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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사람의 시작 (행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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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람의 시작

우리 모두는 주님 앞에 기대가 있습니다. 주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서 병든 사람은 주님이 나를 치료해 주시는 분이었으면 좋겠다, 여러 가지 문제로 얽혀있는 사람은 주님이 우리의 문제를 이렇게 해결해 주시는 분이었으면 좋겠다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어떤 주님이기를 원하는 만큼 과연 나는 주님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 주길 원하는가? 과연 주님은 오늘의 나에게 너는 어떤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라고 기대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냐는 이야깁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눈에 커 보이는 것에 비해 작은 것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작은 것에 소중함을 알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너에게 큰 일을 맡기리라” 얘기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셉이라는 사람의 삶의 정신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사는 요셉은 억울하게 노예로 팔려가 10년을 노예생활의 삶을 살았지만 그의 삶의 태도는 노예처럼 산 것이 아니라 주인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억울하게 들어가 감옥에서 3년을 살았지만 놀랍게 그의 삶의 태도는 죄수로서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간수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신세 타령하며 망가질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삶의 울타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니 얼마든지 망가질 수 있고 추해질 수 있지만 형통의 삶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땅콩박사로 유명한 미국의 아브라함 카이퍼의 삶의 이야기를 참 좋아합니다. 그는 그 책에서 자신의 삶의 정신을 쏟아 놓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마당을 쓸어도 머슴처럼 쓸지 말고 주인이 쓰는 것처럼 쓸어라’ 당신이 만약에 머슴처럼 마당을 쓸면 평생 머슴일 수 있지만 당신이 주인처럼 마당을 쓸면 주인의 마음을 가지면 언제든지 당신은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삶의 자세는 어떠하십니까? 나의 삶의 둥지를 가볍게 알며 내가 하는 일을 우습게 안다면 여러분은 결국 그렇고 그런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울타리를 소중히 여기고 다른 사람이 내 직업을 우습게 알아도 내 직업을 소중히 여기며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며 달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 오늘을 살며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뭐가 좀 꼬였다고 미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자녀들을 보면서 내가 기대하는 기대치에 조금 못 미친다고 해서 저들을 보며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야깁니다. 오늘의 환경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나를 절망시키려고 하는 수많은 요인들 앞에서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에 우리가 너무도 사랑하는 말씀이 있으니 “이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 일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러나 예레미야가 그 노래를 할 때는 그의 삶이 여유 있고 평안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토굴 속에 갇혀 도저히 내일이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을 때 삶의 불꽃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을 때 그가 갇힌 토굴 안에는 물이 가슴 위까지 차 오르는데 그의 입에서는 “이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 일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를 노래했던 것입니다.

지난 14년을 목회 해오면서 목회의 고비 고비를 만났을 적마다 저를 붙들어 또 한번 이기게 했던 제가 참으로 사랑하는 말이 있으니 “요나가 삼키웠으나 소화되지 않았다” 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가 풍랑에 뛰어 들었으나 삼킨 것은 하나님이 보낸 고기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고기가 무엇을 삼키면 하루만 넘으면 소화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요나는 고기 뱃속에 3일 동안 있었지만 소화되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요나에게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나를 삼킬 수는 있지만 고난이 나를 망가뜨릴 수는 없습니다. 염려가 나를 삼킬 수는 있지만 염려가 나를 끝내지는 못하리라. 이것이 목회를 해오면서 수많은 고비를 만날 때마다 붙들고 몸부림을 치는데 하나님이 안산에 저를 그냥 보낸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분명한 의도가 있어서 보내셨지요. 그런데 오늘의 어려움은 이것이 결국이요 끝이 아니지요. 요나가 삼키웠으나 소화되지 않았지만 오늘의 환경이 나를 짖누르려고 하지만 나는 끝난 게 아니지요 라고 몸부림을 치며 달려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외치지요. “우리가 사방으로 우격쌈을 당하여도 쌓이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혹시 예수를 품고 살면서도 환경을 핑계하며 미래를 포기하지 않으셨는지요? 누군가를 나를 이해 해주기를 기다리며 적당히 나의 삶을 합리화시키며 누군가를 핑계하며 망가지지는 않았는지요? 또 하나 우리는 때로는 믿음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에 비해 한사람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게 마음을 두셨습니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소중하매 이것이 더해져서 아흔 아홉 마리가 된 것입니다. 하나를 가볍게 알면 아흔 아홉 마리를 지킬 수 없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아무리 성도가 만 명, 이만 명이 될 지라도 한 생명, 한 영혼을 가볍게 알면 한쪽으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천의 하나 만의 하나 불러모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히 여기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또 하나 우리는 어느 한 사람의 오늘의 모습을 보며 미래를 판단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한 사람의 거대한 출발을 봅니다. 그의 지금의 모습은 도저히 가능성이 없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한 사람의 시작은 이러했습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핍박자였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 사울에 대하여 성경은 소개하기를 그는 유대인 중에 유대인으로 엄격한 바리새파 유대교에서 자란 사람이었고 나면서 할례를 받고 유대 전통과 히브리 율법에 정통한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습니다. 그의 고향은 다소이니 헬라문화와 철학에 익숙해져 그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의 최고의 로마시민권까지 가지고 있고 당시의 최고의 석학이라고 알려졌던 가말리엘 문화에서 공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핍박자 사울은 무식하고 맹목적인 핍박자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핍박자들을 보면 좀 더 무식하고 누가 시킨다고 하고 감정적인 맹목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사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분명한 종교적 확신이 있었고 종교적 철학이 있었습니다. 그는 핍박을 하면서도 분명한 사상을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을 보면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고 어디서든지 예수 믿는 사람만 보면 잡으러 갔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를 만났던 것입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데도 앞장섰던 청년 사울이었습니다. 바로 그 한사람이 예수를 만납니다. 그가 예수를 만난 사건은 오순절 이후에 최대 사건이라고 말할 정도로 대단한 사건입니다. 이름까지 바뀌었습니다. 주님은 그 한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셨고 그 한사람의 새로운 시작으로 한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이방세계로 유럽으로 전해지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옵니다.

우리는 사울이 바울되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작정 앞에 주님의 터치 앞에는 어떤 사람도 변할 수 있고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여러 번 실패하면서 나 자신을 정리하며 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나는 역시 안 돼’ 그리고 눈앞에 몇 번 실패하는 남편을 보며 자식들을 보며 ‘저 사람은 안 돼’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도 나 자신을 판단하면 안 될 뿐만 아니라 오늘의 모습을 보며 누군가를 판단하는 것도 큰 실수입니다. 핍박자 사울은 전혀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이 만져주심으로 그의 생애가 그의 주변이 완전히 바뀌었고 주님으로 인하여 사울이 바울이 된 것만큼이나 바울을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오늘이 좀 얽혔다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믿고 있는 거 있습니다. 예수가 만나 주기만 하면 은혜를 베풀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적인 터치가 있기만 하면 누구나 지금의 모습이 영원한 모습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반대하며 핍박자로 살았던 사울이 복음전도자 바울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위대한 사도 베드로도 처음에는 시몬이요 갈대요 고기 잡는 어부였습니다.

여기에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 목사의 모습은 사실은 20년 전에는 누구도 그려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그 때 사역을 시작하겠다고 신학의 길을 걸어 들어갈 때 ‘목사는 너 같은 사람이 해야 돼’라고 응원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에 목사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너까지 끼어서 하냐고’ 다 말렸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의 기대치에 못 미친다고 해서 마치 여러분의 소유물을 주머니에서 조물딱 거리다가 언제 버릴지 판단하며 끝났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이 적극적인 아이들이 성공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라도 주님이 한 번 개입해 주시면 하나님은 또 한번 그를 통하여 꿈틀거리며 놀라운 새 창조의 역사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도 지금의 모습이 지금의 모습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변화, 평범한 한 사람이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는데는 주님이 그를 만나 주시므로 그를 새롭게 시작하게 하십니다.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기 위해 다메섹으로 갈 때 홀연히 하늘에서 빛이 비췄습니다. 주님이 손 데 버린 것입니다. 핍박자 사울을 향하여 그가 예수 믿는 사람을 수없이 죽이고 끌고 가도 그동안 아무것도 못하신 것 같았던 주님이 그를 향하여 주목했고 터치했으니 때가 된 것입니다. 때로는 요셉이 10년 간 종살이하고 3년 간 감옥생활 할 때 아무것도 못해주시는 것 같았지만 그의 13년 감옥생활이 끝날 즈음 하나님은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고난 받을 때 많은 일들로 얽힐 때 내가 믿는 그 하나님은 내 가슴속에 있는 하나님은 내 삶을 향해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것처럼 때로는 얽힙니다. 그러나 때가 되매 주님은 역사 하셨고 아무것도 못해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평범한 한 사람이 주님이 원하는 한 사람이 될 때 주님은 주님만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을 붙여 준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바울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또 한사람 스데반이었습니다. 열정적으로 주님을 전하는 복음전도자 스데반을 향하여 돌로 쳐죽이는데 앞장 선 사울은 죽어 가는 스데반을 향해서 미소를 지은 것이 아니라 충격을 받습니다. 왜입니까? 스데반을 돌로 치고 있는데 놀랍게 그 스데반은 자신이 보지도 못하고 생각지도 못한 하늘을 이야기하며 보고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로 똑똑하고 대단한 사람 같아도 땅을 기준으로 삼고 땅을 기준으로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그 사람의 직분이 귀하고 그 사람이 믿는 년수가 많다고 해도 그 사람의 언어가 땅을 기준으로 말하고 본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종교적 색깔은 아름답게 칠할 수 있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말하며 하늘을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돌로 치는 그 절박한 환경 속에서 그는 하늘을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충격을 받은 것은 스데반이 돌에 맞으면서 전혀 괴로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노래하니 아마도 그의 삶에는 모르긴 몰라도 지금 죽는데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갈곳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그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자신을 향하여 돌을 치는 사람의 용서를 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앞장 서 돌을 던져 그리고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을 보며 목표를 달성했다고 내가 이긴 줄 알았는데 그의 표정을 보면 아닌 것 같습니다.

자신은 많은 사람을 끌고 가 죽이면서도 행복하지 않았는데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행복해하는 그 스데반을 보며 바울은 충격을 받고 평생에 그의 가슴속에 그의 머릿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더불어 영원히 남아있는 엄청난 모습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스데반은 집사되어 아무 일도 안하고 돌에 맞아 죽었지만 사울이 바울 된 것은 이 스데반의 열매라고 말합니다. 스데반이라는 순교의 씨앗이 바울이라는 꽃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헌신, 한 사람의 수고로 인하여 또 한사람이 태어난다면 그것이 복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때로는 나는 아무것도 못하는 것 같지만 나를 통하여 또 다른 사람이 큰 일을 한다면 이것은 정말 소중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하나 사울이 바울되는데 한 사람 스데반의 열매였다면 바울이 바울되는데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은 또 한 사람의 바나바입니다. 예수를 만나고 한 쪽 구석에서 누구에게도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바울을 제자들과 연결시켜 줍니다. 안디옥 교회에 파송을 받았을 때 함께 사역하자고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선교사로 헌신되어 1차 전도여행을 함께 합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를 키울 만큼 키워놓고 자기는 조용히 성경의 뒤안길로 사라지며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을 다 바울에게 양보합니다. 개인적으로 목사로서 때로는 바울을 연모하기보다는 스데반이나 이런 바나바 같은 사람을 저는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평범하게 있을 만한 그 한 사람이 주님이 원하는 한 사람으로 바뀌었을 때 그 한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한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 다는 것입니다. 이방의 세계가 복음화되고 유럽의 세계가 복음화 되는데는 그 시작이 이 청년 사울이 예수를 만나면서 있어진 일들입니다. 주님을 사울을 만나주면서 ‘너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어야 된다’ 이방인을 위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절대로 주님은 한 사람을 부를 때는 그 사람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 한 사람을 통하여 또 다른 사람을 향하여 비전이 있고 계획이 있습니다. 스데반을 하나님이 집사로 임직 할 때에는 스데반을 통하여 바울에게 각인되기 위한 바나바라는 사람을 통하여 바울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 바울을 통해서 수많은 길들을 열어주기 위하여 계획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제 묻겠습니다. 주님이 내게 어떤 주님이었으면 좋겠다 기대하는 만큼 성도님들은 어떤 의미의 또 한 사람이 되시길 원하십니까? 만약에 여러분에게 주님이 ‘너는 세상에서 예수 믿고 평범하게 그럭저럭 살아야할 사람이 아니라 내가 정말 원하는 한 사람 내가 너에게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너를 향하여 내가 소원하는 바가 있는데 내가 원하는 그 한 사람이라면 너는 어떤 사람이기를 원하는가?’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개인적으로는 세상사람들이 다 알아주는 바울이기보다는 그저 조력자 스데반이나 바나바 같은 사람이 저는 참 좋습니다. 저는 지금도 담임목사로서 사역을 감당하면서 이 교회라고 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섬기며 이끌고 가다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조력자였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부목사로서 잘 섬길 것 같다’ 그런 못난이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데반은 누구입니까? 그는 집사였습니다. 전도자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최초의 순교의 열매였습니다. 사울을 바울되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이방인의 전도자가 스데반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스데반이 돌에 맞으면서 괴로워했다면 스데반이 돌에 맞으며 원수를 죽여달라고 기도했다면 결코 사울이 바울되는데 영향을 끼칠 수 없었을 겁니다. 자신은 집사가 되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너무도 일찍 부름을 받았지만 또 한사람 사울이 바울되매 그의 삶은 가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스데반이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스데반을 향하여 얼마나 큰 기대가 있었을까요? 그런데 전도 처음 나간 날 그는 돌에 맞아 죽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왕 하나님이 집사로 임직 했으면 일 좀 많이 시키지 왜 데려가는 겁니까? 하나님은 그 스데반에게 오랜 날 동안 살아서 대단한 일이 아니라 바울에게 분명한 신앙적인 반응, 영적인 반응을 보여 각인시켜 주는 것으로 그의 사명을 마무리합니다. 여러분, 스데반의 반응을 보며 바울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는가 반응이 수준입니다. 반응이 믿음입니다. 오늘 좀 어렵다고 힘들다고 꼬였다고 그렇고 그런 반응을 보며 뻔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밀려오는 환경 앞에 주님이 원하는 반응을 보이는 거 이것이 아름다운 거 아니겠는가?

주님이 찾으셨던 또 한 사람, 평범한 성도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초대교회에서 인격적으로 위로자요 하나되게 하는 중보자요 긍정적인 사람이었고 인정받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했고 믿음으로 충만했고 여러분, 초대교회가 초대교회 될 수 있을 때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다 내어놓고 다 내어놓았을 때 제일먼저 앞장섰던 사람은 바나바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헌신된 사람은 바나바였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일곱 집사를 뽑을 때 바나바는 누구나 일곱 집사가 될 줄 알았는데 집사의 대열에서 낙오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내가 이렇게 헌신했는데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내가 도와 준 사람이 얼만데 나를 몰라 줘?’ 라고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집사가 되지 못했지만 더 열심히 하나님 앞에 드려지면서 결국 초대교회 일곱 집사보다 수많은 사도보다 더 인정을 받아 안디옥교회에 일순위로 파송을 보냅니다.

여러분, 무언가 대단해 보이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 아닙니까? 지난 주에 우리교회에 임직을 위한 공동의회가 있었습니다. 좀 더 많은 사람이 권사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목사의 바램이었고 저는 기도하며 좀 더 많은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며 방법을 모색했고 그렇게 왔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14명의 권사, 8명의 안수집사, 그리고 3명의 명예권사가 피택되었습니다. 목사의 마음은 부모의 마음인지라 누가 되었느냐가 좋기보다는 꼭 되어야 할 것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픔이 목사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을 어떻게 위로할까 생각해보았지만 하지 못했고 된 사람들에게 축하전화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임직을 받지 못한 한 분이 저를 찾아와 제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죄송해요 목사님이 저를 믿어주고 키워줬는데 제가 성도들에게 신임을 받지 못한 것 하나님의 뜻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제가 더 열심히 할께요 제가 떨어진 것 때문에 목사님이 아파할 것 같아 왔어요. 저는 괜찮아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 분을 보면서 임직에서 선출된 분보다 그 분이 더 크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쓰린 가슴으로 그분을 향하여 눈물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나바는 누구보다 앞장 서 하나님 앞에 드려졌지만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그에게 하나님의 일 자체가 소멸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더 열심히 해서 안디옥교회에 파송을 받았고 함께 일하는 것이 아름다워 바울이라는 사람과 함께 동역하여 선교사로 보냄을 받았을 때 바울과 함께 1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합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언제나 바나바와 바울을 소개합니다. 바울이 따라 다녔다는 겁니다. 맨 마지막에 가서는 바울과 바나바 순서가 뒤바뀝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없어집니다. 바울은 과연 하나님이 기대했던 대로 스데반이 기대했던 대로 바나바가 기대했던 대로 엄청난 일을 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 역사상 바울만큼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서 고난받았던 것 만큼이나 하늘에서 큰 소리 꽤나 칠 것 같아요. 그러나 그 잘난 바울이 꼼짝못할 사람 두 사람은 스데반과 바나바일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는 각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제가 청년들에게 누누이 말하는 것은 오늘의 모습이 영원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주님이 때가 되면 나를 터치할 것이고 나를 만들어갈 것입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이 되어 이방인을 향하여 달려간 바울, 그는 주님의 기대에 실망시키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바나바와 스데반에게 빚진 것을 생각하면서 평생에 그는 복음에 빚진 자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빚을 져 본 적이 있습니까? 옛날에 셋방 살다보면 주인이 종 부리듯 했습니다. 셋방 사는 사람이 월세라도 못 내면 주인이 뭐라고 할까봐 화장실도 못 갑니다.
바울사도가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죽었다고 내 던짐을 당해도 마땅합니다. 스데반도 집사되어 이렇게 죽었는데 내가 이만큼 일하고 가면 미련 없지요. 최선을 다했던 그의 삶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주님은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향하여 평범하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향하여 평범한 한 사람 중에 또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방인을 가슴에 품고 사울이 바울되도록 스데반을 붙여주듯이 그 바울이 바울되도록 바나바를 붙여주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챙기십니다.

우리 교회의 미래를 달려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평범한 직분자가 아니라 누군가 한 사람을 찾으실 것입니다. 직분자와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찾으실 것이고 그런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가지고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냈을 것이고 오늘 내게 은혜를 베풀 것이다 주님이여 나를 통해 큰 일을 이루시옵소서 오늘은 토굴에 갇혔어도 오늘은 끝난 것 같아도 입으로는 이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 일을 성취하는 여호와를 이야기하며 나를 통하여 펼쳐질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며 힘차게 달려가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은 그냥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아무것도 못해주는 것 같아도 주님이 때가 되면 터치할 것이고 감옥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드러날 줄로 믿습니다. (유재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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