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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삼상 6: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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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은데 10년째 강아지를 키우고 있는 어떤 가정의 강아지 이야기입니다. 깜비라는 이름을 가진 그 강아지는 사람들의 말을 너무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 강아지는 자기 이름 외에도 알아듣는 말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맘마, 치즈, 아이스크림 등이 있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말이 들리기만 하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제 때 주지 않으면 빨리 내놓으라고 옷자락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또 싫어하는 말들도 잘 알아들어 미용이나 목욕 등 자기가 싫어하는 말은 너무도 싫어했습니다. “깜비, 목욕 좀 시켜주세요.” 라고 하면 이 강아지는 침대 밑에 숨어서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서는 강아지가 듣는 용어를 바꾸었습니다. 치즈를 부추라고 부르고 목욕을 숙제라고 불렀습니다. 강아지를 목욕시킬 때는 “깜비, 목욕 좀 시켜주세요.” 라는 말 대신에 “깜비, 숙제 좀 해주세요.”라고 해야지 강아지가 숨지 않았습니다. 강아지도 한 10년쯤 키우면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듣는가 봅니다.

신앙생활 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속내를 좀 읽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아!” 하시면 척 알아듣는 기독교 신자가 되려면 어느 정도 신앙생활 하면 될까요? 하나 더 생각나는 것은 신앙생활의 연륜이 많아진다고 그것이 가능해질까 라는 것입니다. 신앙연륜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이나 속내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에 따라서 틀린 것인지 이것을 한 번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에 끌려갔다가 그 곳에서 아주 무서운 일을 했습니다. 블레셋을 다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견디다 못해 일곱 달 만에 이스라엘로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란 동네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동안의 소문을 다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이 났습니다. 뒤집어 놓고 엎어 놓고 난리를 부린 하나님의 궤가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신이 나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아하던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라는 동네에서 또 무서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호기심 때문에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7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블레셋에서 그렇게 무서운 일을 한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에 와서 또 그러니까 이들이  놀라 이웃 동네에 연락해서 자기들이 죽게 생겼으니 법궤를 빨리 좀 모시고 가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인디아나 존스와 같은 영화에 법궤를 찾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보통사람들은 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법궤에 대해 호기심이 많이 날 것입니다. 법궤는 성소를 지나서 성소 안쪽 깊은 곳 지성소에 있습니다. 일반 제사장은 물론 보통 사람들은 전혀 보지 못합니다. 단 한사람 대제사장만 그 곳에 들어갈 수 있는데 대제사장도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 년에 한 차례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궁금해 하겠습니까? 게다가 이때는 법궤가 블레셋에서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했습니까? 전쟁할 때는 아무 능력이 없는 듯이 도와  주지도 않고 그냥 끌려가더니 블레셋에 가서는 다곤의 신상을 넘어뜨리고 목과 팔을 부러뜨려서 몸뚱이만 남게 하였고 어느 지역에서는 전염병이 돌아서 사람들이 수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옮겼더니 그 곳에서도 전염병이 돌고 사람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도 그랬습니다. 세 군데에서 다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돌아올 때는 그냥 돌아오지 않고 멋지게 돌아왔습니다.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은 새 수레를 만들어서 거기에 아주 값진 금으로 만든 여러 가지 보물을 정성껏 준비해서 이스라엘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로 돌아온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궁금하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든지 호기심이 있기 마련입니다. 보고 싶고 알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일종의 욕심입니다. 웬만한 성자 아니면 사람이면 욕심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욕심이 있다고 다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채워야 할 것도 아닙니다. 호기심이 있다고 다 채울 수 없는 것입니다. 보고 싶고 가지고 싶고 알고 싶다고 해서 다 채울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인생이란 그런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이것만 알아도 행복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해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데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 욕심을 내기 때문입니다.

욕심이란 다 채우지 못합니다. 자식을 대할 때에도 사람들은 흔히 다른 사람에게는 그만하면 됐지 않느냐고 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식에게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98점을 받으면 그까짓 2점을 더 채우지 못하느냐 100점을 채우라고 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조금만 더했으면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하고 욕심을 냅니다. 남편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사실 인생을 잘 생각해 보신 분은 아시겠습니다만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문제이겠습니다만 사실 그 다음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많아봐야 또 적어봐야 비슷비슷합니다. 그런데 남편보고 자꾸 돈을 더 벌어 오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남편이 자꾸 더 높이 올라가기를 바라게 되고 그 결과 이렇게 저렇게 못된 일도 하고 잘못된 일도 하게 됩니다. 욕심으로 한 평생 따라 가다가 한 번도 누리지 못하고 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인생이 아니다. 그것이 행복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한다고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맨 첫머리에서 선악과라는 것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셨습니까? 선악과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먹고 나면 뭐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수많은 과일 가운데 이것 하나만은 먹지 말라고 그냥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한계를 알도록, 인생이란 것이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한계를 가르치기 위해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선악과를 가지고 인간은 한계가 있는 존재이니 한계를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한계를 알지 못하면 정말 만족감이나 행복감이 없습니다. 고마운 것이 없습니다. 항상 내게 있어서 제일 좋은 시절을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면 제일 예뻤을 젊은 때를 생각하는데 나이가 들면 늙어 가는게 당연합니다. 뭘 그렇게 힘을 쓰고 애를 씁니까? 그냥 대강대강 살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 필요한 돈도 점점 적어집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 갈수록 원금은 하나도 까먹지 않으려고 하고 가지고 있는 돈을 하나도 줄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니까 만족함이 없습니다. 자꾸 더 벌려고 하고 최소한 가지고 있는 원금을 유지해야 안심을 합니다. 이런 돈으로 무슨 인생을 살겠습니까? 그러니 만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 마음 훈련을 좀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은 한계가 있는 존재들이라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있는 한계가 있고 나에게만 특별하게 있는 한계가 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노래를 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노래를 좀 잘하고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것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잘하지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말을 해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얼굴이 좀 못난 사람도 있고 키가 좀 작은 사람도 있고 눈이 한쪽이 좀 비뚤어진 사람도 있고 코가 좀 못난 사람도 있습니다. 자식이 좀 잘 못되고 남편이 좀 잘 못되고 아내가 조금 시원찮은 그런 한계가 다 있다는 말씀입니다.

나에게만 있는 한계도 있습니다. 인간 자체에 있는 한계, 나라는 사람 자체에만 있는 한계, 우리 집안과 가정의 문제가 다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우리가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다만 모든 노력을 다하고 난 뒤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내 분복이라고 만족할 줄 알고 그것에 그칠 줄 알아야 하는데 평생을 붙들고 가면 아닌 말로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격입니다. 젊은이들도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좀 넉넉하게 주시면 그대로 받고, 어떤 때 주시지 못하면 그런대로 받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주신다고 해도 “이만큼 공부시켜 주었으면 됐습니다.” 라고 할 줄 알면 좋을텐데, 어떻게 하면 친정이나 시댁에서 좀 더 받아 올 수 있을까 하고 처갓집의 덕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하는 젊은이를 보면 좀 창피스럽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다 어른들이 가르친 것입니다. 젊은이는 어른들의 거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런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그것이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을 수 있는 것같이 보인다고 다 먹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같이 보인다고, 또 실제로 할 수 있다고 해서 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이 있다고 내 돈 내가 마음대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것이 내 돈입니까? 하나님의 돈입니다. 이게 기독교 신자들의 돈에 대한 철학입니다. 어떻게 내 건강이며 어떻게 내 입입니까? 모두 하나님의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하나님이 빼앗아 가십니까?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할 때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볼 수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주례 볼 때에 젊은이들에게 서로에 대해서 다 알려고 하지 말고 다 보려고 하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볼 수 있어도 좀 남겨놓아야지 내 남편이 내 아내가 귀한 줄을 압니다. 일일이 다 알려고 하면 늘 마음속에 만족감이 없습니다. 왜 아내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느냐고 하지만 다 사유가 있습니다. 남편이 왜 나하고 상의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상의 할 것도 있고 상의 못할 것도 있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것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악과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렇게 70명이나 참변을 당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한계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법으로 법궤는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이 정도는 다 알았어야 했습니다. 다 그렇게 가르쳐 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더라도 법궤 한 번 들여다봤다고 70명이나 한꺼번에 참변을 당하게 하시나 좀 심하신 것 아닌가 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20절)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들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선악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악과를 다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이 동산의 모든 과일은 전부 다 먹을 수 있는데 가운데 있는 선악과 하나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먹었습니다. 이때에도 그 과일 하나 먹었다고 그렇게 심하게 쫓아내시나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했다고 하여 반드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은 다 먹어도 되는데 이것만 먹지 말라, 다른 것은 다 봐도 되는데 이것은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무섭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게 했으면 뭐든 좀 먹을 수 있겠는데 다 먹을 수 있는데 이것만은 먹지 말라, 이것만은 보지 말라고 했으면 그것을 좀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먹은 것, 하나님께서 분명히 법으로 법궤는 들여다보지 말아야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들여다 본 것은 하나님을 무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나님을 귀하게 여긴 것이지,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로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눈치를 봐서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너무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선악과를 먹고 난 뒤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더 좋아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괜히 눈만 밝아져서 옷 벗은걸 알고 옷 입어야 하고 귀찮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법궤를 들여다보아서 무엇이 좋아졌습니까? 법궤 안에 이것저것 많은 것 같습니다만 실제로 별 것 없습니다. 조그마한 항아리가 하나 들어 있다가 그것도 나중에는 없어지고 지팡이 하나 들어 있는 정도인데 왜 그렇게 그것을 들여다보려고 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그것을 듣고 우리도 못 보는 것이 있어야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으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님에 대해서도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너무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불같이 화를 내시는 때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 좋은 것을 다 주십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내가 아무리 소원하더라도,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만은 꼭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법궤로 인해 70명이나 당한 이유는 블레셋에 비하면 별 것 아닙니다. 법궤를 농락한 블레셋 사람들에 비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한 일은 정말 별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번 들여다 본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무서운 벌을 내린 이유는 이것을 봐서는 아니 된다는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에 더해서 하나 더 있습니다. 알아야 할 사람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알아야 할 것을 마땅히 알만한 할 사람이 알지 못하는 죄가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이스라엘이 그럴 수가 있느냐? 내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내 말을 그렇게 귀담아 듣지 않느냐? 이 하나님의 씁쓸함과 속상함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주님도 누가복음에서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47~48). 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셨으면 이것을 알아야 되는데 그렇기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십니다.

벧세메스 사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몰랐던가를 보여주는 것이 그 뒤의 법궤에 대한 일입니다. 70명이 죽고 나니 벧세메스 사람들은 놀라서 이웃에게 연락해서 블레셋으로 빨리 가져가라고 말했습니다. 기껏 생각한 것이 이방 사람들이 한 잘못된 것을 배운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 밖에 배우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20절)라고 하였는데 지난 번 블레셋 사람들과 똑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방 사람에게서 배우고 있었습니다.

요즈음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의 유행을 따라 가는 일이 많은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땅투기를 한다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거기에 붙어 투기를 하는데 그 돈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 줄 것 같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머리에 띠 두르고 데모하면서 지역 이기주의를 부추기는 일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따라할 일이 아닙니다.

어디든 가서 예수 믿으면 되지 자꾸 우리 교회에 사람을 모으려고 할 것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이라면 모든 노력을 들여서 전도를 해야 하겠지만 예수 잘 믿는 사람을 우리 교회에 끌어들여 모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이야기 입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육관 시설이 좀 부족하면 시설이 잘되어 있는 교회에 보내어 거기서 신앙생활 하게 하면 됩니다. 자꾸 우리 교회로 끌어 모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같은 교회입니다. 하늘 아래 교회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닙니다. 기업하듯이 자꾸 교회가 커 나가기만 하면 뭐 하겠습니까? 나중에 교회가 술집이  되는 꼴을 볼지도 모릅니다. 적당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나름대로 교회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것을 가져야지 교회가 자꾸 세상 사람을 따라가서는 아니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벧세메스 사람들도 그러했던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구제나 기부금 등 교회의 좋은 것을 보면 배우려고 합니다. 그러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거꾸로 세상 사람을 보고 배웁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보고 무엇을 배웠습니까? 그들은 애굽인과 바로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재앙을 내린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6절) 라고 생각하면서 잘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껏 블레셋 사람들의 잘못 된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애물단지로 여긴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하나님을 애물단지로 여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이 정말로 애물단지 입니까? 하나님에게 잘못 보이면 뒤통수 맞을 것 같아서 예배당에 나오고 신앙생활 하고 귀한 일을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정말 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이사할 때 손없는 날을 잡아 귀신을 피하듯이 우리 하나님도 그렇게 피할 애물단지 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물론 하나님도 회초리를 때리고 화를 내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회초리나 화나 징계는 어쩔 수 없을 때만 하지 될 수만 있으면 회초리를 들지 않습니다. 열군데 중에서 맞을 곳이 아홉 군데고 한 군데라도 괜찮은 데가 있으면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봐 주십니다. 얼마나 좋은 하나님이십니까? 어쩔 수 없이 때리실 때는 정신 차려서 이제는 더 맞을 짓 하지 말고 당신이 주는 복을 다 받아 누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든지 복을 주시려고 합니다. 한 곳이라도 괜찮은 구석, 복 받은 만한 곳이 있으면 다른 곳을 보지 않습니다. 그것만 보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입니다. 복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이십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복을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어떻게 하든지 간에 여러분을 풍성하고 강건하게 해주고 싶은 하나님 이십니다. 여러분 다시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다 잘못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복의 하나님이시고 화평의 하나님이시고 평화의 하나님이시고 주고 싶은 하나님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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