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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하나님을 경험하는가? (눅 1:5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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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하나님을 경험하는가?
누가복음 1:57-66

뉴욕에서 부흥회를 마치고 목회자 10여명과 함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마지막층 커피숍에 갔다.
한 분이 “목사님, 이 빌딩을 왜 102층으로 지은 줄 아세요” 라고 물었다.
내가 모른다고 대답하자 그는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1620년 9월7일 신앙의 자유를 찾아 66일 동안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 항구에 도착한 102명의 청교도를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때 문득 평양 대동강변에 세워진 주체탑 생각이 났다.
첫번째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 당국자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주체탑을 25550개의 돌로 세운 것은 김일성 주석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온 날 수,곧70년에 365일을 곱한 숫자입니다.”
청교도들은 빌딩 하나를 세워도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를 기념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피조물인 사람을 기념한다.

주체탑을 생각하면 바벨탑이 비슷하게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드려내려고 하는 모습이 비슷하게 떠오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극명한 차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심중에 하나님이 항상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심중에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은 전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사람은 많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은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가 않습니다. 여러분은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싶습니까?
누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누가 등장을 합니까? 한 아이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부모인 사가랴와 그의 아내인 엘리사벳이 나옵니다. 또 65절과 66절을 보면 사가랴와 엘리사벳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나오고 유대 산중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누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가랴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서 아주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 사이에는 늙을때까지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사가랴가 제사장 직무를 하고 있을때 천사가 나타나서 아이가 생길것이라고 하면서 아이가 생기면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가랴는 물어봅니다. “나도 나이가 많고 아내도 이제 늙었는데 어찌 아이를 낳을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어봅니다. 그러자 천사는 아이가 태어날때까지 사가랴를 벙어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10달이 지난 다음에 아들을 낳습니다. 아들을 낳을때 친족과 이웃이 와서 축하해주고 같이 기뻐합니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아이가 태어나서 8일이 되어서 할례를 하고 이름을 지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아들의 이름을 부친을 따라서 사가랴로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그렇게 하지 말고 요한이라고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친족들이 가문에는 요한이라고 하는 이름을 쓴적이 없는데 왜 그렇게 하려고 하느냐고 하면서 아버지인 사가랴에게 물어봅니다. 그래서 사가랴가 서판에 요한이라고 씁니다. 그때 사가랴가 혀가 풀려서 자연스럽게 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10달동안 말도 못하던 사람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쓰더니 갑자기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문에 온 동네에 다 퍼졌습니다. 65절에 보니까 유대 산중에 두루 퍼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똑같은 것을 경험하고 들었는데 그것에 대한 반응이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1. 유대 산중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65절 중간부터 66절 중간까지 봅시다. “......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꼬 하니....”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사가랴의 이야기를 소문으로 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의 반응이 “이 아이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3자로서 관찰자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전해듣고 자기들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현장의 중앙에 있어서 그것을 경험하고자 하는 소원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 역사를 했는데 그 다음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정도의 관심만 있어요. 그냥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정도입니다.
여러분! 드라마 보지요? 드라마 보면 극적인 장면에서 방송이 끝나면 다음이 어떻게 될 것인가? 굉장히 궁금해 하죠? 그정도의 관심입니다.
우리들의 반응은?


이 사람은 제 3자의 입장에서 관찰자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역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저 남의 일로만 여기지는 않습니까? 우리 중에 이런 모습은 없나요?

2. 가까이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65절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역사로 사가랴가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아들을 요한이라고 하자 사가랴의 혀가 풀리는 것을 보고 그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가랴가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들은 사가랴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사가랴가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다 지성소에서 제사를 드리고 오더니 벙어리가 된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사가랴는 단순히 말을 못하는 벙어리 뿐만 아니라 듣지도 못했습니다. 22절이나 62절에 보면 “형용”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바디 랭귀지’입니다. 듣지를 못하니까 몸으로 아들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것인가를 물어본 것입니다.
여기 사가랴의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사가랴의 되어진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벙어리가 된것, 엘리사벳이 늙은 나이에 아이를 낳은것, 사가랴가 아들의 이름으로 요한이라고 서판에 쓰자 곧 정상으로 돌아온것....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이 나쁜 일을 당할 때 어떤 생각이 납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 앞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었어요. 그 여자가 바로 자기가 보는 앞에서 사고로 사람이 죽으니까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몇 년전에 자기 친척집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2명이 죽었습니다. 칼로 한번에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여러차례 난도질을 당했어요. 그때 당시 신문 방송에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그 소식을 듣고 나타난 처음 반응이 어떻게 그럴수가 있느냐? 는 것입니다. 잔인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무섭다는 것입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질때 제가 신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때 집이 한강 옆에 자양동에 살고 있었습니다. 학교를 가려고 영동대교를 지나가는데 성수대교가 무너져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같이 공부하던 신학생의 딸이 그 사고로 죽었습니다. 그것을 보니까 다리를 건널때마다 무서워서 기도가 절로 나오더라고요. 다리가 또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굉장히 쓸데없는 걱정이죠.
그런데 왜 무서워하고 두려워합니까?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의 일로만 여기고 있었는데 내 주변에서 일이 터지면 그것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서워지고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사가랴의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사가랴가 하나님을 만나더니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나도 하나님을 만날때 자칫하면 사가랴처럼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두려운 것입니다. 자신에게도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두려운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영혼 깊숙한 곳에는 차라리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한쪽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벙어리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영적인 기쁨을 누리는 것보다 자신의 안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요?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런 마음이 혹시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만나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저 평지풍파없이 편안한 삶이나 살았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나요? 솔직하게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내 영혼 깊숙한 곳에 물어봅시다. “힘들여서 문제 투성이로 하나님을 만나느니 하나님을 만나지 않아도 좋으니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여기지 않나요?

사가랴와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이런 마음의 자세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하나님을 만나야겠다는 간절함이 있어도 때로는 만날까 말까한데 하나님이 이런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만나 주시겠느냐 이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참 이기적입니다. 내것은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채워주시기를 원합니다. 자기 그릇은 자기것으로 가득 채워놓고 하나님이 또다른 그릇을 준비해서 채워주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이기적인지 몰라요.
하나님의 것으로 채울려면 내것을 비워야 됩니다. 내것을 비워야 하나님의 것으로 채울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개를 동시에 채울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한 그릇에 구정물과 맑은 물을 동시에 채울수가 있습니까? 맑은 물을 채우려면 구정물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고 싶습니까? 그러면 비우시기 바랍니다. 나의 욕심, 자랑, 내가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3.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당사자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만날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때 어떻게 반응했나를 보면 우리도 그것을 배울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때 그만한 댓가를 지불했습니다.
63절을 보세요. “저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매 다 기이히 여기더라”
처음에 엘리사벳이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했을때 친족들이 어떻게 했나요? 61절에 보니까 친족중에 이런 이름으로 한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거절을 합니다. 그래서 사가랴에게 직접 물어봅니다. 그러자 사가랴도 똑같이 요한이라고 서판에 씁니다.
여러분! 사가랴나 엘리사벳이 가문중에서 요한이라고 이름을 지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까요? 제사장 가문으로 태어나서 족보를 쭉 꽤고 있을 사가랴가 늙은 할아버지가 될 때가지 그것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가랴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가문에도 없는 이름인 요한이라고 아들의 이름을 짓고 있습니다. 가문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자기 명예를 생각한다면 사가랴로 지어야 합니다. 또 좀 양보를 한다고 해도 ‘사가랴 요한’ 이라고 해서 자기 집안도 넣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름도 넣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들의 이름을 요한으로 짓고 있습니다. 자기 집안의 명예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가문의 이름을 포기하고 요한이라고 이름을 지었을때 사가랴가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문의 이름, 자기의 혈육을 잇는 이름을 포기하는 댓가를 지불했을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댓가를 지불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무언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럴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댓가지불을 정확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너는 이제부터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되어라는 말씀으로 되었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를 하셨지만 우리를 구원하는데는 말씀으로 하지 않았어요. 우리를 마귀에게서 데리고 오는데 그만한 댓가를 정확하게 지불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피값을 정확하게 지불하고 우리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값을 사단에게 주고 우리를 정당하게 합법적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댓가 지불이 정확했어요. 하나님은 이렇게 댓가지불이 정확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얼마나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느냐를 보시고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내려 놓을때 그때 만나 주시고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소중한 것을 내려놓는 것이 하나님 앞에 댓가지불입니다. 우리가 내려 놓은 만큼 역사하십니다.

바울은 어떤 댓가를 지불했나요? 바울은 자신의 탄탄한 미래를 댓가로 지불했습니다. 율법학자로서 잘 나가는 사람이었는데 바울은 그것을 포기했습니다. 베드로는 고깃배를 포기했습니다. 베드로의 가정이 안정적인 생활을 하려면 베드로가 고기를 잡아야 생활이 안정이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배를 포기했어요.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포기했습니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댓가를 지불했을때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사가랴는 가문의 명예를 댓가로 지불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포기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댓가를 지불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 위해서 어떤 댓가를 지불하고 있느냐 는 것입니다.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댓가를 지불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어요.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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