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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서주일] 평생에 듣던 말씀 (딤후 3: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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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달력을 보시면 오늘을 ‘성서주일’로 부릅니다. 성서주일은 좀 생소하고 교회에서 잘 지켜지지 않은 절기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교회력에 비해 나중에 시작되었기 때문이고, 또한 12월에 대강절과 성탄절이란 크고 중요한 절기 중에 있어서 더욱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잘 강조하지 않고 넘어갑니다. 하지만 성서주일은 일년의 어떤 주일보다도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오늘 한번 이 날을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성서주일의 발단은 1549년 영국 교회의 대주교인 그래머가 성서 주일을 위한 기도서를 편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후 영국 교회가 이를 대강절 둘째 주일의 기도문으로 사용하면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성서 주일은 부분적으로 지켜졌습니다. 그러다가 보다 보편적인 교회 절기로 확대된 것은, 1904년 창립 100주년을 맞은 영국의 성서 공회가 제안했고, 그 후 미국의 성서 공회가 1915년 12월 5일을 공식적으로 성서 주일로 지키면서 오늘까지 이르게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1954년부터 12월 둘째 주일을 성서 주일로 정해 대부분의 교단에서 이 날을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을 이렇게 성서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성경에 대한 인식을 새롭고 확고히 하기 위함입니다. 매일 보고, 대하는 성경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의 소중함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특히 본문을 통해 과연 성경은 어떤 책인지,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성경의 권위입니다. 우리가 종종 권위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 말을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절대적인 것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힘, 어떤 분야에서 능히 남이 신뢰할만한 뛰어난 지식이나 기술 혹은 실력”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권위는 그 대상에 대한 최고의 영예와 존중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가진 권위가 있습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권위가 있습니다. 그 권위는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이 결국 기독교를 대변하고, 사람들을 잠잠케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나 어떤 사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 보다 더 높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성경의 권위보다 교회의 권위를 높였으며, 성경의 권위보다 성직자의 권위를 더 높였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부패를 가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권위의 회복은 잘못된 교회를 바르게 하고, 크리스천의 삶을 바르게 인도하고, 바른 교회의 신학을 위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라는 유명한 영국의 설교가는 ‘권위’라는 책에서 이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인간을 감화시키고 잠잠하게 하는 힘은 오직 성경 외에는 없고, 성경이 가진 권위야말로 가장 위대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성경의 권위 외에 다른 것에 복종해서는 안되고, 어떤 설교자도 성경이 가진 권위보다 앞서지 말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가장 큰 권위가 있음을 알리기 위하여, 설교자가 강단에서 내려 올 때는 더 이상 인간적인 권위를 내세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던 것을 봅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이 이처럼 권위를 갖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그것을 알려줍니다. 16절에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 ‘감동’이란 말은 영감, 입김, 의도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직접 기록하진 않았지만 1600년 동안 40여명의 저자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어떤 한 맥으로 이어지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감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마다 필요한 사람을 들어 그들에게 영감을 주어 성경을 기록하게 함으로써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시대까지만 해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1700년대 들어오면서부터 성경의 오류를 들먹이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는 것으로 반론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책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성서주일을 만들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도 바로 이런 반론에 대하여 우리가 가진 성경이 최고의 권위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심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일점일획이라도 성경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성경을 기록한 모든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영감을 주셨고, 그들의 사상을 지배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이단과 잘못된 신학으로 성경을 어지럽히는 이 시대에 성경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권위 앞에 진리임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성경의 가치입니다. 어떤 것에 있어서 가치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영어로 ‘worship'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어떤 것보다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경이 또한 그와 같습니다. 성경은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성경은 세상의 어떤 책보다 가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문에서 이유를 밝혀줍니다. 곧 인간에게 구원을 주기 때문입니다.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을 알면 우리가 성경의 가치를 더욱 귀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구원은 먼저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 죄에서의 해방이 바로 구원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그 죄를 우리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몸부림치며 이기려고 해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 죄가 우리를 무겁게 하고, 짓누르고, 괴롭게 합니다.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우리를 악한 길로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의 탄식처럼 우리가 곤고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사망과 고통의 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수 있습니까? 오직 성경입니다. 성경 외에 인간이 죄를 해결할 길이 제시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 또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살다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이후에 또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그 사후세계에 대해 어떤 책도 자세히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그 세계를 알려줍니다. 성경은 우리의 미래만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까지도 알려줍니다.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세상의 어떤 책도 그것을 알려주지 못했습니다. 성경만이 그것을 알려줍니다. 성경은 인간의 과거를 말하고, 미래를 제시하는 유일한 책입니다. 그래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외에 이 문제를 풀 길이 없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가도록 도와주며, 죽음이후의 세계가 있음을 확실히 알려줍니다. 이제 이 놀라운 성경의 가치를 인정하십시오. 성경을 통해 구원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인생을 성공과 승리로 만들어 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성경의 능력입니다. 이 세상에 힘과 능력이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가진 능력이 있고, 동물이 가진 힘이 있습니다. 원자폭탄이 가진 폭발적인 힘이 있고, 세계를 이끌어 가는 여러 힘이 있습니다. 이런 여러 힘과 능력가운데 가장 큰 힘은 바로 성경의 힘입니다. 성경은 어떤 책인가, 바로 능력이 있는 책입니다. 이 세상에 성경보다 더 큰 힘을 가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성경이 능력이 있을까요? 그것은 성경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새롭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16절과 17절을 보십시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닫혀진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힘은 성경밖에 없습니다. 돌 같은 마음을 부수는 힘은 성경만이 유일합니다. 사람을 사람되게 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길은 성경 외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성경을 통해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었고, 변화를 받았습니다. 성경만이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웁니다. 이것이 성경의 힘입니다.

  그래서 이런 변화를 위해 성경이 가진 몇 가지의 별명이 있습니다. 이 별명을 통해 말씀을 통한 변화를 온전히 이룰 수 있습니다. 우선, 말씀은 ‘칼’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말씀은 검보다도 예리합니다. 말씀은 우리 마음속에서 암 덩어리를 도려내고, 양심을 찌르고, 바르게 살도록 깨닫게 합니다. 사람의 변화는 바로 이런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론 아프게 느껴지는 말씀이라도 잘 받아야 합니다. 내 것으로 받으면 말씀은 어느 것 하나라도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귀한 말씀, 복된 말씀으로 알고 그 말씀으로 우리의 더럽고 옳지 못한 것이 도려질 수 있으면 진정한 변화는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가진 능력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이런 능력이 내 속에서 역사하도록 말씀 앞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거기에 큰 변화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또한, 말씀은 ‘방망이’와 같습니다. 사람의 변화는 다듬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난 것이 다듬어지고, 파인 것이 다듬어지고, 부족한 것이 온전해져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이 또한 인간 삶에 진정한 변화입니다. 그 변화를 위해 말씀이 방망이처럼 우리 속에 활동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깨트립니다. 우리의 인격을 다듬고, 성품을 만들고, 우리의 부족한 것을 온전하게 만듭니다. 이런 사람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이런 변화가 말씀을 통해 깨지면서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말씀은 ‘거울’과 같습니다. 사람은 자기를 볼 줄 알아야 변화가 생깁니다. 변화된 사람은 곧 자기를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많이 보는 사람을 우리는 성숙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말씀은 곧 우리 자신을 훤히 드려도 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대할 때마다, 들을 때마다, 가까이 할 때마다 우리의 구석구석을 보게 합니다. 나의 현재의 모습을 가장 잘 보게 합니다. 그래서 고치게 하고, 치우게 합니다. 이것이 말씀이 가진 힘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잘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이 가진 힘입니다. 말씀은 우리 삶에 때론 칼처럼, 방망이처럼, 거울처럼 활동하여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어지고, 부서지고, 녹아지고, 씻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씀을 통해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이루었고, 지금도 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귀한 말씀을 통해 영적 생명의 각성과 변화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말씀이 가진 놀라운 권세요 힘입니다.

  ‘벤허’라는 아주 영화가 있습니다. 세계 영화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걸작품으로 꼽히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원저자는 루 웰러스(Lew Wallace)라는 소설가입니다. 이 사람이 작품을 만들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어느 날 열차를 타고 여행을 하던 중, 그의 친구가 예수의 로맨스에 관해 쓰면 대단히 인기 있는 소설이 될 것이라고 귀뜸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여인이 들끓었고 스캔들도 있을법하니, 쓰면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웰러스는 그런 작품을 소설을 쓰기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그는 무신론자였습니다. 하지만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예수를 알아야 했고, 예수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마음이 뜨거워졌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드디어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해 성경을 읽었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서 주님을 만났고 예수님이 내 인생의 중심이 되어 나를 변화시켰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벤허의 마지막 장면을 예수님이 죽으실 때 토굴에 숨어 지내던 문둥병자들이 고침을 받는 장면으로 배치했다고 합니다. 아주 감동적인 장면으로 기억됩니다. 그 모습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때, 자기처럼 삶이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믿지 않는 자를 믿게 하고, 믿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말씀은 위대한 작품을 만들고, 위대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이것이 말씀이 가진 힘이요,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가에 보면,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주 예수 크신 사랑 늘 말해주시오,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 저 뵈지 않는 천국 주 예수 계신 곳, 나 밝히 알아듣게 또 들려주시오, 평생에 듣던 말씀, 평생에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어제도 들은 말씀, 오늘도 우리가 듣습니다. 그리고 내일도 계속 들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평생에 들을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에 다음세대가 또 들을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귀합니다. 이 말씀이 권위가 있고, 가치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성경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제 평생에 듣기를 다짐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서해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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