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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 있을 곳 없는 예수 (눅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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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창세전에 이미 계셨던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의 보좌에서 만유를 통치하실 영광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존재의 시작이 아니라 존재 공간의 이동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을 입고 세상에 오신 사건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을때 있을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7절에 마지막에 보면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살펴보면 예수님은 지상에 오셨으나 있을 곳이 없으셨던 분이십니다.  쉽게 말하면 길거리에서 나서 길거리에 살다가 길거리에서 죽으시고 길 거리에서 승천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눅 9:58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그것을 증거하고 계셨습니다.

  이제 갓 태어난 예수가 있을 곳이 없어서 구유에 눕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사람들의 마음이 강팍하고 완악하였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명령으로 베들레헴에 호적신고를 하러온 수 많은 사람들의 인파 때문에 여관은 마루도 휴게실도 빈방은 없었습니다. 결국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가실 메시아로 오신 아기 예수는 외양간에 자리 잡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산월이 다 되어 해산기가 보이는 여인을 방이 없다고 길거리로 내모는 당시 베들레헴 사람들의 강팍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라고 했습니다.
  사관은 어떤 곳입니까?
  헬라어로 ‘카탈뤼마’ 라는 말인데 이 말은 흔히 여관(inn)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여관이 이미 손님들이 꽉 차서 더 이상 만삭이 된 이 부부를 들일 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관 주인이 동정심이 없어서 그랬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만 여관이 꽉 찼다는 것입니다.
  이미 돈 많고 권세 있던 사람들이 미리 예약을 해놨겠지요. 아니 요새처럼 프리미엄을 받기 위해 여관주인이 방이 있으면서도 가난해 보이는 요셉과 마리아 부부에게는 방이 없다고 거짓을 말했을 지도 모릅니다.
  어짿든 그 여관에는 아기 예수가 태어날 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리가 있는 마굿간 한 모퉁이에 자리 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마굿간이라고 표현하지만 어쩌면 양의 우리였을 것입니다. 당시 일반적으로 말은 유대인들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양의 우리에 한 편에 자리를 펴고 잠을 청하려는 그 날 밤 마리의 몸에 산기가 돌았고 결국 해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다른 것으로 꽉 차 있으면 그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마 5:3절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했습니다. 천국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기에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가난한 것이 복이 아니라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가난함 이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말쑥하게 생긴 아저씨가 도와달라며 왔습니다.
  얼마를 주려니까 누군가가 저런 사람을 상습적이기 때문에 도와주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상습적으로 게으르고 나태해서 구걸하는 그런 가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천국을 넣을 수 있으면 가난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의 가난한 사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 5:39-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가난한 마음은 완악하지 않습니다. 고집부리지 않습니다. 남을 존중하고 높일 줄 알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압니다. 위에서 예수님이 말씀한 가난한 자의 태도를 갖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강팍함이 있는 것입니다.

  2. 더러운 마음이 예수님을 있을 곳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만삭이 된 여인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들만 편하고 안락하면 되는 것입니다. 남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은 참으로 비열하고 더러운 마음입니다.

  어제 중앙일보에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말기 유방암으로 고생하는 어머니와 함께사는 여덞 살의 김가빈 양과 열세살 김보석군의 단칸셋방에 도둑이 들어서 197만원을 훔쳐갔다는 것입니다.
  가빈양의 아버지는 몇 달전에 빚보증을 서준 친구의 사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집도 날리고 하루아침에 망하게 된데다 아내마저 유방암에 걸리자 괴로워하다가 자살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병으로 고생하는 어머니와 두 남매가 근근히 살아가는 데 보석군의 학교 담임선생님과 급우들이 딱한 사정을 듣고 조금씩 모아서 어머니의 약값에 쓰라고 전달한 것인데 그 이튼 날 집을 잠간 비운 사이에 도둑이 들어서 가져가 버린 것입니다. 그 신문 기사의 제목은 “훔칠걸 훔쳐야지...” 였습니다.
 
  이 세대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다 더러워졌습니다. 마귀에게 마음들을 다 도둑맞았습니다.
  참으로 거룩하고 깨끗해야 할 마음에 마귀가 온갖 더러운 욕심의 씨를 뿌려서 예수님이 계시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갈 5:19-21절에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더러운 마음은 마굿간 보다도 더 못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왜냐면 옛날 마구간은 예수를 모셨지만 그 집 사람들의 마음은 예수를 모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는 인간의 더러운 마음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을 모신 교회였습니다. 예수를 모시지 않았다면 애당초 교회가 될 수도 없었거니와 예수님께서 관심도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 때 부터인가 예수를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닫아걸어 놓은 그들의 마음문 밖에 서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3. 그렇다면 정녕 예수님 계실 곳은 만한 곳은 어디입니까?

  ① 서로 사랑하는 마음에 계십니다.
  요일4:16절에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예수님이 계실 집입니다.

  프란시스는 이 땅에서 가장 경건하게 살다가 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교회사가인 샤프<sharp>는 “그리스도 이후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장 잘 체득한 사람은 성 프란시스였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미국의 교회사 연구가인 워커<walker>도 “성 프란시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절대적 충성을 다한 인물이었다”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길 가다가 문둥이를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움칫하였으나 그는 곧 문둥이의 손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그의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의 입은 옷은 허술하고 문둥이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의 헌데를 씻어 주었습니다. 화려한 성당은 피하고 언제나 쓰러저가는 낡은 기도원으로 예배하러 갔습니다.
  그는 언제나 찬양하며 기쁨으로 베풀어 주는 삶을 살다가 갔습니다. 그는 받으려 하지 않고 늘 베풀어 주었고 취하지 않고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사랑의 생애였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어느 곳에 비록 가난했지만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두 자매가 있었습니다. 언니는 회사를 다녔는데 항상 맡겨진 일에 충실하여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어느 해 겨울 바람이 살을 에이듯 추웠습니다. 그런데 언니의 옷차림은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추운 날은 얇은 옷을 입고, 더운 날은 두꺼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런 언니의 모습을 보다 못한 회사 직원이 아가씨 옷차림에 대해 “추울 때는 얇은 옷을 입고 포근한 날에는 두꺼운 옷을 입고 다니는지" 에 대해 물었습니다.
  아가씨는 빙그레 미소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네, 제 사랑하는 동생 때문입니다. 추운 날은 제가 얇은 옷을 입고 먼저 나가야 동생이 두꺼운 옷을 입게 될 것이고, 더운 날은 제가 두꺼운 옷을 입고 먼저 나와야 동생이 얇은 옷을 입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모실 곳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마음에 예수님은 계신다.
  요한복음 8:29절에 보면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하시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면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삼상 2:30절 끝에 보면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김지하씨가 쓴 “금관의 예수”라는 글이 있습니다. 읽은지 오래되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성탄절에 수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모였습니다. 저마다 가장 귀하고 좋은 것들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드는 것이기에 아주 값비싼 재료를 사용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사랑하는 주님이시기에 최고의 정성 최고의 헌신을 다했습니다.
  머리에는 금관을 쒸우고 눈은 다이아몬드를 박아서 환히 밝힌 성탄 츄리의 불빛을 받아서 빛이 나왔습니다.    몸에는 값비싼 장식품들로 장식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금년 성탄절은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실거라며 그 앞에서 성탄 축하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의 장식이 껄끄러웠습니다. 머리에 쓴 금관도 무겁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눈은 바로 교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어느 가난한 처녀의 집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처녀는 병든 어머니를 치료하기 위해 밤에는 술집에 나가고 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비난했습니다. 밤의 여자 더러운 여자라고 정죄 했습니다. 심지어 교회 사람들 마저도 그녀를 비난하기만 했지 그 누구도 그녀의 형편과 그녀의 아픔과 그녀의 고통에 대해 관심 가져 주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동상에 금으로 된 면류관을 쒸우고 온갖 비싼 것으로 다 장식해 놓고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양했지만 예수님의 눈은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젣 밤에도 온갖 남자들의 희롱거리가 되어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여자를 향해 울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이번 성탄절에는 주님이 우시지 않을까요?
  멸망당할 예루살렘을 향해 향해 우셨던 것처럼 지금 주님의 마음을 모르고 예수님의 동상에 금관을 쒸우고 좋아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며 말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란 “영혼 구원입니다.” 즉 죄악 중에 죽어가는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 일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예수가 죽기 위해서 오신 날입니다.
 
  분명히 성탄절에 고난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아기 예수를 처음 만난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눅 2:34-35절에 보면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라고 했습니다.
  칼이 네 맘을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있을 것이라는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고난과 죽으심을 마리아가 목격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 성탄절에는 우리가 예수님의 울음을 울어야합니다. 영혼을 위해서... 이 땅의 혼자 우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함께 울고 그들의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다면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까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 함께하시고 그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하늘나라의 상급과 연결되어있습니다.

  웅장한 집에 살던 한 부자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집은 비가 새는 허름한 오두막이었습니다. 마침내 그 옆에 으리으리한 대저택이 건축되고 있어서 부자가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저 웅장한 집은 누구의 것입니까? "
  "당신의 옆집에 살고 있는 가난한 의사가 살집입니다." 라고 천사가 말했습니다.
  부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의사는 동네에서 아주 조그마한 병원을 운영하는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의사는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의 질병을 무료로 치료하느라 평생 돈을 모으지 못했습니다.
  천사는 놀란 표정을 짓는 부자를 향해 말했습니다.
  "땅에서 쌓은 선행들은 모두 하늘나라로 배달됩니다. 당신의 선행은 오두막의 지붕을 쒸우기에도 부족 한 정도예요. 당신은 자신을 위해서만 살았어요. 그러나 저 의사는 평생 동안 남에게 사랑을 베풀어요. 그가 베푼 사랑은 저렇게 대 저택을 짓고도 남을 분량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성탄절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합시다.
  첫 성탄절에 예수님이 오셨으나 잇을 곳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성령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오셨습니다. 마음에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모셨지만 불편하게 해드리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강팍하고 완악한 마음 자신만 아는 이기심과 욕심으로 가득한 더러운 마음에는 예수님이 계실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힘쓰는 마음과 영원토록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을 사랑합시다.
  주님이 기뻐하실 일을 힘써 행합시다. 그러면 하늘의 영원한 상급과 영원히 함께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백재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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