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탄]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 (눅 2:7-14)

  • 잡초 잡초
  • 818
  • 0

첨부 1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

(눅 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 2: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눅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눅 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눅 2: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기 예수로 이 땅에 탄생하신 기쁜 성탄절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베들레헴은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다윗의 고향이기도 하지요. 이 베들레헴에서도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신 곳은 어디였습니까? 아주 누추한 마굿간입니다. 

  당시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을 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때 마리아에게 해산의 진통이 왔습니다. 급히 거처를 찾았지만 여관마다 만원이어서 방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어둑컴컴하고 누추한 마굿간에서 해산을 하셔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아기왕 예수는 대궐 같은 집에서 태어나지 않고 냄새나는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을까요? 여기 계신 분 중에도 외양간에서 태어난 분은 없을 겁니다. 

  하물며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닙니까?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처럼 존귀하고 거룩하신 분이 마굿간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우셨다니요. 왜 하나님께서는 그 날밤 아기 예수님을 위해서 흔한 여관방 하나 남겨놓지 않으셨을까요? 

  여기에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성경은 아기 예수가 마굿간에 구유에서 누우셨음을 여러 군데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눅 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눅 2: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찬송가에서도 아기 예수께서 구유에서 탄생하신 것을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113장입니다. 

  # 그 어린 주 예수 눌 자리 없어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네
  저 하늘의 별들 반짝이는데 그 어린 주 예수 꼴 위에 자네

  # 옛날 임금 다윗 성에 낮은 마구 있더니
    어머니가 갓난아기 구유 안에 뉘었네
    어머니는 마리아 그 아기는 예수라

  아기왕 예수께서 마굿간에 구유에서 탄생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예수님께서는 낮고 천한 곳에 생명의 빛으로 오셨음을 뜻합니다.

  마굿간은 어둡고 소외되고 비천한 곳입니다. 오늘의 축사와 같이 번뜻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가난에 찌들려 살던 베들레헴 사람들은 축사를 지을 형편이 못 돼서 자연동굴을 외양간으로 사용했습니다. 빛도 들어오지 않고 통풍도 되지 않는 컴컴한 동굴이었습니다. 가축들의 똥오줌으로 역겨운 냄새만 진동하는 동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낮고 천한 외양간 같은 이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셨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셔서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셨습니다. 마굿간과 같이 비천한 인생이 예수를 믿고 생명의 빛을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회복하게 됩니다.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빛이 여러분에게 임한 줄 믿습니다. 또 임하기를 바랍니다. 마굿간에 오신 예수는 어둠을 물리치는 구원의 빛이십니다. 보잘 것 없는 자를 존귀케 하시는 분이시며 추한 자를 정결케 하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더럽고 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빛 되신 예수를 영접하기만 하면 정결하고 거룩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먹보다도 더 검은 죄가, 주홍같이 붉은 죄가 눈처럼, 양털처럼 깨끗해 질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사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죄의 더러움과 역겨움으로부터 씻김을 받았습니까? 우리 역시 그 중의 한 증인으로 이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아무리 흑암의 권세가 판을 치는 곳이라 할지라도 빛 되신 예수께서 임하시기만 하면 바로 그곳이 빛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참 빛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빛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오스트리아 짤스부르크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에 성 니콜라스 성당이 있습니다. 1818년 성탄절 전날이었습니다. 성탄이브 행사를 마지막 점검하던 모어(J. Mohr) 보좌신부는 깜짝 놀랐습니다. 멀쩡하던 오르간이 갑자기 고장이 나서 전혀 소리가 나지 않는 겁니다. 그 곳은 외딴 시골인지라 오르간 조율사에게 당장 연락할 길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모어 신부는 오르간 아닌 기타 반주로 부를 수 있는 노래를 급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단 한번도 시를 지어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다급한지라 간절히 성령의 도움을 기도한 후에 펜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마음속에는 2000년 전 베들레헴 마굿간 광경이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겁니다. 위로부터 빛이 비추인 겁니다. 그는 마음속에 되살아 난 그 마굿간의 광경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기도 드리네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 잔다

  작시(作詩)가 끝났을 때에 모어 신부는 그 마을 음악교사 그루버(F.X Gruber)에게 급히 연락하여 작곡을 부탁하였고 그루버는 즉석에서 곡을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성탄절 전야에 모어 신부는 기타를 치면서 그루버와 함께 자작 노래를 불렀습니다.

      #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영광이 둘린 밤 천군 천사 나타나
      기뻐 노래 불렀네 왕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많은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참으로 아름다운 성탄 이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성탄절이 지나감과 동시에 이 노래도 곧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한참 뒤, 고장난 오르간을 고치러 왔던 조율사가 우연히 이 노래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름다운 찬송에 감동 받은 조율사에 의해서 이 노래가 외부세계로 소개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세계로 퍼져 나가 마침내 이 노래는 성탄절에 가장 대표적인 찬송이 되었습니다.

  안스도르프 마을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마을이었습니다. 외부 사람들은 그 마을의 이름조차도 모르는 초라한 동네였습니다. 모어 신부와 음악교사 그루버 역시 이름난 시인이거나 음악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벽촌 무명의 사람에 불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보잘 것 없는 무명의 사람들이 만든 노래가 세계를 감동시키는 존귀한 성탄축하 찬송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뜻밖에 오르간 고장났을 때에, 하나님의 종, 모어 신부와 그루버의 마음속에 성령의 빛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의 어두운 마음에 생명의 빛을 비추는 찬송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외딴 안스도르프 마을의 오르간처럼 여러분의 인생이 고장났습니까? 혹시 지금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매고 계십니까? 영 육간에 피곤하고 영혼의 갈증을 느끼고 계십니까?

  빛으로 찾아오신 아기 예수님을 꼭 품으십시오. 여러분이 아기 예수를 위한 외양간이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빛이 여러분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또한 세상의 빛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줄 믿습니다. 

2. 비어 있는 구유가 예수님을 모시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거부했지만 마굿간에 구유는 예수님을 받아주었습니다. 어쩌면 이 구유는 이 세상에서 아기 예수를 가장 먼저 품는 영광을 누렸는지 모릅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나시던 날밤에 아픈 배를 부여잡고 여러 여관을 전전했지만 받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마굿간에 비어 있는 구유가 예수님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마굿간 같은 겸비한 사람, 그리고 비어 있는 구유와 같은 마음을 찾고 계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좌정 하실 빈방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도 비어 있는 구유가 되어야합니다. 주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심령이 낮고 낮은 외양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을 겸허하게 비워야합니다. 내 안의 헛된 것들을 버려야합니다. 육적인 욕심을 버려야합니다. 비어 있는 빈 마음이라야 주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이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마음입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성탄절기만 되면, 매년 공연하는 유명한 연극이 하나 있습니다. ‘빈방 있습니까?’입니다. 배경은 성탄극을 준비하던 어느 교회 고등부 연 매몰차게 대답을 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덕구는 본래 마음씨가 착한 학생이었습니다. 너무나 착한 나머지 바보처럼 보일 때가 있어 늘 왕따를 당하는 편이었습니다. 㣠ԔԔё̌ꘘё̌ꘘ

  덕구가 맡은 역은 마리아와 요셉이 여관문을 두드리면서 ‘빈방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여관 주인 역을 맡은 덕구는 ‘빈방 없습니다.’라고 매몰차게 대답을 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덕구는 본래 마음씨가 착한 학생이었습니다. 너무나 착한 나머지 바보처럼 보일 때가 있어 늘 왕따를 당하는 편이었습니다.

  마침내 크리스마스 이브 날 연극은 무대에 올려져서 매끄럽게 진행되었습니다. 무대는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신고를 위해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때 마리아가 갑자가 해산기가 돌자 서둘러 방을 찾습니다. 

  드디어 여관 주인인 덕구의 등장차례가 되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어느 여관 문 앞에서 사정하듯이 ‘빈방 있습니까’라고 방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등장한 덕구가 ‘빈방 있습니까’라는 물음에 갑자가 머뭇거립니다. 연극과 실제 자신과를 혼돈하게 된 겁니다. 자기 집에는 실제 빈방이 많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해산을 앞둔 마리아가 너무나 불쌍하였습니다. 순간 덕구는 ‘예, 우리 집에 빈방이 있어요. 빈방이 많이 있어요. 마구간으로 가지 마시고 우리 집으로 가세요.’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을 끌고 가려고 합니다. 

  순간 관중석에서는 폭소(爆笑)가 터졌습니다. 연극은 완전히 망쳐진 것 같았습니다. 학생들이 연극을 망쳤다며 덕구를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성도들은 덕구의 그 진솔하고 맑고 깨끗한 마음씨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덕구의 이 아름다운 마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습니다. 

  덕구의 이 아름다운 마음이야말로 비어 있는 구유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요? 우리도 이런 구유 같은 마음을 가지므로 예수님을 모시는 영광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3. 구유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살리는 밥이십니다.

  아기 예수가 누어 있는 구유란 가축의 먹이통입니다. 밥통인 구유 먹이고 나누어주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생명을 살립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의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 하여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동네는 ‘베들레헴’인데 그 이름의 뜻은 ‘떡집’입니다. 예수는 떡으로, 밥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친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 6:4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최후에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우리 죄인들이 이 떡을 먹지 아니하면 영생할 수 없기에 예수님은 자신의 살을 떼어 영생을 얻는 밥으로 주신 겁니다. 여러분은 이미 이 떡을 먹고 영생을 얻은 줄 믿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떡을 먹어야 삽니다. 구유에 있는 먹이를 먹어야 가축이 살 듯이, 구유에 누우셨던 예수님을 먹어야 우리가 삽니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님이 구유에 뉘이시게 된 겁니다.

  예수를 밥으로 먹은 사람들은 이제부터 스스로 구유가 되는 겁니다. 기꺼이 다른 사람의 밥통이 되는 겁니다. 구유는 밥을 담고 그 밥은 다른 사람이 먹습니다. 우리는 내 배만 채우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밥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밥을 먹음으로 생명을 얻게 되는 겁니다.

  밥을 독점하면 부패를 낳습니다. 그러나 구유 같은 마음으로 타인을 먹이고 나누어주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생명을 살립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의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 하여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구세주이신 아기왕 예수님께서는 낮고 천한 곳에 생명의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자신의 살을 생명의 떡으로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비어 있는 구유가 예수님을 모시는 영광을 구합시다. (신만교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