난의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행21장부터 전개 되어지는 사건들을 보면
바울이 왜 그렇게 오순절 전에 그것도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21장부터 28장까지는 고난의 연속으로 <2>
죄수의 몸이 되어 로마로 가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가 바울에게
[ 왜? 그토록 고생길을 자원하여 가려고 하느냐?] 고 묻는다면
성령에 매인 바 된 바울은
[ 그 외에 다른 길이 있느냐? ] 고 되물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일어난 일들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이 무엇인지 깨닫는
귀한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만나 목회적 권면을 한 후
36절 이하에 보면 지금 헤어지면 다시 못 볼 것 같아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며 다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그곳을 떠나 이스라엘 서쪽 항구 도시 두로에 상륙하게 됩니다.
그럼 먼저 두로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바울이 밀레도에서 두로까지 오는 경로를 보면
1절 이하에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고
2절 거기서 베니게로 가는 배를 만나 가다가
3절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 상륙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기 위하여 밀레도에서 두로에 상륙하는 여행 중에
구브로를 지날 때 어떠했겠습니까?
첫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바나바와 함께 갔던 곳입니다.
저도 첫 사역지가 경산 금호강변 금강이란 동네입니다.
가끔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부산 방향으로 가다보면
멀리 금강 동네가 보이는데 30년이 지났는데도
눈길이 거기로 돌아가며 가슴이 찡해요.
내 생명을 바치고 싶었던 첫 사역지였습니다.
교회를 짓다가 몸에 병이나 떠나야만 했던 첫사랑과의 이별이었습니다.
아마 바울에게도 구브로는 그러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왼편에 두고 두로 항구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두로에 도착하여 무엇을 하였습니까?
그곳에서 한 일은 제자들을 찾아가 교제하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은
바울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 행적을 따라 가보면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아테네, 에베소 등
당시 최대의 도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전도 일지에서 <3>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 얼마나 웅장하고, 아레오바고 광장이 어떠하고
데살로니가의 해변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답고
에베소 아데미 신전의 거대함, 말로 다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런 기록이 없습니다.
바울이 문학적 표현 능력이 없어서 그럴까요?
아니지요, 얼마나 예지적인 바울인데요.
이것은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저도 공감합니다. 제주도 부흥회 8번 다녀와도 한라산 사진 한 장 없어요.
미국 에레이 뉴욕 워싱톤 여러번 부흥회 다녀와도
아직 그랜드 캐년 이나 나이야가라 폭포 한 번 못 가봤어요.
왜? 부흥회 가서 부흥회 어떻게 할꼬? 그기에 생각이 다 있는데
관광 간다고 그게 눈에 들어오겠어요.
제가 이 말씀 드리는 것은 사람의 마음은 한 곳에 집중해야만
마치 돋보기의 초점처럼 뭔가 뜨거운 역사가 일어나지
마음이 나눠지면 이것도 저것도 안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오직 예수뿐이었기 때문에
그 도시에 들어가면 누구를 전도할꼬?
나아가 예수 믿는 형제들 지금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지?
이것 밖에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순장님들 가운데
예친 모임이 안 된다고 넋두리 하는 순장님들 있지요
오늘 바울의 심정을 가져 보세요. 예친원들에게 오직 관심을 가져 보세요.
내 가슴에 뜨거운 마음이 일어나며 멀리 있던 예친원들이 내게로 다가올 것입니다.

4절에 두로에서 제자들을 만나 일주일을 머무는 동안에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성령의 교통함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두로에 일주일을 머무는 동안
제자들을 만나 그냥 먹고 놀고 자고 한 것이 아니라
모여서 기도하고 교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울의 예루살렘 길을 만류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교제는 그 가운데 성령의 교통함이 있고
성령의 감동이 있고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만나더라도
서로 서로 기도하며 교제하는 신앙의 동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그렇지 못한 것이
교회 안에 사탄이 들어올 수 있는 틈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그러하지 아니했습니다. <4>
일주일을 머문 바울이 떠나가는데
5-6절에 온 가족들이 다 나와서 성문 밖에 까지 전송하며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떠납니다.
짧은 일주일간의 체류였지만
헤어지는 모습은 밀레도에서 장로들과 헤어지는 모습과 같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을 통해서 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바울의 만남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에게 만남도 축복이요 헤어짐도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지요
만날 때도 눈이라고 빼줄 것 같이 좋다고 하면서
헤어질 때는 야, 이 웬수야 하고 헤어지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만남도 축복이요 헤어짐도 축복이 되어야 합니다.
내게도 이러한 축복된 만남과 축복된 헤어짐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두로에서 수로를 따라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는
이튿날 가이사랴에 도착하게 됩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누구를 만나게 됩니까?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 교회 일곱 집사 중 한 명이요
사마리아 복음화에 주인공인 빌립 집사 집에 유하게 됩니다.
바울과 빌립의 만남, 얼마나 감회가 깊겠습니까?
바울과 빌립의 만남은 20년 만의 만남입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일어났을 때
빌립은 사마리아로 피신을 해야만 했습니다.
20년 전에 원수 바울이 복음의 동역자가 되어 빌립의 집에 찾아 왔으니
그 만남의 감회가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밤이 새도록 주님의 은혜와 역사를 간증하며 대화를 나눴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 집사에게는 네 딸이 있었는데
다 시집을 안간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고 합니다.
우리는 빌립이 사마리아로 와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어 그곳에 정착하여 산 것 같습니다.
여기서 빌립의 네 딸이 다 처녀로 예언하는 자란 말은
빌립 가정의 신앙이 어떠한가를 말해 주는 표현입니다.
가정이 은혜가 충만하면 자녀들도 은혜 충만하여
자녀들에게 은사가 나타납니다.
이 말은 빌립이 그 만큼 신앙의 본을 보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신앙을 본받아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입니다. <5>
유대로부터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빌립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바울에게 예언을 하게 됩니다.

11절에 보니 아가보 선지자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는 말하기를
[ 성령이 말씀하시는데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 고 합니다.
그러니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바울에게
[ 제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 ] 고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만류합니다.
이 아가보 선지자의 예언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아가보 선지자는 행11:27절 이하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고 부흥하는 중에 아가보 선지자가 예언을 합니다.
[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
지방에 있는 조그마한 안디옥교회가 흉년의 피해를 입은 중앙의 모교회
예루살렘교회를 도왔음을 증거하는데 있다면,
그 시기가 글라우디오 때임을 밝히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구태여 예루살렘에서 아가보란 선지자가 와서 흉년을 예언했고,
그 예언이 글라우디오 때에 성취되었다는 식의
설명이 첨가되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구절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감안한다면,
그 속에도 깊은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바울의 이 위대한 고백의 의미를 보다 분명히 일깨워주기 위해,
아가보가 예언한 대 흉년이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실제로 일어났음을
먼저 언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아가보는 그만큼 대단한 예언자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이사랴의 제자들은 아가보의 예언이었기 때문에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 것을 눈물로 간청하였습니다.
천하의 대 흉년을 알아 맞추었던 아가보가
바울의 예루살렘 고난을 예언했다면, 그 예언은 반드시 적중되고야말 것이므로, 바울을 사랑하는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바울은 그것이 아가보의 예언이었기에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요
그처럼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그 위험 속으로 주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 누구보다도
자신을 신뢰한다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가보의 예언을 들은 바울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6>
13절에 [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 고 단언을 하니
14절에 아무리 권해도 바울이 듣지 아니하니
[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 하고 그칩니다.
바울을 만류하는 사람들을 보고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표현은
바울도 마음이 많이 아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세상 부귀 영하는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귀히 여기는 것은 바로 주위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을 만류하는 그들을
바울은 충분히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에
바울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는 권함을 여러차례 받았습니다.
밀레도에서도 이런 예언을 들었을 때도
20:24절 [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합니다.
4절에 두로에서도 마찬가지였고
가이사랴에서도 아가보가 자신의 수족을 묶어 보이면서 예언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의하여 볼 것은
성령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환난과 핍박이 기다리고
결박당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진다고 하지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는 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가지 말라고 누가 합니까? 주위 사람들이 합니다.
바울의 예루살렘 길은
인간적으로 보면 고생길이지만 바울이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님께서
거듭 반복하여 환난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다고 강조합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바울에게 사명의 길입니다.
그러니 비록 환난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만
바울아~! 그 고난의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고 단언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이나 예언은 일어난 그 자체보다 <7>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고3 학생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 하나님! 제가 이번에 서울 대학을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애, 서울 대학 아무나 가는 줄 아니
네가 서울 대학을 가게 되면 과제물이 많기 때문에
하루에 수업 외에 최소한 7시간은 공부를 해야 하고,
시험기간 중에는 하루 3시간 정도밖에 잠을 못 잘 것이다.
그리고 수업료도 1년에 1000만원은 내어야 하기 때문에
방학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 것이다. ] 라고 합니다.
이런 응답을 받고 [ 아! 하나님께서 내게 대학을 가지 말라고 하시는구나,
대학에 가면 마음껏 여행 다니고, 데이트하고 그럴 줄 알았더니
그런 것은 하나도 없구나. 그럴 바에는 미리 취직을 하는 것이 낫겠다 ] 하겠습니까? 그 반대 일거예요.
[ 하나님! 잘 알겠습니다.
제가 그런 과정을 넘어야 제가 더 일군 될 수 있다는 말씀이죠?
제가 매일 7시간이 아니라 10시간 이상이라도 공부하고,
시험 때뿐만 아니라 졸업할 때가지 3시간만 자라고 해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 앞의 반응이 다른 믿는 형제들의 반응이라면, 뒤의 반응이 바울의 반응인 것입니다.

우리 남자 분들 군에 가서 유격 훈련 받아 보신 적 있지요
하강 코스에서 훈련병이 [ 0번 올빼미 하강 준비 끝 ] 하면
숙달된 조교가 절벽 아래를 보여 주면서
[ 애인 있습니까? ] [ 없습니다 ]
[ 죽어도 좋습니까? ] [ 좋습니다 ] 그러면 [ 하강 ] 합니다.
이게 죽어도 좋다는 말입니까? 아니죠, 각오하라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유격훈련을 받아야 합니까?
어떤 험한 곳에 전쟁에서 승리하는 군인 되기 위해서입니다.
아마 하나님이 여러 번 바울에게 묻는 것 같습니다.
[ 예루살렘에서 죽어도 좋으냐? ] [ 죽어도 좋습니다 ]
[ 예루살렘으로 출발 ] 이런 것 같아요.

바울이 아가보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단합니까?
그것은 [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느니라 ]
주를 위해서는 어떤 각오도 되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 행 결단을 했던 것입니다.
행9:15-16절에 보면 <8>
[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
바울은 첫 출발부터 예수 이름을 위하여 해를 받아야 할 것을 각오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이런 말씀을 만나면 줄도 그어 놓고,
[ 나도 이런 마음을 가져야지 ] 하고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입니다.
우리가 바울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은 그의 결심이 아니라 그의 삶입니다.
바울이 부르심을 받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 마음으로 살아왔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가는 곳마다,
손가락을 잘라서 혈서를 쓰거나,
머리에 띠를 두르고, 피켓을 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이 도시 저 도시에서 사역했습니다.
물론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병자를 고치게 하시고,
성령이 내리는 역사도 허락해 주셨지만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욕먹고, 맞고, 갇히고 가 전부입니다.
바울이라고 왜 자신의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왜 죽이겠다는 협박이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최고의 삶이 주 예수께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이 사명을 완수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에 생명을 바치기로 각오한 것입니다.
이런 바울의 결단을 본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4절에 [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 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 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
왜 가이사랴의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까?
1) 바울의 결심은 만류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바울의 발걸음은 끌려가는 발걸음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비장한 각오를 한 군인의 발걸음입니다.
잡혀서 감옥가면 어떻하나? 고생하면 어떻하나?
걱정하는 발걸음이 아닙니다.
되려 이 모든 것에 자유로운 발걸음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남들보다 더 넓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타고 다닌다고
행복해 보이고 마음 편하게 보입니까?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좇기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9>
반대로 측은한 모습이 듭니다.
우리가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직분자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이 결정되었느냐? 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생명 보험 들어야 하고 노후 대책 세워 놓아야 하고
적금을 들어 놓습니다.
그렇다고 그 불안이 없어질까요?
자기 인생의 앞길을 결정한 사람은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설령 고생이 눈앞에 보인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한 바울의 발걸음, 조금도 갈등이나 미련없는 발걸음이길래
가이사랴 제자들은 바울에게
[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 라고 말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 가이사랴의 제자들 성숙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을 끝까지 잡고 놓아주지 않거나 하지 않고
분명한 그의 신념을 알고 난 뒤 그들은 바울을 이해하고 보냈습니다.
바울 사도의 중심을 이해해 주었습니다.
다른 이유가 아닌 바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중심을 보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nbsp;

교회 안에 가만히 보면 다툼과 갈등이 왜 생깁니까?
자기 생각만이 다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일화입니다.
두 사람이 교회 내에서 일 때문에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산 선생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한 사람은 [ 자기 생각에는 일을 이렇게 해야 좋으데
저 사람은 저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물었더니
[ 그 방법보다 이 방법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 ] 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도산 선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내 생각에는 두 분이 싸우시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뜻인 것 같습니다 ]교회는 내가 가진 방법이 최선의 것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을 포기할 때 하나님께서 더 놀랍게 역사하시며
열매 맺게 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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