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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눅 1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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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도 벌써 다 지나갔습니다. 금년 일 년만이 아니라 백년, 아니 천년을 반성해 보아야 하는 시점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한 청지기가 등장합니다. 청지기란 아주 묘한 직책입니다. 주인에게는 종이요, 다른 종에게는 주인입니다. 주인으로 위임받은 권한을 가지고 주인행세 하는 것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주인을 대할 때에는 충성을 다해야 할 타율적 복종적 위치에 있습니다. 주인의 뜻을 온전히 받들어 시행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주어진 권한 안에서 그 휘하의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고, 많은 재산을 나름대로 관리하는 등의 상당한 자율권도 있습니다. 이렇듯 청지기는 자율과 타율, 그 긴장관계를 오갈 수 있는 중요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한계 안에서의 자유를 향유해야합니다.

나아가 주어진 바 한계 안에서 신문을 받습니다. 할 수 없었던 일을 들어 문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일을 안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모르는 일을 가지고 묻지 않습니다. 알고 있는 일을 묻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일에 대하여 우리는 문책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건강,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 나아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 정력, 지위, 권한, 할 수 있었던 일… 이러한 주어진 자유의 한계 안에서 우리는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서 문책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보던 일을 셈하라(2절)"
주인이 청지기에게 그 동안 하던 일을 셈하라고 명합니다. 이 결정적 종말론적 시간에 그는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윤리적 선입견으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종말론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이 사람, 청지기 노릇을 하다가 어느 순간 자율의 한계를 넘어 주인의 뜻을 어기고 돈을 멋대로 관리한 것 같습니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해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주인이 책망을 합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된 것이냐고 묻습니다.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명합니다. 이렇게 주인의 명령이 떨어질 때에 이 사람은 생각합니다.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그는 궁리 끝에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낱낱이 불러들입니다. 먼저 온 사람에게 묻습니다.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냐?" "기름 백 말이니이다"라고 대답하는 그에게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이렇듯 청지기는 주인의 돈을 가지고 인심을 씁니다. 요새로 치면 이는 공문서위조에 횡령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 청지기는 지금 인심을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청지기는 나쁜 사람입니다. 그 동안 숱하게 주인을 속여왔습니다. 진실하지도 못하고 부지런하지도 못하고 성실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 맨 마지막 구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8절)"- 주인이 그 청지기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 청지기는 진실하지도 부지런하지도 못한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칭찬을 받았습니다. 칭찬 받은 이유가 '지혜' 때문입니다.
진실하지도 못하고, 부지런하지도 못하고, 성실하지도 못한데, 게다가 문서를 위조하여 주인에게 엄청난 손해를 끼쳤는데도 이 청지기가 칭찬 받게 된 그 "지혜"가 어떤 것일까요?

첫째, 이 청지기가 주인을 기억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청지기에게는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그 주인은 이 청지기에게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 아무 의미 없는 존재였습니다. 주인이 지금까지 한번도 그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을 잊고 내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주인이 계산하자고 합니다. 그때 "아차 내게 주인이 있었구나! 이것이 내 것이 아니구나!"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이 땅에 내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돈이 내 것입니까? 건강이 내 것입니까? 지혜가 내 것입니까?
돈도 잠깐 나에게 맡겨져 있는 것 뿐입니다. 지금 건강한 것 같지만, 건강과는 점점 멀어져 갈 것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총명한 사람도 가는 세월 앞에서는 다 소용이 없습니다. 내 것이 없습니다. 사실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청지기는 깨달았습니다.

실러는 시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시간의 걸음을 세는 방법은 세 가지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 있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간다.' 현재라고 하는 시간은 쏜 화살처럼 빨리 지나갑니다. 결국은 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얼마나 확실하게 인정하고 살아갑니까?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좀 오래된 유행가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냥 나에게 맡겨 주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이 노래처럼 현대인들을 가장 매혹시키는 가치관이 '내 인생의 주인은 나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사상에 물들어 있습니다. 인간을 만물의 으뜸으로, 최고로, 주인으로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서운 착각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인정하고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는지 아십니까?
이런 사람을 가리켜 "실천적 무신론자"라고 합니다. 관념 속에, 이론 속에, 기도할 때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실제 행동 속에서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디도서1장 16절에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생각과 행동, 관념과 삶, 말과 행위가 일치해야합니다. 그것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우리의 말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요한계시록에도 보면,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는 말씀이 수 차례 나옵니다. 어떤 말을 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행동을 했느냐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십니까?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행동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신이 잘못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청지기는 주인이 "네 보던 일을 셈하자"고 했을 때, 그 동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반성했다는 것이 이 청지기의 지혜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음미되지 않는 인생은 살 보람이 없다". 평가되고 반성되지 않은 인생은 살 가치조차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여러분의 삶을 진지하게 점검하십니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으면, 바르게 살고 있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삶의 방향, 삶의 목적까지도 상실하기 쉽습니다.
정채봉 선생의 저서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60년대에, 서울로 올라온 한 시골청년이 서울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고향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띄웁니다. '서울 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오직 일자리를 구하는 데에 있는 것 같다. 모두가 일자리를 찾느라 애쓰고 있다.'
70년대에 들어서 이 청년은 다시 고향친구에게 편지를 합니다. '서울 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돈에 있는 것 같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눈에 비친 서울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80년대에 들어서자 이 청년은 친구에게 다시 편지를 합니다. '지금 서울 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권력에 있는 것 같다. 권력을 잡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한다. 권력이면 모든 일이 다 될 것처럼 생각한 나머지 그 권력을 잡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쓴다'.
90년대에 들어서서 다시 편지를 합니다. '서울 사람들의 사는 모습은 곧 스피드다.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단 1분의 시간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달린다.'
시골에 있는 친구가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답장을 보냅니다. 그 편지에는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벌어들인 그 1분이라고 하는 시간을 어디에 쓰고 있는지 알려주기 바라네.'
서울에 있는 친구는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고 합니다. '그 1분을 다방에서 차 마시며 노닥거리고, 텔레비전 보고 고스톱 치고, 입 벌리고 조는 데에 쓴다네.'

여러분은 돈을 벌기 위하여, 권력을 얻기 위하여, 지위를 얻기 위하여 그렇게 바삐 뛰어다녀서 얻어놓은 그 1분을 어디에 쓰고 있습니까? 그 최종목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래서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사람들의 지혜를 모아놓은 「탈무드」는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에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히브리말로 '키소, 코소, 카소'라고 하는데, 첫째인 키소는 돈을 넣는 주머니를 말합니다.
도대체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고 있느냐가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됩니다.
도대체 우리는 1년 동안 돈을 어디에다 어떤 기준으로 썼습니까? 우리의 가계부는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돈을 어떻게 쓰느냐-이것이 바로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바로미터입니다. 존 웨슬리도 사람의 진정한 회개는 지갑의 회개라고 했습니다. 돈을 쓰는 우선 순위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판단됩니다.

두 번째 '코소'는 술잔으로, 향락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즐기고 있느냐? 무엇에 빠져 있느냐? 무엇이 내 마음을 빼앗아버렸느냐? 이것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여러분이 가장 소중하게 즐겼던 일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세 번째, '카소'는 사람의 노여움을 가리킵니다.
인내력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얼마나 억제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내력은 얼마나 성장하였습니까? 대체로 우리가 가지는 고통 가운데 가장 참을 수 없는 고통이 후회라고 합니다. 그 때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때 그 길로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가 참으로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왔습니까? 무엇인가 바쁘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녔는데, 돈을 위해서, 명예를 위해서, 또는 내가 이 모든 것의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뛰어다니지는 않았습니까?

오늘 본문의 청지기는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고 "잘 못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것이 실패가 아니라 "자신이 주인인 줄 착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했다"는 것이 실패였습니다. 주어진 것을 가지고 자기의 유익,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데 모두 사용했다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가 농사를 지었는데, 풍년이 들었습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곡간으로는 이 모든 것을 다 보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곡간을 더 크게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곡식들을 곡간마다 가득 가득히 쌓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9절)" 그 때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 부자가 왜 어리석은 자입니까? 이 부자가 왜 실패한 사람입니까?
그것이 자기 것으로 알았다는 것에서 이 사람의 실패의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공이 무엇입니까? 얼마나 돈을 모았느냐 입니까? 얼마나 명예가 올라가고, 권력을 누리느냐 입니까?
아닙니다. 진짜 성공은 그것을 어떻게 썼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물질을 사용했느냐?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사회에 어떤 유익을 주었는가? 이것이 성공의 가늠자입니다.

트루엇 박사가 텍사스에서 석유사업을 하는 어느 부유한 가정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식사 후에 이 주인이 박사에게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25년 전에 빈손으로 이 마을에 들어왔습니다. 무진 고생과 노력으로 지금은 이렇게 부자가 되었습니다. 저 동쪽에 있는 석유공장도 제 것이고, 서쪽에 있는 유전도 제 것입니다. 남쪽에 있는 건물도 제 것이고, 북쪽에 있는 고층건물도 제 것입니다." 하고 주위를 삥 둘러보며 지나치다 싶게 자랑을 하더랍니다. 그러자 트루엇 박사가 손가락을 하늘로 향해 처 들면서 "동서남북 다 당신 것들인데, 하늘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늘에 쌓아놓은 것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면, 하나님께서 너 이 땅에 살면서 얼마가지고 살았느냐? 이렇게 물어보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나 나를 위해서 사용했느냐? 얼마나 가장 선한 일, 가장 의로운 일, 가장 긍휼을 베푸는 일에 썼느냐?" 이것을 물어볼 것입니다.
이 때 떳떳하게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성공자인 줄 믿습니다.

셋째, 이 청지기는 남아 있는 시간을 선용했습니다.

청지기는 남아있는 시간, 남아있는 기회, 남아있는 권한을 최선으로 사용했습니다. 여기에 지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못했던 것, 실패했던 것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지나간 것에 미련을 두지 않고, 주인이 셈하라고 주신 그 시간을 잘 이용했습니다.

어느 날 한 상담소에 한 중년부인이 찾아왔습니다. 상담원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부인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울기만 했습니다. "말씀을 하셔야 제가 조언을 해드리지요"하는 상담원의 말에 그 부인은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말하는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청춘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훌륭한 상담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청춘을 되돌려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상담 선생님이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잃어버린 청춘을 생각하지 말고, 아직도 손에 쥐고 있는 중년을 생각하십시오. 당신은 아직도 할 일이 많습니다. 아직도 멀쩡해요. 꼭 청춘이라야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해야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현재를 소중히 여겨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 해를 돌이켜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까지 살아온 생이 옳았는지 그릇됐는지를 생각하고, 냉정하게 비판도 해보십시오. 잃어버린 청춘, 잃어버린 기회에 대해서는 더 이상 연연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나간 천년보다 지금 남아 있는 한 달이 더 소중합니다. 지나간 열 한달 보다 지금 남아 있는 몇 일이 더 중요합니다. 내가 숨쉬고 있고, 엄연히 내게 맑은 정신이 있고, 건강이 있습니다. 해야할 일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어느 일본 작가가 쓴 소설에 보면 위암으로 6개월 진단을 받은 주인공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6개월 후에 당신은 죽을 것이오"하는 의사의 말을 듣고 이 사람이 술을 마시고 방탕하기 시작합니다. 생전 안 가던 술집에 가서 안 하던 짓을 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한 어린이의 말을 통해서 "내게는 아직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남은 6개월을 가장 뜻 있게 보낸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제 남은 마지막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하겠습니까? 만약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할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 청지기는 주인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여기에 나오는 주인은 착한 사람입니다. 그 주인은 청지기가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횡령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 그 긍휼을 베푸는 마음을 기특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왜 내 재산을 가지고 못된 짓을 하느냐고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옳지 않은 청지기가 지혜롭게 했음을 칭찬했습니다. 이렇듯 주인은 자비를 아는 분이요, 긍휼이 많은 분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재산, 우리에게 있는 지식, 권력, 명예 이런 것들을 가난하고, 못 배우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시기를 원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횡령하고 문서를 위조한 이런 방법들이 잘못되었지만,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 그 긍휼을 베푸는 마음을 기특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이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 "너는 청지기로서의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내가 너에게 맡긴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느냐?" 는 것을 묻고 있습니다.
위대한 성가를 많이 작곡했던 조셉 하이든(Joseph Hyden)에게 하루는 어떤 사람이 "당신은 그 놀라운 음악을 작곡하는 영감을 어디에서 얻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하이든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내게 지혜를 주셔서 내가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작곡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음악을 주님 앞에 드릴 것입니다'고 기도합니다."
그가 작곡한 곡 가운데 유명한 곡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지창조"입니다. 성경의 창세기와 존 밀톤(John Milton)의 「실락원」에서 영감을 얻어 그는 이 위대한 "천지창조"를 작곡했습니다.

이 곡이 비엔나에서 공연하게 되던 날입니다. 그때 하이든은 몸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래서 이 위대한 곡이 공연될 때 그는 환자로서 뒤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 날 지휘를 하던 지휘자는 정말 놀랍게 이 음악을 하나님 앞에서 지휘했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서서 지휘자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때 지휘자는 청중들의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뒷 자석 발코니에 앉아 있는 하이든을 가리켰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입니다. 저 분이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돌려서 하이든을 바라보며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이든이 갑자기 청중들을 중단시키면서 말합니다. "아닙니다."
그는 하늘을 가리키면서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분이 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자신이 처한 현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해야할 일이 무엇이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 지금 있는 것으로, 지금 있는 기회로, 지금 있는 재물로 맡겨 주신 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청지기의 지혜입니다.

서두에서 오늘 본문 윤리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것을 다루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성실하게 살지 못했을지라도,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합니다.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마지막 한번의 기회가 남았습니다. 여기서도 잘못하면 영원히 실패하는 것입니다.

금년의 마지막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20세기의 마지막이 눈앞에 와 있습니다.
저는 성전 건축하는 일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남은 시간, 또 실패할 수 없습니다. 또 잘 못살았다고 후회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 승리합시다. 마지막에 지혜롭게 행동합니다. 마지막에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시다. 그분에게 영광이 되는 삶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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