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취할 것과 버릴 것 (빌 3:7~14)

  • 잡초 잡초
  • 317
  • 0

첨부 1


그리스도인은 목적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은 다 나름대로 건전한 목적을 가지고 산다고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완성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도 사십 년 광야 여행을 마칠 무렵 모압 땅에 있는 느보산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평생소원인 가나안 입국의 목적은 못 이루었으나 그 스스로 행복자라고 말했습니다(신 33:29). 비록 자기의 목표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받는 평가에 따라 성공과 실패의 결과를 말할 수 있습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라고 하였습니다(전 3:1). 사람마다 출발선에서 목표 지점을 향하여 달려가지만 그 도달하는 종착점에서 쌓은 실적을 평가받게 됩니다.
올해도 일 년 열두 달을 지나와서 연말의 결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끝날이 아니고 거기에 이르는 한 분기점이 되기 때문에 앞으로 남은 인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점검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로마 옥중에서 이 성경을 기록한 바울은 그동안 네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하여 많은 실적을 쌓았지만 아직도 그의 목적이 완성되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죽음이 임박한 그 순간에도 목표를 향하여 계속 질주한다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효과적인 경주를 하기 위해서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분명히 하고 과감한 행동의 의지를 피력하였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서 한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대망하는 우리의 삶에 이정표를 삼고자 합니다.

I. 취할 것입니다.

이는 도전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본문 말씀 12절에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 14절에도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

(1) 미완성 상태의 모습입니다.

12절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13절에는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개척자이거나 도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완성된 자로 보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자기의 기준에서 볼 때 상당한 경지에 이른 것으로 자만하게 되고, 다른 사람과 눈높이를 맞추어 볼 때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할 만큼 별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경우 그 기준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기의 업적이나 성숙도에 있어서 완성되었다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엡 4:13).

또 한 가지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의 목표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세계 모든 족속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마 28:19). 바울 자신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하였습니다(롬 1:14). 그는 또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하면서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 9:20-22).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까지 아직도 미완성품이라는 생각으로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걸음과 복음의 사명에 진력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2) 달려가는 삶입니다.

바울은 지금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12절). 13절에는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좇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지금도 목표를 향해서 매진하는 경주자의 심정을 피력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24에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하였습니다(27절).

경주에 임하는 운동선수가 자기의 기량이나 관록을 믿고 자만에 빠진다면 그때부터 실패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그동안 많은 업적을 이루어 놓았고, 여러 사람으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을 위치에 있었지만 그래도 거기에 도취되거나 만족하지 않고 계속 매진하였습니다. 빌립보서 1:20-21에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3) 최상의 가치를 아는 자입니다.

사람마다 가치 기준이 다르지만 자기가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는 것을 붙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을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였습니다(마 16:26).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최고의 가치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8절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가치를 가장 존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모든 것을 걸고 그리스도를 붙들고자 매진합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도 더 큰 재물로 여겼기 때문에 공주의 아들의 지위를 던질 수 있었습니다(히 11:25-26).

Ⅱ. 지킬 것이 있습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서 힘차게 하늘로 비상하여 어느 정도의 안정권에까지 올라가면 그 때부터는 고도(高度)를 유지하면서 목적지를 향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에 성장과 이루어 놓은 공적이 클수록 그것을 허물려고 달려드는 세력이 많기 때문에 이것을 지키는 것 또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0:12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겁 없이 도전하는 사람도 자기가 확보해 놓은 소중한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며 이를 지키려고 합니다.

(1) 이미 받은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 가운데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말을 가장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0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은혜는 사람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게 된 것을 뜻합니다.

본문 말씀 9절에 보면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하였습니다. 10-11절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죄사유함을 받고 그의 부활의 권능에 힘입어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 엄청난 은혜인 것입니다.
이 은혜가 아니면 본래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고 사도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딤전 1:13-14).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하나님께서도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 하였습니다(고후 12:9).

(2) 주 예수께 받은 사명입니다.

핍박자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음성을 듣고 그 앞에 거꾸러졌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다메섹에 있는 선지자 아나니아에게 바울을 소개하면서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행 9:15).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두고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긍휼이요 은혜라고 믿었습니다(롬 1:1). 디모데전서 1:12에는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평생을 그 사명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매인 바 되고 말년에는 쇠사슬에 묶여 로마에까지 압송되어 갔고, 감옥생활을 하였지만(엡 6:20), 한 번도 원망하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사하게 여기면서 끝까지 그 사명을 붙들고 지키려 하였습니다. 그가 밀레도에 모인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면서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행 20:23-24).

(3)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소망에 대하여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로마서 8:24-25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받게 되는 기업의 영광을 항상 바라보며 거기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엡 1:18). 디모데후서 4:7-8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라도 행한 일이 없는 사람은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같이 받을 것이 없지만(고전 3:15),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사명에 충성한 사람은 그 받을 영광과 축복이 헤아릴 수 없이 큰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다면 평생을 믿음을 지키며 주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 가장 불쌍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고전 15:1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쌓은 공적에 따라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그리고 별과 별들의 영광으로 적절하게 예비해 놓았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5:41). 이런 축복을 끝까지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계 3:11).

Ⅲ. 반드시 버려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귀한 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대가로 지불해야 되거나 스스로 포기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가운데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나, 값진 진주를 만난 사람은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자기의 재산을 모두 팔았습니다(마 13:44-45).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깨달았을 때 이미 자기가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던 것을 배설물처럼 다 버렸습니다(8절).

(1) 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 6:24). 빌립보서 3:18-21에는 땅에 것을 생각하는 사람과 하늘에 것을 생각하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땅에 것은 육신의 소욕들로써 이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한편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사람은 세상의 것들을 멀리하며 이런 것을 포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가치로 알고 거기에 명줄을 거는 사람은 이전에 좋아 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무가치하게 여기고 이를 쉽게 던질 줄 압니다. 찬송가 102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노래한 비블리 시(G. B. Shea)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나서 이전에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세상부귀와 명예와 행복을 더 이상 자기에게 필요치 않는 것으로 알고 내버렸습니다.

(2) 언젠가는 떠날 것들입니다.

반드시 버려야 될 것에 대하여 뒤를 돌아보거나 미련을 가지는 일이 없어야 됩니다. 2005년을 마감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를 떠나 과거가 되어 버린 시간에 대해서도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한번 떠나가는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언제나 우리 앞에는 오늘보다 더 좋은 내일의 희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각의 방향도 바꾸어야 됩니다. 골로새서 3:1-2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요한1서 2:15-16에는 땅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인데 이런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세상 사람이 추구하는 모든 영화를 풀의 꽃으로 비유하면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하였습니다(사 40:8). 해가 바뀌는 역사의 전환점에서 이런 것들을 헌 옷처럼 벗어버려야 됩니다. 로마서 13:12에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하였습니다.

(3) 가장 귀한 것은 남아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오셨을 때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하여 음식을 장만하느라 분주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과 마주 앉아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자기 동생에게 명하여 언니의 하는 일을 돕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눅 10:41-42).

사람들은 좋다는 것이면 무엇이나 다 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립니다. 그러나 욕심대로 다 가질 수도 없거니와 설령 다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언제까지나 자기 것으로 남아 있지 못합니다. 오히려 가장 귀한 것 한 가지를 붙잡으면 다른 모든 것은 저절로 채워지는 법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8절). 예수가 있으면 모든 것이 있고, 예수가 없으면 모든 것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12절).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마 6:33).
(황광민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