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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자 (욘 2: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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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으로 가슴벅찬 새해를 주셨습니다. 이미 성도 여러분들은 어제 저녁 2005년의 마지막 시간을 회개와 반성, 그리고 새로운 다짐으로 마무리를 하셨기에 새해를 맞은 감회가 더욱 새로우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한 해를 주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가 돌이켜보면, 새해를 소유할 만큼 그런 자격이 있는가? 하고 반문을 해보면 부그럽게 한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충성되이 여기셔서 기회를 주신 것으로 믿기에 허락하신 이 한 해를 소중하게 시작하며 또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것이 세례요한 메시지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로서 그의 메시지는 아주 강력했습니다. 마지막 때에 알곡과 쭉정이를 가를 것인데 그 때가 가까왔다는 것입니다. 흔히 결단력이 약한 사람들의 특징이 늘 내일 타령하는 사람입니다. 내일이 있으니까... 내년이 있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중도에 이렇게 다짐하곤 합니다. "새해부터는 새벽제단 쌓아야지..." "새해에는 꼭 가정예배 시작해야지..." "새해에는 반드시 봉사생활해야지..." '"새해에는 무슨일이 있어도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지..." 등 결심도 많고 다짐도 많습니다만, 불행하게도 언제나 작심삼일 수준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말씀이 선포디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우리 함께 서로 다짐하는 의미에서 인사를 나누어 볼까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합니다. 술 좋아하시는 분들은 그러더라구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내용도 달라져야 하고 담는 그릇도 달라져야 할줄로 믿습니다.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넣으면 헌 부대가 터져버리지요. 그러면 둘 다 못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9장 17절의 결론이 뭐예요. 그렇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전이 될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둘 다 사는 방법이 뭐예요? 공존입니다.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도 합니다. 가정이 새로워지려고 해도 부부가 협력해야 합니다. 남편은 새로워지려고 하는데, 아내가 새로워지지 않고 버티면 어려움이 있습니다. 부모는 새로워지려고 하는데 자녀들이 여전하면 그것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부분에서 모두가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교회적으로 보면 담임목사는 새로워지려고 몸부림치는데 장로님들이 여전히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있으면 곤란하지요. 그렇게 되면 어느 한 쪽이 터지는 것입니다. 부대가 터지든지 포도주가 손상을 입든지 하게 됩니다.

한 번 더 인사하십니다. "내가 낡은 부대처럼 보입니까? 새 부대처럼 보입니까?" 성도 여러분, 지난 한 해는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낡은 부대처럼 쓸모없이 자리만 차지하지 않았습니까? 다행히 한 자리 차지 하긴 했는데 허송세월하진 않았습니까? 이왕이면 새 부대가 되어서 새 포도주를 마음껏 아구까지 채울 수 있는 귀한 사명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새해부터 4부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1부 예배는 우리 교역자들과 장로님들, 권사님들과 교회학교 교사를 주요 대상으로 하는 헌신자예배입니다. 과거엔 어느 한 부만 참석하여 겨우 예배만 드리곤 마치 주일 성수를 한것 처럼 오해하던 분이 많았는데 이젠 아닙니다. 그렇게 안일하게 신앙생활하던 시대는 2005년으로 끝났습니다.

이제 권사님들과 교사들은 1부에 다 나오셔서 헌신자를 위한 예배를 통해 은혜받고, 결단하며 헌신의 자리를 찾아 능동적으로 충성하는 모습이 요구되는 해입니다. 메세지도 3부와는 다르게 아주 강도가 높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부터 교사까지 헌신을 다짐하는 중직들이 모였는데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우리가 다 주의 말씀을 들으려 이곳에 모였습니다라고 고백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듭난 신앙고백이 오늘 우리 중직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저는 본문을 통하여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자"는 주제로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유대 백성들에게는 자신들의 삶의 중심에 주의 성전이 있었습니다. 광야생활의 고단함 속에서도 지파의 중심에 있는 성막을 바라보는 일이 즐거움이요 위로요 축복이었습니다. 열두지파가 세 지파씩 동서남북에 위치하였고 그 중심에 예배의 중심이요 임재의 상징인 성막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막은 어느 지파에서 보아도 볼 수 있도록 위치했습니다.

유럽의 도시들을 가보면 재미있는 특징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도심에 반드시 교회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세 이후에도 도시는 언제나 그러한 구조를 유지했습니다. 영국에 가면 가장 중요한 자리라고 할 수 있는 국회의사당과 웨스트민스터사원이 있는 중앙로터리에는 감리교회 본부가 위치하고 있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교회가 삶의 중심에 차지하고 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우리의 신앙은 주변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명은 짜투리 시간이나 나야 생각해보는 주변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학교 교사가 시간이 여유가 있어서 하는 건가요? 찬양대가 시간 보낼 일이 없어서 하는 것입니까? 그동안 잘못 생각한 분들이 계셨다면 바꾸어야합니다. 분명히 선언하건대 찬양대는 사명인 줄 믿습니다. 사명으로 하는 거예요. 구약에서 찬양대는 군대 앞에서 생명을 걸고 앞장섰던 하나님의 군대 마하나임이었습니다. 교사 역시 마찬기지입니다. 이 일은 시간이 있거나 재능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명으로 하는 것인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최선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대강대강 입고 오지 마세요. 주일날은 머리를 좀 투자를 하시고, 주일날은 옷도 좀 투자 하시고, 토요일 되면 와이셔츠를 다리시고, 구두 좀 토요일날 되면 닦으시고, 이왕 목욕은 금요일이나 토요일날 하시고, 때가 많아서 걸쩍지근해서 가는게 아니라 주일예배를 준비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가셔야 되요.

그 날 삶의 중심이 어떤 삶의 중요한 목표가 분명하면 주변적인 것들이 그 목표를 위해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새해에 그런 다짐을 1부에 드렸습니다. 3부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새해에 어떤 마음으로 시작해야 할까?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자고 하는 말이 무얼까?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그게 뭐예요? 쉽게 이야기하면 내가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내게 본업입니다. 돈 버는 일, 직장 다니는 일, 사업하는 일, 이것저것 인간관계 하는 일, 세상에서 이런 저런 연관된 기관에서 여러분이 함께 하는 일들은 주변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주님의 일이 부업이예요. 부업이란 시간나면 하는 것이기에 바쁘거나 기분 나쁘면 그만 두는 거잖아요. 주님의 일을 부업하듯이 해서는 곤란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렇게 다짐했습니다. 다시 주님의 성전을 바라보겠습니다. 내 삶의 관심이 주님의 제단을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새해를 시작합니다.

이제 주님을 바라보며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주변적인 것이 아니라 내게 본업과도 같은 것입니다. 전에는 겸손하지 못했다면 새해에는 겸손하시기를 원합니다. 전에는 순종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면 새해에는 순종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울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않됩니다. 사울은 순종의 사람으로 출발했고, 겸손의 사람으로 출발했지만, 결국 그는 불순종의 사람으로 망했고, 교만의 사람으로 망했습니다. 변질된 것입니다. 주님은 선언하십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것은 변화입니다.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더 은혜롭게, 더 성령 충만하게, 더 헌신되게 변화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굉장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유로운 몸을 가졌을 때 건강할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데, 지금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자신이 얼마나 고통 속에 있는지를 2절에서부터 6절까지 계속해서 고백을 합니다.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스올의 뱃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깊은 바닷속에 던지워진 것 같습니다. 파도와 큰 물결이 내 위를 덮쳤습니다. 물이 나를 둘러서 영혼까지 찼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산뿌리까지 내려간 것 같아 절망만 보이고 희망은 보이지 않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내 영혼이 너무나도 피곤하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마지막 이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냈습니다. 바로 기도인 줄로 믿습니다. 성도여러분, 시험에 들고 나서 기도하지 말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할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성도입니다. 생명이 깜박깜박합니다. 자신의 생명이 꺼져가는 상황에서 요나는 한 줄기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래,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해답인 줄 믿습니다. 기도는 어떤 것보다도 우선이요 중요한 일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 내가 기도보다 앞서지 않게 하옵시고, 기도하지 않고 중요한 일을 시작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하옵소서"

9절입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고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요나는 지금 고백합니다. 하나님, 내가 두 가지를 결단하겠습니다. 하나는 감사의 삶을 회복하겠습니다.
전에는 자꾸 불평을 했습니다. 요나의 약점이 뭐냐하면 주님의 일 하면서 불평하는 스타일이예요. 왜 나에게 이런 일을 시켰을까? 왜 나에게 선교회를 맡겼을까? 왜 우리 속회는 이럴까? 왜 우리나라는 그럴까? 최근 한 리서치 기관이 서울시내 교회를 대상으로 조사를 했답니다. "당신들이 현재 출석하는 교회가 만족되십니까?" 놀랍게도 70%가 불만족이라고 답을 했습니다.

부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배우자가 맘에 드십니까?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겠습니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만이요 다시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대답이 다수였습니다. 냉정히 생각해 본다면 한국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 간 들 자기 마음에 드는 교회가 아디 있겠어요? 한국에서 제일 은혜롭게 설교를 잘 하신다는 분당의 L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의 새가족 정착율이 20%로 나왔습니다. 80%는 등록한지 몇달 안되어서 다른 데로 간다는 것이지요.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문제는 기준이 언제나 내게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맘에 안 들어....."

요나의 문제점이 바로 그거였습니다. 이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맘에 들지 않는 거예요. 왜 하필이면 나를 이방의 선지자로 보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교만이요 강팍함입니다. 그런 요나가 지금 철저히 깨지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 이제는 감사하면서 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맡기시든지 감사하면서 감당하면서 살겠습니다.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평안의 성도님들도 2006년 한 해가 여러분의 입술에서 감사의 고백이 끊이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나를 찬양대원 삼으신 것 감사하고, 나를 교사로 세우신 것 감사하고, 나를 집사로 세우신 것 감사하고, 나를 권사로 세우신 것 감사하고, 나를 장로로 세우신 것 감사하고, 나를 목사로 세우신 것 감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주셨으니 이왕 사명이면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이요, 요나의 결단인 줄 믿습니다.

두 번째 요나의 결단은 서원을 주께 갚겠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선지자 아닙니까? 선지자 요나는 처음에 우리가 뭐라고 약속했겠어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하겠습니다. 그게 선지자의 출발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의 종들이 안수받을 때 서원합니다. 어디든지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헌신예배를 드리면 그러면 우리는 늘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교회학교로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양대로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 찬양대에서 헌신하시는 권사님을 젊은이교회 부장으로 보냈는데 사실 찬양대에서 빠지면 안 되는 그런 분이었어요. 유치부에서도 좋은 선생님 한 분이 대학부 교사로 갔어요.

가만히 보니까 훌륭한 분들은 모두 찬양대에 계신것 같아요. 성도들이 볼 때 "정말 쓸만한 분, 정말 충성된 분들은 찬양대에서 찾자" 이렇게 소문이 나기를 바랍니다. 요나가 서원을 이행하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니느웨가 가라고 할 때 자기 마음과 행동이 달라서 기분이 나빠 딴 곳으로 간다고 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순종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에서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나이가 지긋해도 부모는 부모잖아요. 자녀들이 볼 때 할머니, 할아버지께 우리 부모님이 저렇게 잘 하시는구나. 우리도 커서 잘 해야지... 이것이 삶의 교훈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슨 폼을 잡을 일이 있어요. 우리 하나님 앞에 무슨 거드름을 피울 일이 있어요.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내가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 요나는 이제 바꿨습니다. 다시 니느웨로 가겠습니다. 다시 순종하겠습니다. 다시 내 삶이 하나님께 순종의 삶이 되고,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 되기를 원합니다.

10절에 보면 해답은 너무나 간단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해결방법은 누구에게 있었습니까? 하나님이시지요. 그런데 자기가 해 보려고 난리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시간 버리고 돈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녀가 사고를 쳤는데, 봉투에 몇 십만원씩 넣어가지고 경찰서 담당자들에게 집어주면서 여기저기에 돈을 물쓰듯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평소에는 감사헌금 몇 만원도 아까워서 못 하던 사람이었기에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경찰서에서 해결이 안되 검찰로 가고 결국은 최종 목적지로 간 뒤에야 그 분은 자신이 한일이 헛수고였음을 알게 되었고 제게 후회스럽다고 털어 놓았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결방법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바꾸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내가 기도했더니 문제는 하나님이 아주 쉽게 해 버렸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 10절에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을 자기가 해 보려고 온 난리를 치는 거예요. 주님께 있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는 통해서 다시금 하나님은 또다시 요나를 건지셨고, 요나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 1월 첫주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요나 같은 저를, 요나 같은 우리에게 또 한 번 기회를 주십니다. 회개하는 마음 때문에, 다시금 서원을 이행하겠다고 하는 그 결단 때문에 우리 하나님 우리를 또 믿어주시고, 또 새해를 주셨습니다.

이 새해가 여러분에게 거저 오신 것 같습니까? 이번에 30대, 40대라고 평균나이까지 얼마든지 살 것 같이 생각이 드십니까? 내일 우리는 어떻게 될지 장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매일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줄 믿습니다. 이 2006년에 주님과 함께,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위해서 최선의 삶을 경주하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의 사랑의 하나님, 한 해를 다시금 얻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저희들이었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 한 해만 참으시옵소서. 이 한 해는 정말 충성하길 원합니다. 이 한해는 정말 충성하길 원합니다. 이 한 해는 정말 하나님 앞에 서원한 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요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게 하시고, 요나의 결단이 나의 결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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