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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경건 (약 1: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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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야고보서는 ‘사나운 느낌을 주는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에는 짧고 단정적인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그 문장이 군대의 명령어와 같은 느낌을 줍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떨까요?’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입니다.
‘우리는 실천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가 아닙니다.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과격한 느낌을 주는 표현들도 여러 군데 나옵니다.
그리고 부자들을 냅다 공격합니다.

야고보서는 ‘사회복음 운동의 교과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회 개량에 앞장서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우리가 알기 쉬운 말로하면 개혁파들, 진보그룹이 제일 좋아하는 성경이 야고보서입니다.
이와 같은 야고보서에 보석처럼 박혀서 반짝, 반짝, 반짝, 빛을 내고 있는 단어가 오늘 본문의 뒷부분에 있습니다.
어떤 단어라고 생각하십니까?
힌트를 드리면 26절과 27절에 있습니다. 같은 단어인데 세 군데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경건”이라는 단어입니다.
26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저는 우선 야고보서에 경건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사실에서 많은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에는 사회참여 운동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졸업한 학교도 그와 같은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학교입니다.
그래서 선배, 후배들 가운데 그와 같은 일을 앞장서서 하는 이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분들의 세계도 어느 정도 알고 있고, 같이 일하자는 제의도 종종 받습니다.
그 분들이 하는 일, 귀한 일입니다. 
그 분들의 날카로운 안목이나 용기, 감탄을 하게 됩니다.
이전 정권에서는 사회참여운동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은 분들도 많았습니다.
반대로 지금 정권에서는 그런 분들 가운데 정부 외곽기관의 주요한 책임을 맡고 있는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의 말이나 행동을 볼 때,  경건에 더욱 힘썼으면 하는 아쉬움을 주는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심지어는 성직자의 신분이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경건인 술과 담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분들도 여럿 있습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경건을 바탕으로 하고서 사회참여 활동을 하면 훨씬 더 효과적인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 그런 계통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성경인 야고보서에  경건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경건이 무엇입니까?
‘네, 경건은 목양교회의 비전에 첫 번째로 나오는 말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성도가 계실지 모르겠는데 그것도 맞는 대답입니다.
저는 국어사전, 성경용어사전, 그리고 여러 책자에서 경건이라는 말의 풀이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국어사전에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깊이 삼가고 조심함’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책자들의 풀이를 소개해 드리면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보여야 할 거룩함’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드리고자 하는 절대귀의의 감정이나 의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생활’
‘기독교인의 내적 신뢰와 공경심과 평안이 외적으로 그의 언행, 심사 전반에 나타나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
‘하나님께 헌신하는 마음으로 공경하고 봉사하는 것’
여러 가지입니다.
다 좋은 정의들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보여야 할 거룩함’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드리고자 하는 절대귀의의 감정이나 의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생활’
‘기독교인의 내적 신뢰와 공경심과 평안이 외적으로 그의 언행, 심사 전반에 나타나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
‘하나님께 헌신하는 마음으로 공경하고 봉사하는 것’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경건은 바로 신앙생활  자체를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 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경건은 신앙생활 그 자체이다.

설교의 본문이 정해지면 우선 그 본문을 여러 번 읽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다른 여러 종류의 번역으로 그 본문을 읽습니다.
이번에 그 과정을 거치다가 의외로 여러 성경이 오늘 본문의 “경건”을 “신앙,” 또는 “신앙생활”로 번역한 것을 보고 조금 놀랐습니다.
「공동번역성서 개정판」은 이 경건이라는 말을 모두 “신앙생활”로 번역했습니다.
26절과 27절을 「공동번역성서 개정판」으로 읽어 드립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신앙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혀를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지신을 속이는 셈이니 그의 신앙 생활은 결국 헛것이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

「표준새번역개정판」도 마찬가지입니다.
「표준새번역개정판」은 일부를 ‘신앙’이라는 말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26절을 「표준새번역개정판」으로 읽어 드립니다.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영어성경을 보니까 영어 성경 가운데 가장 기초가 되고 권위가 있는 성경이 King James Version인데 이 성경을 을 비롯하여 여러 영어 번역들이 이 경건이라는 말을 ‘religion,’ ‘종교’라는 말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경건은 신앙 그 자체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초입니다.
성도가 경건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학생은 우선 공부를 잘 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학생활동을 열심히 하느라고 히브리어 공부를 안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지난 9월에 배철현 목사님이 히브리어 강좌를 개설했습니다.
저의 아내가 거기 등록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지난 9월에 러시아 선교출장을 같이 갔는데 교재를 가지고 가서 숙소에서 예습하고 복습하고 야단이었습니다.
저에게 이것, 저것 물어보는데 제 대답은 ‘나 몰라!’ 그러면 아내가 제 얼굴을 빤히 보는데 ‘무슨 목사가 이래?’ 나가서 ‘무슨 신학박사가 이 모양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얼른 그 자리를 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몇 주일 전에 모교에 가서 채플설교를 하면서 이 이야기를 하면서 학생 때 공부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이렇게 머리가 희어진 다음에도 망신당한다고 했더니 학생들이 웃으면서도 심각하게 듣더군요. 
그 히브리어 강좌, 두 주일 전에 종강을 했는데 종강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경건이 기초가 되지 않은 신앙은 이렇게 망신당하는 일이 많습니다.

경건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경건이라는 말의 뜻을 바로 알고 이 말을 듣고, 또 써야합니다.
그리고 저희 교회의 비전 첫 번째 ‘경건의 모범을 보이는 교회’ 이 말의 뜻을 바로 알아야합니다.
여기에는 주일예배를 비롯해서 모든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전도 열심히 하고, 성경 많이 읽고, 열심히 섬기고, 나누고, 교제에 힘쓰고, 이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교회 또는 신앙생활이 삼각형이라면 경건은 그 밑변입니다.
목양교회 비전의 첫 번째를 ‘경건의 모범을 보이는 교회;라고 한 것은 교회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것은 모범적으로 갖추고 그 다음에 북한선교도 하고 기독교문화운동도 하자는 것입니다.

경건이라는 말의 뜻을 바로 알고, 경건에 힘쓰고, 경건의 모범을 보이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두 경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26절을 보세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아 사람의 경건은 헛 것이라”
헛 경건이 있습니다.

27절을 보세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 경건이 참 경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나는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경건은 헛 경건입니다.

이번에 감리교에서 서기훈 목사님이라는 분과 최인규 권사님이라는 분을 순교자로 인정했다는 보도가 감리교 신문인 「기독교타임즈」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이미 순교자로 여러 기록에 올라와 있는 분인데 이제 와서 인정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서기훈 목사님은 6․25 때 철원지방에서 목회하다가 공산당에게 순교당한 분입니다.
최인규 권사님은 일제 통치시대에 삼척 지방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순교한 분입니다.
이 분이 감옥에 갇혀 고생하고 있을 때 친구가 경찰서장을 찾아가서 ‘내가 최인규라는 사람을 잘 아는데 그는 정신이 좀 이상했는데 예수 믿고 낳은 사람입니다. 그 정신병이 재발해서 그러는 것이니 그리 알고 석방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경찰서장은 눈을 똑바로 뜨고 ‘아니오, 최인규는 미치지 않았소. 그는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이오. 믿으려면 최인규처럼 믿으시오.’ 했다고 합니다.
그는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자기를 박해하는 경찰서장에게도 경건을 인정받은 분이었습니다.

가나안농군학교를 창설한 김용기 장로님이 일제 때 경기도 광주에서 농촌운동을 하다가 역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 큰 아들은 퇴학당하고 장로님은 양주 경찰서에 끌려가서 고생을 했습니다.
한번은 다다끼(立芝)라는 이름을 가진 고등계 주임에게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으면서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고생 끝에 석방되어 비틀거리면서 경찰서를 나오는데 뒤에서 자기를 고문하던 일본 형사들이 일본말로 ‘훌륭해!’ ‘암, 훌륭하고말고. 저래야 되!’ 하더랍니다.
김용기 장로님은 속으로 ‘아,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는 않았구나!’ 감사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김용기 장로님에게는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용기(金容基) 장로님이 생전에 이 말씀을 하실 때는 형사들이 하던 말을 일본말로, 형사들의 말투를 흉내 내서 하는데 아주 감탄하는 어조였습니다.
일본 경찰들도 김용기 장로님의 경건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남이 인정하는 경건의 소유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는 사람의 경건도 헛 경건입니다.
이 혀는 우리 경건생활의 출발점이요, 또 종점입니다.
경건생활의 가장 기초적인 것이며 또 최고봉입니다.

혀를 재갈 물린다는 것은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옳은 말, 바른 말, 위로하는 말, 진리의 말, 예수님을 전하는 말,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말, 사람이 상처를 치료해 주는 말, 이런 말을 많이 할수록 좋습니다.
거짓말, 자기 자랑, 근거가 없는 말, 남을 해치는 말, 남에게 상처가 되는 말, 불필요하게 많은 말, 남이 말하고 있는데 중간을 자르고 나오는 말,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말, 이런 말에 대해서는 혀를 재갈 물리라는 말입니다

일언삼사(一言三思)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마디 말을 하려면 세 가지를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나에게 유익한가?’
‘이 말이 지금 이 말을 듣고 있는 상대방에게 유익한가?’
‘이 말이 이 말 가운데 나오는 사람에게 유익한가?’
이 세 가지를 생각하고 ‘다 유익하다.’ 판단되면 그 때에 하라는 말입니다.

요즘 저희 교회가 이상하게 수원구치소 여사에 거의 매주 가고 있습니다.
두 주일 전에는 재중동포 재소자들을 위로하는 잔치하기 위해 갔고, 지난 주간에는 중국인들을 위로 잔치하기 위해 갔습니다.  가서 그 분들 눈물을 많이 흘리게 했습니다.
이번 화요일에는 저희 교회 그림 그리는 성도들이 그 곳에 걸기 위해 그린 그림들을 전달하기 위해 또 갑니다. 
거기에서 안으로 들어가려면 문을 여럿 통과해야 합니다. 우선 출입증을 받아달고 밖의 출입구를 통과해야 하고, 재소자들이 있는 건물의 출입구를 통과해야 합니다.
여자 재소자들이 있는 곳에 가려면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서  잠겨 있는 문을 안에서 열어주어야 합니다. 
나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곳곳에 경비교도대원이나 교도관들이 서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한마디 하려면  이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경건이라는 경비대원을 적어도 세 군데는 세우시기 바랍니다.

언덕(言德)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순진리회라는 종파에서 강조하는 말인데 말에는 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건하지 못한 사람이 말을 많이 하는 것은  경건한 사람이 한 마디 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언어생활을 잘 하지 못하면 그 사람의 경건은 헛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도 헛 경건입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나님도 이 일은 눈 감아 주실 거야!’
이러는 것,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
자기합리화,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변명,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군데에서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임하는 벌을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8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베드로전서 4장 18절,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베드로후서 2장 4절과 5절,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베드로후서 3장 7절,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경건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알려주는 말씀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경건하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경건이 헛 경건이면 안 됩니다. 헛 경건은 헛수고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참 경건의 소유자들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 참 경건입니다.

이런 경건을 소유한 대표적인 분들로 청교도들을 들 수 있습니다.
청교도는 그 이름자체가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신앙의 소유자들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청교도적 경건이 대표적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추수감사절입니다.
청교도들은 낯선 땅에 도착해서 먼저 교회당을 세우고, 추위, 질병, 인디언의 습격, 낯선 풍토 가운데서 힘써 농사하여 농작물을 거두게 되었을 때 정말로 뜨거운 감사를 드렸습니다.

16세기 초반에 독일에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1세기 정도가 지나면서 개혁정신이 많이 흐려졌습니다.
교회지도자들이 ‘다시 한 번 개혁하자!’ 하는 각성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교회의 역사에서는 이 운동을 경건주의 운동(Pietism)이라고 부릅니다.
쉬페너(Spener), 프랑케(Francke), 그리고 웨슬리 목사님에게 많은 영향을 준 진젠도르프(Zinzendorf) 백작 같은 분이 중심인물이었습니다.
감리교도 이 경건주의 운동에 뿌리를 대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경건도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참 경건입니다.

고아, 혼자 사는 여성들을 돌보는 것, 참된 경건입니다.
야고보서는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성경인데 신앙의 실천을 대표하는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에서 17절까지를 보세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

아까 경건이라는 말은 신앙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라고 했지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함이 없는 것은,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빈말을 하고 그치는 것은 죽은 경건입니다.
참된 경건은 말만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야고보는 내면적 신앙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면적 신앙에는 반드시 윤리적인 사랑의 행위가 뒤따라야 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2월은 참 경건을 실천하기 좋은 때입니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라는 것이 참 경건입니다.
여름에 해수욕장에서 우리는 몸에 선틴 크림을 발라 햇볕을 막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경건이라는 선틴 크림을 발라야합니다.
우리는 경건의 큼직한 우산을 쓰고 세속의 비를 맞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요즘 비는 산성비이어서 맞으면 몸에 해롭다고 하는데 세속이라는 비는 산성비 몇 배 이상으로 해롭습니다.
신앙생활의 생명에 결정적인 위협을 줍니다.

고래나 물개는 물속에 살면서도 몸이 물에 젖지 않습니다.
피부에 아마 특별한 성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속사회에서 살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말아야 됩니다.

본문은 참된 경건이란 바른 인격에서 나오는 절제된 언행, 소외된 이웃에 대한 보살핌,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신앙, 실천하는 신앙,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신앙, 세속에 물들지 않는 신앙에 힘써 참 경건의 소유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경건이 없다면 그 교회는 친목단체가 되고 맙니다.
경건의 모범을 보이는 교회라는 것은 가장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이룩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참 경건의 소유자들이 되면 어떤 일들이 있습니까?

그것이 밖으로 나타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참 경건하다.’고 하면서 머리를 숙이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무언의 전도가 됩니다.
겉을 보면 속까지도 짐작할 수 있듯이 행위를 보면 그 심령을 알 수 있습니다.
행위를 통해 내적인 사랑이 드러나지 않는 경건은 위선이요 속임수입니다.

우리는 성도들의 태도나 말, 가정의 분위기, 사업장, 교제하는 자리에서 ‘이것이 경건이로구나!’ 느낌을 주는 참된 경건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설교예화사전에서 경건에 대한 예화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있는 것이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여자 성도 한 분을 심방했는데 가난하고, 집에 환자가 있고, 아주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 언행이 단정하고, 집을 깨끗하게 정리해 놓고, 경건한 분위기를 깊이 느낄 수 있어서 은혜를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참 경건의 소유자들이 되면 그것이 자녀들에게 전달됩니다.
한나와 사무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외조모 로이스, 어머니 유니게와 디모데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고넬료의 식구들도 그렇습니다.
수산나와 감리교 창설자 요한 웨슬리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참 경건의 소유자들이 되면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참 경건을 소유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요셉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는 것을 이겼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참 경건의 소유자들이 되면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절은 기도에 대해 말하면서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과 같이 시끄러운 세상에서 단정하고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우리가 이와 같이 참 경건의 소유자들이 되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 경건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경건의 시간, 주님과 나만의 시간, QT를 많이 가져야 합니다.

저는 지난 금요심야합심기도회에서 ‘겸손하였습니까?’ 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 표어가 ‘겸손하게 주의 뜻을 행하는 교회’인데 지금부터 남은 15일을 겸손하게 보내기 위해 힘쓰는 것이 ‘겸손하게 주의 뜻을 행하는 교회’라는 표어를 가진 목양신앙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바람직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여러분은 참 경건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묻고 싶습니다.
참 경건을 소유하기 위해서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경건의 모범을 보이는 교회’를 첫 번째 비전으로 하고 있는 목양교회 성도로서 마땅한 의무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믿음을 갖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실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참 경건의 소유자들이 되어 그것이 밖으로 표현되어 무언의 전도가 되고, 그것이 자녀들에게 전달되고, 유혹을 이기고,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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