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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민 1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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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자주 쓰는 말 가운데서 '당연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연하다는 말은 '마땅히 그러하다'라는 말인데, 우리는 '당연히 그래야지. 당연하지. 당연한 거 아냐?' 이런 말을 참 많이 씁니다. 실제로, 마땅히 그러한 경우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말을 쓰기보다는, 그냥 무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많이 쓰기도 하고, 당연하지 않은 경우에도 당연하다는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이런 경우가 될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아내의 수고에 대해서 너무 당연하게 여깁니다. 가족 식구들을 위해서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고, 빨래를 하고 집안을 정리하는 일이 참 큰 수고인데, 남편들은 아내의 그런 수고에 대해서 너무 당연하게 여기면서 '나는 밖에 나가서 돈 벌어 오니까, 당신은 집에서 집안일 하는 거는 당연한 거 아냐?'이렇게 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이 그렇게 아내의 수고를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길 때 아내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어떤 글을 보니까, 주부들이 일생 동안 가족을 위해 수고하는 양에 대해서 적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밥을 짓는 횟수는 평균 3만 5천번이고, 빨래를 하는 양은 2톤 트럭으로 200대 분량이고 이불을 정리하는 횟수는 평균 2만 번이고, 그런 통계자료를 내놓으면서 주부의 가사 노동을 돈으로 환산하면 132만 3천원 정도가 된다는 글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자료에 보니까, 주부들의 하루 임금은 6만 5천원 정도가 되기 때문에, 한달 임금은 195만원에 이른다는 자료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돈으로 계산했을 때의 그 가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집안에서 그만큼 많은 수고를 하고 있는데, 그 수고에 대해서 당연하게만 생각해 버린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쩌다가 남편이 집안일을 도와주게 될 때도 그렇습니다. 집안일을 어쩌다가 좀 도와주고 난 후에, 그러고 나서, 남편은 아내에게 뭐라고 말을 하느냐면, '내가 집안 일을 해줬다'라고 말을 합니다. 남편들은 집안일을 한 것이 아니라, 집안일을 해줬다는 표현을 씁니다. 왜냐하면, 집안일은 당연히 아내의 몫이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아내는 뭐라고 하느냐면, '당연히 집안일을 남편이 도와줘야지, 그럼 여자 혼자서 집안일을 다 하느냐, 요즘 남편들이 당연히 집안일을 같이 해야지, 안 그러면 요즘은 다 이혼한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남편은 자신은 밖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벌어 오니까, 집안일은 당연히 아내의 몫이라고 생각을 하고, 절대로 집안일이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아내 역시 집안일 하기 위해서 시집온 것도 아니고, 청소하고 설거지 하는 것 외에도 아이들 학교에 보내야 하고, 이것저것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음식 쓰레기를 버린다든지 청소 정도는 당연히 같이 도와서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그것은 당신이 해야지.' '그건 여자가 하는 것이 당연하지.' '당연히 그건 남자가 해야지.' 그런 말들을 사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열 두 정탐꾼에 관한 말씀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그 땅이 어떠한 곳인지 각 지파에서 한 명씩 뽑아서 열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40일 동안의 정탐을 마치고 정탐꾼들이 보고회를 가졌습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관심을 갖고 모두 몰려들었습니다. 정탐꾼들이 입을 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고 아름답고 좋은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땅에 살고 있는 백성은 너무나도 강하고, 성읍들은 견고한 요새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나안 땅에 당연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10명의 정탐꾼들, 그들이 말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연히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연히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 있어서 그것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당연히 들어갈 수 없다고 했던 10명의 정탐꾼들은 잘못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는 장대한 아낙 자손들이 있고, 그들과 비교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뚜기같이 밖에 안 보이니까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당연히 여겼던 그 생각은 완전히 깨어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처럼, 우리의 생각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한 번 꺼내서 정말 당연한 것이 맞는지 한 번 질문을 해보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데, 우리가 지금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까? 마땅히 살아 있어야 할 사람이라서 우리가 살아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지금 질병을 앓고,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누워 있지 않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까? 우리가 건강한 것이 당연히 건강한 것입니까? 절대로 당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지켜 보호해 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어제 잠자리에 들었다가 오늘 못 일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아침에 갑자기 건강을 잃고 뇌출혈로 쓰러질 수도 있었고, 이 자리에 나오면서 차에 치어서 유명을 달리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어제도 살았으니까, 오늘도 당연히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있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쉽게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도 당연한 것이고, 사지 멀쩡하게 건강한 것도 당연힌 건강한 것이고, 남편이 정상적으로 직장생활을 하고, 자녀가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니는 것에 대해서도 그냥 당연시 여깁니다.

  티비를 보게 되면, 정말 어려운 우리의 이웃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와 같은 프로를 보면,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서 버림받고 혼자서 어렵게 자라서, 그 모습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돈이 보인다'라는 프로를 보면, 쪽박집 대박집이 나오는데, 쪽박집을 보면, 정말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식당마저도 장사가 안 돼서 어려움 당하는 집도 수없이 나옵니다. '러브 하우스'를 봐도 정말 집이 다 쓰러져 가고 '어떻게 저런 집에서 사람이 살 수가 있을까' 생각될 만큼 어려운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 같이 추운 겨울에 돈이 없어서 전기세도 못 내고, 가스비도 못 내서 냉골에서 겨울을 나는 그런 안타까운 우리 이웃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도, 우리에게 당한 상황들을 당연한 것으로만 여깁니다. '티비에 나오는 저 사람들은 어쩌다 저렇게 어렵게 됐고, 참 딱하기는 한데, 그래도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내가 열심히 부지런하게 살았고, 나름대로 건강관리도 했으니까, 남편이 벌어오는 돈을 가지고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고, 은혜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가 이어집니까? 당연하게만 생각하고, 은혜로 여기지 않으니까 감사를 모릅니다. 당연하게 여기니까 감사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당연하다고 모든 것을 덮어놓고 얘기를 해버리게 되면, 더 이상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게 될 때입니다. 생각해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감사할 수 있는데,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덮어 놓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니까, 감사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고,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까? 당연히 내가 천국가기로 예정되어 있던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이 당연히 나를 구하러 이 땅에 오셔야 했고, 당연히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면서 죽으셔야 했고, 그 결과 당연히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내가 뭐 하나라도 잘난 것이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조건들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아내와 남편의 집안일에 관한 부분도 그렇습니다. 서로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면 마찰만 생기고, 화목한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화목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남편은 집안일은 당연히 아내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귀하게 여기면서, 아내를 도와서 같이 집안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도 당연히 집안일을 해야 한다고 여길 것이 아니라, '바깥일 하기도 힘들텐데, 집안일을 도와주기까지 하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렇게 생각을 해야 그것이 올바른 모습입니다.

  어떤 분은 집에서 집안일은 절대로 손도 안 대시는 분도 계시는데 저는 그래도 나름대로 집안일을 좀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집안일을 해도 집사람이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제 딴에는 그래도 생각해서 집안일을 해주는 것이니까, 제가 집안일을 도와주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좀 감사하게 여겨줬으면 좋겠는데, 별로 그렇지를 못한 것 같습니다. 물론, 몸이 무거우니까, 당연히 남편이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모습을 보면서 좀 섭섭한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들을 위해서 일하시고, 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은혜로 여기지 못하고, 늘 당연하게만 생각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결코 기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연하게 여기지 않아야 은혜를 알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야 하는데,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게 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그들은 당연히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부정적인 그 상황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자신들의 부정적인 상황을 당연하게 여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결과 그들은 정말 그들의 생각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을 부정적으로 당연시 할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받아들였다면, 그들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을텐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를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당연히 나는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자신을 제한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로 쓰는 말은 당연하다는 말 외에 '원래'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난 원래 그래.' '원래 그런데 뭐.' 이런 말을 자주 쓰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도전을 전혀 시도하지 않습니다.

  부부간에도 보면, 사실, 부부라는 것이 다 알고 결혼한 것도 아니고, 자기에게 딱 맞는 사람과 결혼한 것도 아니고, 결혼해서 서로를 좀 더 알아가고, 서로에게 맞춰가고,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해 주는 것이 부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좋은 마음으로 '당신은 다 좋은데 이런 부분이 좀 그런 것 같애. 이런 부분만 좀 고치면 좋을 것 같애.' 그렇게 좋게 말을 시작했는데, 그 대화가 단절이 돼버릴 때가 언제입니까? '난 원래 그래.' 이렇게 말해 버릴 때입니다.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좀 고쳐나가려고 노력만 하면 될텐데, 난 원래 그렇고, 이렇게 살아왔으니까 당연히 이렇게 살아갈 거라고 해버리게 되면, 참 답답한 노릇이 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처한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보다 긍정적이고 높은 생각을 갖고 도전하는 것이 옳은 모습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한 소경이 나옵니다. 그 소경은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소경 거지가 그가 처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눈 먼자를 뜨게 하고, 죽은 사람도 살리시는 예수님께서 지나가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소경이 어떻게 했습니까? '난 원래 소경으로 태어났고, 앞을 볼 수 없으니까 당연히 일을 할 수 없고, 그러니까, 당연히 그냥 동냥이나 해서 먹고 사는 거지, 내가 뭘 기대할 수 있겠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당연히 여겨왔던 자신의 삶을 거부하기 시작합니다. 이대로 살수만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빌어먹는 인생으로 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에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는 그 외침에는 "예수님, 나는 이제 더 이상 소경 거지인생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처한 소경 거지라는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절규의 외침이었습니다.

  그 외침이 있었기 때문에, 그 소경 거지는 눈을 뜰 수가 있었고, 새로운 인생을 살수가 있었음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원래 이것밖에 안 돼.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는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나는 원래 뚱뚱해.'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을 포기하고 계신다거나, '나는 원래 소심해. 이게 당연한 내 모습이야.'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제는 '원래, 당연히' 이런 말들은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지 않아야 하는데,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면 믿음의 새로운 시각이 열리지 않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당연히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 자신들의 그 생각을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편견을 가졌던 것입니다. 비록, 그들은 강대한 민족이고, 우리는 메뚜기 같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홍해도 가르시고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그 가능성에 대해서 시각을 열어뒀어야 하는데, 그들은 당연히 들어갈 수 없다는 하나의 시각만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두 명의 정탐꾼,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믿음의 새로운 시각이 열릴 수 없었습니다.

  열 두 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의 모든 곳을 똑같이 봤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의 안 좋은 곳만 보고 오고, 두 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의 좋은 곳만 보고 왔기 때문에 서로 다른 보고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똑같이 똑같은 곳을 다 봤지만, 그들의 보는 시각이 달랐습니다. 한쪽은 도저히 들어갈 수 없다는 편견을 갖고 보았고, 한쪽은 믿음의 시각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당연한 것들을 너무 많이 설정해 놓고 살아갑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나 일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많은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인데도, 그건 안 된다는 편견을 갖고 있으니까, 그것 때문에 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교회학교에서도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새로운 일을 해보려고 제안을 하면, 꼭 걸고넘어지는 분이 있습니다. 그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작년에도 해봤고, 전에 그렇게 해본 적이 있는데, 그건 해봐도 안 된다는 얘기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이 있으면 일이 되지 않습니다. 그 일은 정말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당연히 안 된다는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못하는 것 뿐이지, 편견을 깨트리고 새로운 믿음의 시각을 갖고 일하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사람에 대해서 쉽게 판단해 버리고, 그 편견을 갖고 평생 그 사람을 자신의 편협한 판단대로 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친구에게 책을 한 권 빌려줬는데, 그 친구가 어쩌다가 책을 못 돌려주게 되면, 그 친구에 대해서 그 놈은 물건을 빌려주면 절대로 안 돌려주는 놈이고, 절대로 뭘 빌려줘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판단을 내리고 한 평생 그 사람을 그렇게 대합니다. 한 번 어쩌다가 물건을 훔친 사람은, 그 이후에 회개하고, 아무리 천사같은 삶을 살아도, 그 사람의 기억에는 도둑놈으로만 기억하지, 절대로 천사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편견이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이런 편견들은 모두 우리의 시각을 제한시켜 버립니다. 편견을 깨트리고 보면 더 많이, 더 넓고, 더 새로운 것을 볼 수가 있는데, '당연히'라는 말과 함께 우리의 눈을 덮어 버리니까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어떤 글을 보니까 "의심하지 않아도 좋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확인하지 않고 확신해버리는 것은 가장 나쁜 습관이다. 가장 간단하고, 가장 당연한 것이 문제의 원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연히라는 말과 함께 확인해 보지도 않고 확신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정말 당연히 그런 것일까 그렇게 의심을 해보면,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은 나의 편견이었고,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의심하고 편견을 버려야, 열 명의 정탐꾼과 같이 닫혀 있는 시각이 깨트려지고,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믿음의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지금까지 너무 쉽게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살아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지금 큰 어려움 없이 사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의 제목인데, 우리는 너무 당연한 것으로만 여기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감사한 줄도 모르고 살아왔는데, 돌아보면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의 제목들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이것밖에 안 돼. 그렇게 나 자신의 형편을 제한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나은 삶을 살지 못하고, 늘 같은 삶을 반복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각이 열려져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신 보다 나은 삶을 바라보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더 큰 비전을 바라볼 수 있어야 되는데, 우리가 편견을 갖고 당연히라는 말로 우리의 눈을 닫아 버리고 있으니까, 더 큰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연히 구원 받아야 할 사람도 아무도 없고, 당연히 지옥에 가야할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살아 있다고 해서 당연히 내일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의 형편이 어렵다고 해서 당연히 내일도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당연하게 여기면서 살아가게 되면, 그것은 중요한 것을 놓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보다 의미 있고, 새로운 인생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것에 대해서 이제는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여기는 생각의 전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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