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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요일 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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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1.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생명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는 서로 사랑한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을 향하여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사랑하는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창조주와 주권자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 되신다는 선언에 복종하며, 그의 신하된 자로서 충성을 맹세한 공동체입니다. 그 충성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행위가 “하나님 사랑”이며, 이 충성을 위해 이웃에게 화평으로 나아가는 행위가 “이웃 사랑”입니다. 요일 4:7은 우리에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의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당연한 요구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 속해 있다면 그 사랑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사랑을 행하도록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요일 4:7은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선언합니다. 요일 4:7-21까지 총 30회 나타나는 “사랑”은 모두 하나님께 속한 “아가페”라는 헬라어의 “사랑”으로 표현합니다.

사랑의 출발점은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부터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전인격적으로 아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입니다. 태어난 자만 하나님과 생명으로 함께합니다. 생명으로 함께하는 자만 인격적이며 경험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자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알고, 그 지식을 믿으며, 그 지식을 인간적으로 체계화시켜 놓은 교리와 신학을 믿고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자가 아니라면 하나님과 아는 관계의 경험적 지식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진리를 믿고 아는 거듭 난 자만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의 사랑은 그 사랑 안에서 거듭남으로 받은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께로 난 자이며,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그를 아는 지식은 사랑하게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의 사랑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성경 지식의 믿음이 아닙니다. 교리적인 믿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그의 사랑에서 태어난 생명의 믿음입니다.

신학적 지식과 자기 이론적 지식을 믿는 율법적인 믿음은 생명을 잉태하고 산출해 낼 수 없는 의문의 죽은 믿음입니다. 원수를 만들며, 정죄하고, 이웃을 향하여 화평으로 나가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수많은 율법적인 헌신과 각종 행위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잉태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낳은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신 하나님을 아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으로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적인 지식으로만 함께하는 한 생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사랑에서 태어난 자는 그 사랑으로 생명을 잉태하며 재생산합니다. “사랑하는 자”마다 생명 되신 하나님께로 난 자입니다. 생명 되신 하나님을 육체적으로, 인격적으로 아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생명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는 서로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생명 되는 진리에서 난 자는 그 진리로 인하여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 사랑을 위해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생명과 자유와 사랑의 근원입니다.

2. 예수님의 사랑은 사랑할 수 없는 원수를 향해 주어지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임하는 참된 자유를 주셨습니다. 생명의 진리에서 임하는 그 자유로부터 우리의 사랑이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사랑하는 자들의 공동체”가 된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생명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나타나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죄인이며 악인인 우리 가운데 나타나 주셨기 때문에 탄생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은 시체 같은 존재인 우리들에게 나타나 주셨기 때문에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선한 사람에게 나타난 사랑이 아닙니다. 의인에게 나타난 사랑이 아닙니다. 원수에게 나타난 사랑입니다. 악인들에게, 죄인들에게 나타난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일 4:9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나타난바 되었으니”라는 표현은 수동태의 표현으로서 누구의 요구도 없이, 강압도 없이, 어떤 조건도 없이 스스로 나타나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들의 조건에 관계없이 우리를 위해 스스로 사랑으로 나타나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타나 주신 목적은 한 가지뿐입니다. 요일 4:9는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라고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으로 나타나 주신 방법은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뿐입니다. 죄인을 살릴 목적으로 자신을 나타내 주신 것이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죄인과 악인, 그리고 원수의 회복을 위한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하나님 사랑이나 이웃 사랑은 우리에게서 출발된 사랑이 아닙니다. 정복되어야 하고, 멸망당하고 죽어야 할 대상이었던 우리에게 찾아와 나타나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그 사랑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일 4:10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사랑은 독생자를 화목제로 보내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는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의인과 선인에게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며 원수 된 자들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는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죄인과 원수 된 자에게 화목제로 나타나 주신 그 사랑이 “하나님을 아는 길”이 되어주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진리”를 보여주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생명”으로 나게 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으로 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요 14:6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오신 그 화목제의 사랑으로 공동체에 함께하게 된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사랑의 행위는 화목제의 그 사랑에서 샘물처럼 솟아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그 사랑은 우리들이 서로를 향하여 가져야 할 사랑입니다. 우리가 본받을 사랑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의 공동체 속에서 행할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열정을 태우는 것입니다. 그 열정은 원수를 향하여 자기 몸을 내어 주는 열정입니다. 죄인을 향하여 자신을 드리는 열정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는 요구는 원수와 죄인을 향하도록 주시는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화목 제물로 우리에게 나타나 주신 이유가 우리를 원수에게 보내기 위함이셨습니다. 아직도 죄인 된 자들을 위함이셨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그들을 위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은 원수와 죄인들을 향하여 움직여 가라는 명령입니다. 원수를 살리기 위한 움직임의 명령입니다. 죄인을 살리기 위한 움직임의 명령입니다. 이 세상 나라는 주위에 원수와 죄인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그 나라 가운데서 우리에게 자신을 주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살리시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원수와 죄인인 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영원한 삶의 길과 진리와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우리를 정복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주인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생명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충성의 행위를 통해 그 사랑 안에 거할 때만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충성 계약서 내용은 단 한 가지입니다. 내게 찾아와 나타나 주신 예수님의 그 사랑으로 우리들이 다른 원수들 앞에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3. 우리들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의 행위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출발한 것인지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영적 어린아이라도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교회와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행하는 우리의 모든 말과 행위가 이웃을 살리기 위한 것인지 아닌지 쉽게 구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살리기 위한 것인지 정죄하기 위한 것인지 구별할 수 있습니다. 죄인을 살리기 위한 것인지 멀리 구분하여 배척하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의 모든 행위는 원수를 살리고 회복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죄인들 가운데, 원수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주하며 싫어했던 죄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원수들의 마을로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의 화목제물로서의 모든 행위는 죄인을 살리기 위한 행위였으며, 원수를 회복시키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의로운 자들에게 나타나 주시지 않고 자신을 미워하며, 어둠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자들에게 나타나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요구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는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필수적인 복종과 충성의 행위입니다. 그 사랑의 충성이 있을 때에만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생명을 유지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가운데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 행복을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원수를 찾아가는 사랑을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죄인들 속에 들어가 회복시키는 사랑을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러한 화목제로서의 사랑만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살아 있는 사랑입니다.

구약의 다윗은 그 사랑으로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사울을 사랑하는 이웃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채찍질 하며 십자가에 못 박는 자까지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감옥에 가두는 자들, 자신을 로마로 압송해 가는 군병들까지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모든 복음과 모든 사랑은 원수와 죄인을 향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위해서 원수와 죄인 되었던 우리에게 화목제의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요일 4:11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하십니다. 죄인 된 우리에게 나타나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사랑하는 자의 공동체에 속한 자라면 이웃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여기서 “마땅하다(옵헤일로)”라는 단어는 “빚지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랑하는 자의 공동체 회원인 그리스도인은 모두 그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 빚 갚기를 기다리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랑하는 자”의 공동체에 들어 온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직도 원수를 사랑하기 위하여 원수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죄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죄인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은 그 빚을 누적해 쌓는 자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고도 자신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진 자를 옥에 가두어버리는 배은망덕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악한 종을 사랑하는 자들의 공동체에 두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마 18:33-34는 그러한 악한 종을 향하여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라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마 8:35에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우리는 이제라도 신속히 원수와 죄인들에게 향해야 합니다. 그들을 살리고 회복시키기 위한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의 공동체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며 죄인들을 사랑하는 현장 속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기대하시며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요일 4:12에서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서로 그렇게 사랑할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 사랑으로 원수를 회복시키고 죄인을 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행위와 조치들이 원수를 살리기 위한 것입니까? 원수에게 보복하기 위한 것입니까? 죄인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까? 죄인을 격리하기 위한 것입니까? 이웃을 행복하게 이끌기 위한 것입니까? 자신의 행복을 보존하기 위한 것입니까? 우리의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신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의 행위를 지켜보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는 요구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요구입니다. (김종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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