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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 예수 탄생의 의미 (눅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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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 로마 황제 아구스도가 온 천하에 호구조사령을 내렸습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의 속령이었으므로 유대인들도 호적 하러 자기들의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요셉도 갈릴리 나사렛 동네를 떠나 베들레헴이라는 곳으로 갔는데, 베들레헴은 다윗 왕이 난 고을이고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 120킬로 되는데, 요셉은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갔습니다. 그 때 마리아는 이미 만삭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한 요셉은 마리아를 나귀에 태우고 여관을 찾아다닙니다. 아무래도 곧 아기를 낳게 될 것 같습니다. 방을 찾아보지만 호적 하러온 사람들이 많아 빈방이 있을 리 없습니다. 더구나 베들레헴은 아주 작은 고을이었으므로 여관이 많지 않았으며 그나마 먼저 온 사람들이 이미 다 차지했던 것입니다.

만일 요셉이 부자였더라면 그까짓 여관 방 한 칸 구하기는 식은 죽 먹기였을 것입니다. 여관방이 없다면 베들레헴에서 가장 좋은 저택의 안방을 빌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가난해서 그럴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겨우 여관 주인의 배려로 외양간을 빌릴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나마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당시는 요즘처럼 행정이 체계화되지 못했으므로 호적하는데 시일이 많이 걸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과 마리아가 며칠 동안 베들레헴에 머물렀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수일은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 동안 마리아는 해산할 날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였습니다. 구유는 아시는 대로 가축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을 말합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의 탄생이 이처럼 초라할 줄이야!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베들레헴은 “빵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아기 예수께서 빵집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셔서 먹이 그릇인 구유에 뉘이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메시야께서 이 땅에 오셨으나 그를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1절에는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오랜 계획이 실현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천군천사들과 더불어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그 날 밤, 하나님께서 주의 사자와 천군들을 축하사절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목자들이 들에서 양떼를 지키는데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추었습니다.

목자들이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크게 무서워하니 주의 사자가 이르기를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고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나타나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 목자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했습니다. 오늘 저는 거룩한 성탄절을 맞이해서 본문에 담긴 구주 탄생의 의미를 되새겨 봄으로써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빼놓고서는 기독교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 역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

언젠가 어느 청년에게서 “사랑은 주는 것입니까, 받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근거해서 답변한다면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근원적인 사랑은 부모의 자식 사랑인데, 이 사랑의 본질은 주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장성할 때까지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자식이 아무리 부모를 위한다고 할지라도 받은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모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닮았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처럼 위대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이해하려면 인류가 처한 비참한 실상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타락 이전에 아담과 하와가 살던 에덴동산은 아무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평화롭고 풍요한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아담과 하와는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며 지냈습니다. 짐승들이 사람을 무서워하거나 피하지 않았고, 짐승들끼리 싸우고 잡아먹는 일도 없었습니다. 이마에 땀 흘려 수고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병들거나 죽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아담이 범죄한 이후부터 모든 것이 뒤바뀌었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자 모든 정상적인 것이 파괴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불화하게 되었고, 그 결과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냈으며, 사람은 식물을 얻기 위해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게 되었습니다.

짐승들은 사람을 무서워하며 피하게 되었습니다. 짐승들 사이에도 평화가 깨어져서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물에 사는 물고기들과 공중의 새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해 피조세계 전체가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도 불화가 생겨났습니다. 타락 전에 아담은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는데, 타락 이후에는 둘 사이의 신뢰에 금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고 하시자, 아담이 대답하기를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여자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하시니,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지 않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다 죽음의 세력 아래 있습니다. 범죄한 인간의 영이 죽었고, 그 뒤에 육신의 죽음이 있고, 그리고 영원한 죽음 곧 불못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이 처한 운명은 비참하기 그지없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개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랑이 한량없으신 하나님께서 인생들이 처한 비극적인 실상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어 인생들의 죄를 대신 담당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모든 비극이 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는 인간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의의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칙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로 속죄 제사를 드렸지만, 그것은 모형에 불과할 뿐 실지로는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없애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이 땅에 사람으로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케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기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에게 살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이 시간 우리는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진심으로 구주의 탄일을 축하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탄생은 겸손한 마음에 주님께서 임하신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십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알기 쉽게 설명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으로는 하나님이시고 인성으로는 우리가 같은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표현을 한자로는 성육신(成肉身)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말씀이 육신으로 화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구절은 말씀이신 독생자께서 인성을 취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하여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성자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으니 이보다 더 낮아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궁궐에서 왕자로 나신 것도 아니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나셨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첫아이를 낳을 때만은 방에 불도 때고 아늑한 분만실을 꾸립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찬바람이 들이치는 외양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낮은 데로 임하신 구세주의 겸손하심을 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처럼 낮고 천한 신분으로 빈한한 가정에서 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접 받고 인생을 즐기려고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종의 위치에서 섬기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궁궐이나 부잣집이 아닌 초라한 외양간에서 태어나신 까닭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려면 그 마음이 낮아지고 겸손해 져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 마음을 높은 데 두고 남을 깔보는 사람은 주님을 마음에 모실 수 없습니다.

“빈 방 있습니까?” 이것은 어느 성탄절 연극의 제목입니다. 이 연극은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화를 극으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내용을 잠시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성탄절에 연극을 하는데, 말이 어눌한 아이가 여관집 주인 역을 맡았습니다.

이 아이의 대사는 요셉이 “빈 방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빈 방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요셉이  "죄송스럽습니다만 아내가 만삭이 돼서..." 라고 하면 "글쎄, 사정은 딱하오만 지금 우리 집엔 손님이 꽉 찼다오. 우리 유대인만 있는 게 아니고 로마 병정도 있어요. 다른 사람들도 많고요"라고 하면 됩니다. 연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여관집 주인 역을 맡은 아이는 대본대로 요셉의 청을 거절합니다. “빈 방 없어요” 요셉이 사정합니다.

그래도 대본대로 “빈 방 없습니다”라고 잡아뗍니다. 그러면서 이 아이는 마음속으로 고민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를 쫓아버리다니 이러면 안 되는데 라고 갈등합니다. 드디어 이 아이는 거절당하고 돌아가는 요셉과 마리아를 쫓아가며 “우리 집에 방이 있어요. 진짜 방이 있다구요 그러니까 우리 집에 가요”라고 목 놓아 웁니다. 그 날 연극은 엉망이 되었고, 아이들은 하나같이 그 아이에게 여관 주인 역을 시키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연극에서 “빈 방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연극이니까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실제로 예수님을 모실 마음의 빈방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만일 우리 마음속에 교만과 아집과 미움과 정욕과 탐심과 거짓과 같은 손님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다면 예수님이 찾아오시더라도 모실 방을 드릴 수 없습니다.

계시록 3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고 하셨습니다.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 예수님을 마음문 밖에 세워 둔 사람은 없으십니까? 이제라도 교만과 아집을 버리고, 세상 욕심을 회개하고, 이 땅에 구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의 보좌에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낮은 마음, 겸손한 마음이 되어서 이 세상에 구주로 오신 주님을 모셔 들여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에게는 평화를 주기 위함입니다.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그 날 밤에 베들레헴 근처 들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나타난 허다한 천군들이 주의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운 노래를 일컬어 천상의 선율이라고 합니다 마는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실제로 천사들의 합창을 들었으니 얼마나 복됩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도 복이 있는 것은 천사들이 부른 곡조를 듣지는 못했지만 그 노래의 가사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작정하신 인류 구원의 계획이 실현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이 태어났음을 의미합니다. 이 순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수천 년 동안 기다리셨는데, 드디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으니 얼마나 기쁘셨을까요?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죄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을 보실 때입니다. 한번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세 가지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맨 먼저, 잃은 양의 비유는 이렇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두 번째, 되찾은 드라크마의 비유는 이렇습니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세 번째, 돌아온 아들의 비유는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하길래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아들은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해서 그 재산을 다 탕진했습니다. 마침 그 나라에 기근이 들었고, 이 아들은 돼지치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주려죽을 지경이 되자 품꾼들도 양식이 넉넉한 아버지 집을 생각하고 돌아옵니다.

염치불구하고 돌아오는데 아직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 나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환대했습니다. 아들이 말하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하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하나님을, 돌아온 아들은 타락한 인간들을 말합니다. 아버지가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잔치를 베푸시고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것은 마음 아프고 비통한 일이지만 그로 인해 죄인들을 위한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졌으므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패배의 장소가 아니고 영원한 승리를 거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비유컨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뱀에게 발꿈치를 물리는 것을 감수하시고 뱀의 머리를 상하게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앞에서도 말씀한 대로,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 불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만드시되 특별히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이는 사람이란 하나님과 화목할 때 비로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의 마음은 평안이 없고 죄책감에 억눌린 상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불화를 해결하고 둘 사이를 화목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롬 5:1).

아기 예수의 탄생이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구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마음의 평화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어제 밤에 티비를 통해서 성탄 전야에 명동이나 시청 앞 광화문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 동안 우리 국민들은 갈등과 대립으로 모두 마음이 지치고 상처 입은 상태였는데 모처럼 환한 웃음을 머금은 사람들을 보니까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단지 즐기고 노는 명절로만 아는 사람들은 성탄절이 지나기가 무섭게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주는 평화를 누리면서 살려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하늘의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도록 오늘 성탄절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구주 탄생의 의미를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성탄절 주일에 예배당에 나와서 구주 탄일을 축하하는 성도님들 심령 속에 그리고 성도님들의 가정 위에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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