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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Ⅱ) (요 12:23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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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는 천하명옥(天下名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은 어떻게든 화씨지벽을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곧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성(城) 15개와 맞바꾸자'고 제의했습니다.

혜문왕에게는 실로 난처한 문제였습니다. 제의를 거절하면 당장 쳐들어 올 것이고 화씨지벽을 넘겨주면 그냥 빼앗아 버릴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인 목현(穆賢)의 말에 따라 지모와 담력이 뛰어난 인상여(藺相如)를 발탁했습니다.

이리하여 사신으로 발탁된 인상여는 소양왕을 알현하고 화씨지벽을 바쳤습니다. 화씨지벽을 손에 들고 살펴보던 소양왕은 감탄하여 희색이 만면했으나 약속한 15개 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예상했던 인상여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전하, 그 화씨지벽에는 흠집이 있사온데 그것을 외신(外臣)에게 주시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소양왕이 무심코 화씨지벽을 건네주자 인상여는 그것을 손에 든 채 궁궐 기둥 옆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소양왕을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전하께서 약속하신 15개 성을 넘겨주실 때까지 이 화씨지벽은 외신이 갖고 있겠나이다. 만약 안 된다고 하시면 화씨지벽은 외신의 머리와 함께 이 기둥에 부딪쳐 깨지고 말 것이옵니다."
화씨지벽이 깨질까 겁이 난 소양왕은 인상여를 일단 숙소로 돌려보냈습니다. 인상여는 숙소에 돌아오자 화씨지벽을 부하에게 넘겨주고 서둘러 귀국시켰습니다. 소양왕은 인상여를 죽였다가는 신의 없는 편협한 군왕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 같아 그대로 곱게 돌려보냈습니다.
이리하여 화씨지벽은 '온전한 구슬(完璧)'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인상여는 그 공으로 상대부(上大夫)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결점이 없이 훌륭하다는 뜻으로 완벽(完璧)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역설의 진리는 성경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으로 인하여 큰 타격을 입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백성들로부터 호산나 찬송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을 환호하는 관중들을 보자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사태가 이쯤되자 예수를 음해하고자 했던 일이 부질없는 일이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온 세상이 그를 좇는다고 했습니다(12:19). 그들의 말이 참으로 가소롭지만 사실은 예언적인 일성(一聲)인 것은 분명합니다.
마침내 환영 인파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무리들을 진정시켜 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고 했습니다(눅 19:39-40).
예수님은 자기에게 온 안드레와 빌립에게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역설적인 밀알의 교훈을 말씀하셨습니다.

Ⅰ. 한 알의 밀알은 살기 위해 땅에 떨어 져야 합니다.

본문 12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라고 했습니다.
땅에 떨어지는 것은 본래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자신을 포기하는 자포(自暴)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먼저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마 16:24).
자기 부정은 곧 죽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육의 원리로 설명되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로마서 8장 3절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Ⅱ. 한 알의 밀이 살기 위해 땅에 떨어져 묻혀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 3절에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라고 했습니다.
길가에 떨어지는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습니다(마 13:4).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면 흙이 깊지 아니하기 때문에 싹이 빨리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해가 돋은 후에는 타져서 뿌리가 없기 때문에 말라버린다고 했습니다(마 13:5-6).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는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는다고 했습니다(마 13:7).
좋은 땅에 떨어져야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한다고 했습니다(마 13:8).

Ⅲ. 한 알의 밀이 살기 위해 땅에 묻혀 죽(썩)어야 합니다.

본문 12장 24절에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했습니다.
땅에 떨어져 묻혀서 썩지 아니하면 한 알의 밀은 발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묻히기는 묻혔는데 죽(썩)기 싫어서 한 알 그대로 있으면 이것이야 말로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생명은 그대로 일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있는 정체상태는 죽은 것입니다. 식물인간은 사실상 살았으나 죽은 것입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묻힌다는 것은 그 밀알이 죽는 것이 대 전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밀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죽(썩)는 것이 천정의 법칙이자 순리(順理)이기 때문입니다.

Ⅳ. 한 알의 밀이 죽는 것은 더 많은 결실 을 위함입니다.

본문 12장 24절에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했습니다.
죽어야 비로소 백 배든지 육십 배든지 삼십 배든지 결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묻혀서 죽는 것은 더 많은 결실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한 알의 밀의 속성입니다. 결실이 있어야 살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결실이 없는 밀알은 죽은 밀알입니다. 죽어야 산다는 역설의 진리는 부활신앙의 활용(活用)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9절에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5절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8장 35절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9장 24절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33절에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역설의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부활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모 방송국에서 제작 방영한 불멸의 이순신을 기억합니다. 세계 해전 사상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23전 23승의 완승이었습니다.
생즉사 사즉생의 전략이야말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한계적 본능입니다. 그 죽음의 밑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처절한 삶의 본능적 철학입니다. 이것은 당시 조선 수군의 생활 속에 맥맥히 흐르는 정신이었기 때문에 승리를 가능케 했던 것입니다.
경향교회 당회실 정면 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표구가 되어 걸려 있습니다.
{죽음을 통하여 생명이 나오고 자기희생을 통하여 영광의 결실이 온다는 것은 자연계나 영계에 공통되는 천정의 법칙이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블레셋 군대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치고 있을 때 다윗은 산성에 있었습니다(대상 11:15). 블레셋 사람의 영채(營寨)는 베들레헴에 있었습니다. 이때 다윗이 사모(思慕)하여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라고 했습니다(대상 11:17). 이때 다윗의 용사중 세 사람 가운데 그 첫 번째가 학몬 사람의 아들 야소브암(대상 11;11), 둘째는 아호아 사람 도도의 아들 엘르아살(대상 11:12)입니다. 셋째는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삼하 23:11)입니다.
이들이 블레셋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가져왔습니다. 이때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렸습니다.

이때 다윗은 역대상 11장 19절에 {가로되 내 하나님이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를 어찌 마시리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을 인하여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 그에게 와서 싸움을 돕는 용사들은 목숨을 담보로 하여 이스라엘의 건국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① 이들은 성신의 감동을 받고 온 사람들입니다(대상 12:18).
② 여기에는 현재 집권 왕 사울의 동족들도 삼천명이나 있었습니다(대상 12:29).
③ 잇사갈 자손 중에는 시세(時勢)를 알고 마땅히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역사적 통찰력이 민감한 자들이었습니다(대상 12:32).
④ 이들은 항오(行伍)를 정제(整齊)히 할 능력이 있는 자들입니다(대상 12:33).
⑤ 스불론 중에서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한 자들입니다(대상 12:33).
⑥ 갓 자손 중에서는 작은 자는 일백 인을 관할하고 그 큰 자는 일천 인을 관할하는 자들이었습니다(대상 12:35).
이들이 다윗에게로 나아올 때는 죽기를 각오하는 모험이었습니다.

역대상 12장 15절에 {정월에 요단 강 물이 모든 언덕에 넘칠 때에 이 무리가 강물을 건너서 골짜기에 있는 모든 자로 동서로 도망하게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들을 붙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통하여 목숨을 담보로 하는 충성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아직도 사울이 집권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용단을 내린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역대상 12장 39-40절에 {무리가 거기서 다윗과 함께 사흘을 지내며 먹고 마셨으니 이는 그 형제가 이미 식물을 예비하였음이며 또 근처에 있는 자로부터 잇사갈과 스불론과 납달리까지도 식물을 나귀와 약대와 노새와 소에 무수히 실어 왔으니 곧 과자와 무화과병과 건포도와 포도주와 기름이요 소와 양도 많이 가져왔으니 이스라엘 가운데 희락이 있음이었더라}고 했습니다 .
본문 12장 25절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생명경시나 자학이나 자살을 종용하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환란과 핍박이 불가피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때 타협이나 양보하지 아니하고 그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진리를 좇아가야 된다는 당위성을 일깨우는 것이 일차적 의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의 진리를 좇아 살아갈 때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가 전파됨으로 그들을 옳은 데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철학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10여 년이 넘도록 대학생들을 지도했습니다. 그 때 성심으로 주를 섬긴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K대학교 음대 피아노과를 전공하던 W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교회 부흥회 때문에 평생에 한번 밖에 없는 졸업여행을 가지 아니했습니다. 졸업 후에 이 학생은 후배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S대학교 신문학과를 전공하던 H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가 대학부에서 맡은 일은 전국 S.F.C. 총무, 남지방 S.F.C 위원장, 대학부 위원장, 성경공부 조장이었습니다. 그는 사무실에 저를 찾아 왔다가 말없이 나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너무 맡은 직분이 많아서 한 가지 정도만 직분을 반려하려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그냥 갔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학교에서 데모하는 친구들도 있는데 나는 다행스럽게도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지금 이 학생은 우리나라 중요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S대학교 경영학을 전공하던 K학생은 별명이 아예 경건이었습니다. 지금 이 학생은 S 경제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어떤 장로님 부부는 우리가 이렇게 살기보다는 설교에 은혜 받고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길로 서울로 온 그들은 처음에는 고전했으나 지금은 대기업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이들 뿐이겠습니까? 말하고자하면 지나온 세월만큼 해야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다는 것만 제한된 지면을 통해서 언급했을 뿐입니다.
저는 서울에서 교회생활 30여 년 동안 희생한 만큼의 보상적 은혜를 직접 간접으로 체험했습니다. 참으로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희생한 것에 대한 것은 결코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역설의 진리가 바로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떨어져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자기 땅에 왔으나 자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묻힌바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생명의 결실을 보증하기 위하여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6-27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9절에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29-30절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공관복음과 사복음서는 물론이거니와 성경전체에 면면이 흐르는 정신사는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역설의 진리로 충만합니다.

십자가의 진리는 죽은 만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죽지 아니하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죽지 아니하면 우리가 이 땅에 남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지 않고 남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적어도 십자가의 도는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라도 무엇인가 남기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받은 유형무형의 분깃을 그냥 가지고 있다가 갈 것입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아니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죽고자 하십시오. 그러면 풍성한 결실을 보장 받을 수 있습니다. -아 멘 -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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