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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희년의 축복 (레 25: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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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레위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레위기를 간과 양파의 책(The book of liver and onion)이라고 합니다. 간과 양파는 몸에는 좋은 음식입니다. 그러나 먹기는 어려운 음식입니다. 레위기를 간과 양파의 책이라고 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 우리 영혼에는 유익한 책이지만 읽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고 소화해 내기도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 가운데 레위기만큼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드러내고 있는 책도 드물 것입니다.

특별히 레위기 25장의 희년제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경제적인 약자나 사회적인 약자를 얼마나 돌보시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극치를 보여주는 제도입니다. 희년은 그 정신도 중요하지만 제도도 중요합니다. 만약에 인간사회가 희년제도를 시행했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공산주의 사상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산주의와 같은 좌파사상이 왜 오늘날 21세기에도 만연하고 사라지지 않습니까? 그것은 좌파가 경제적인 약자에게 매력적인 것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약자들에게 땅과 소유를 재분배 해준다는 것은 얼마나 듣기 좋은 소리입니까? 그러나 기독교는 공산주의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은 무신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신론사상을 가지고 물질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토지와 소유의 재분배를 소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고 하는 폭력적 방법에 의존해서 실현하려고 합니다. 그러한 방법 또한 기독교와 결
코 양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들은 오늘날 경제적인 약자들에게 “재분배를 해주겠다. 나누어 주겠다. 재출발의 기회를 주겠다.”고 말합니다. 마치 성경 희년제도가 제시하는 것과 비슷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21세기에도 그 뿌리가 없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사회가 오늘 레위기 25장의 말씀처럼 희년제도를 제대로 시행했다고 한다면 공산주의는 우리 사회에 결코 뿌리 내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1. 희년의 사회적 의미

희년은 언제 시행되는 것입니까? 본문 10절 말씀에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희년은 제 오십년째 입니다. 그러니까 100년에 희년은 두 번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에 농사를 지어도 무한정으로 짓지 않았습니다. 일년 농사를 짓고 칠년마다 안식했습니다. 소위 토지의 안식년 제도를 시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년이 되면 땅을 갈지도 아니했고 씨 뿌리지도 아니했고 포도나무를 전지하거나 가꾸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러면 땅에 저절로 씨가 떨어져서 나는 곡물은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그냥 놔두고 주인도 먹을 수 있고, 객도 먹을 수 있고, 종도 먹을 수 있고, 거지도 먹을 수 있고, 짐승도 먹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니까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희년이나 안식년이 되면 밭에 가서 직접 따서 먹으라는 것입니다. 추수하고 저장해서 먹지 말고 직접 밭에 가서 밭에 있는 그대로 먹되,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년이라고 하는 제도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도 하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토지의 비옥도를 유지하고 짐승도 구제하는 그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한국도 토지 안식년 제도를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은 토지 안식년 제도를 시행합니다. 6년을 농사를 지으면 1년은 쉬게 합니다. 그리고 국가에서 그 일년 쉬는 데에 대한 돈을 지급합니다. 그러니까 땅이 산성화되지 아니하고 계속 비옥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비료를 뿌려가면서 농사를 짓다보니 땅이 산성화되고 나오는 농작물도 산성화되고, 그런 음식을 먹다보니 우리 몸도 산성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알레르기 아토피나 암 등의 병이 생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토지 안식년 제도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실현을 해야 하는 성경적인 제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년이 7번째 되는 해, 49년째가 되는 해의 대속죄일은 유대인 월력으로 치면 7월 10일입니다. 우리 달력으로 치면 10월이 됩니다. 그 해 대속죄일 때에 나팔을 붑니다. 이스라엘의 나팔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은으로 된 높은 소리가 나는 나팔이고 하나는 양의 뿔로 만든 나팔입니다. 희년은 제 49년째 대속죄일의 양각나팔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 50년째 일년 내내 희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이라고 하는 것을 영어로는 양각나팔을 의미하는 ‘jobel’ 에서 시작해서 ‘jubilee’ 라고 합니다. 한자로는 기쁠 희(僖)자를 써서 ‘희년’이라고 합니
다.

그런데 49년째도 안식일이기 때문에 50년째 안식일을 ‘대 안식일’(super sabbath)라고도 합니다. 결국 토지는 49년째도 안식을 하고 50년째에도 안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질문을 합니다. “그렇게 2년 동안 농사를 짓지 않으면 무엇을 먹고 삽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답을 주셨습니다. 25장 20-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혹 너희 말이 우리가 만일 제 칠년에 심지도 못하고 그 산물을 거두지도 못하면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내가 명하여 제 육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년 쓰기에 족하게 할지라” 그러니까 희년을 지키기 위해 2년 동안 농사일을 놓
는다면 48년째 되는 해에 하나님이 풍년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믿고 49년도 쉬고 50년째도 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저들이 내 말을 그대로 믿고 쉬는구나” 하고 48년째에 그 삼년의 양곡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식하라고 하시면 안식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하지 않아도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왜 일하십니까? 그냥 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7일에 일을 하면 6일 동안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6일 동안 복을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7일째 일을 하고 복 못받으시겠습니까? 이것이 믿음의 시금석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내려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희년이 되면 시행하는 제도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희년은 자유를 공포하는 것(proclamation of liberty) 입니다. 10절에 보니까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무엇을 공포합니까? 자유입니다. 제 자리를 떠난 사람, 집을 떠난 사람 땅 팔아서 돌아갈 땅도 없는 사람들 토지를 잃고 헤매는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다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부자도 가난한자도 권력자도 약자도 그 본래의 땅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본래의 땅을 ‘기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요벨의 나팔소리는 귀환의 소리요, 회복의 소리요, 해방의 소리인 것입니다. 희년에는 자유의 선포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희년은 토지소유를 원상태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아버지와 형 에서의 미움을 피해서 외삼촌이 사는 밧단 아람으로 갈 때에 벧엘에서 하룻밤을 자다가 사닥다리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에서 깨고 나서 뭐라고 말합니까? 창세기 28장 16-17절에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도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The presence of God), 하나님의 전(The temple of God), 하늘의 문(The door of heaven)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요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하는 것은 그 땅 안에 있어야 하나님을 체험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땅을 떠나게 되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땅을 얼마나 귀중하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래서 지금도 아랍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그 땅을 사이에 둔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 노예생활 할 때에 가나안 땅에 살지 못했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나와서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다가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열두지파가 그 땅을 제비뽑기로 배분했습니다. 각 지파가 그 땅을 배분 받게 되었는데 그 땅을 가리켜서 ‘기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기업으로 받은 땅은 그 소유주가 하나님입니다. 23절입니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토지를 배분받았어도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토지를 관리하는 사람이요 나그네로 우거하는 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토지를 배분받은 사람이 살다가 가난해서 죽게 되었다고 하면 팔수는 있었지만 영영히 팔 수 없습니다. 영영히 팔지 못한다는 것은 팔기는 팔되 영구히 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팔았던 토지는 나중에 돈을 벌어서 살 수 있습니다. 또 친척 중에 돈이 많은 사람이 있으면 잃어버린 땅을 돈을 주고 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토지 무르기’라고 말합니다. 24절을 읽겠습니다.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이것이 토지 무르기, 땅 무르기(Property redemption)입니다. 누가 하나님께 기업으로 받은 땅을 가난해서 팔았을 때 그 사람의 동족이나 친척이 돈을 주면서 그 땅을 다시 찾고자 할 때에는 물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토지 무를만한 돈도 없고 부자친척도 없으면 50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50년째가 되면 토지를 구입한 사람은 무조건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난해서 토지를 판 사람도 희년만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희년이 오면 다시 받아서 처음부터 다시 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출발의 기회를 주는 것이 희년입니다. 참 좋지 않습니까?

세 번째로 희년은 주택 소유를 원상태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집을 짓고 살다가 가난해서 집을 팔았다고 한다면 집을 산 사람은 희년이 되면 그 집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성벽을 둘러서 성 안에 있는 집은 일년 안에 무를 수 있고 일년이 지나면 산 사람에게 영구히 돌아가게 됩니다.
그 예외를 제외하고는 토지도 주택도 희년이 되면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제도를 실시하는 사회에는 복지가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재출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희년은 노예를 해방하는 것입니다. 39-40절 같이 읽겠습니다.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우거하는 자같이 너와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 사람이 너무 먹을 것이 없으면 자기 몸을 팔아 노예로 살더라고 먹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노예제도는 악하다고 하지만 죽는 것보다 나은 것입니다. 그러나 노예가 되어도 무한정 노예로 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동족을 노예로 삼으면 그 노예를 친구처럼 대하라는 것입니다. 우거하는 객처럼 대하고 종으로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종에게도 인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식당에 가서도 종 취급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종도 품꾼이나 우거하는 자같이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희년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희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만 첫째로는 토지 소유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토지를 많이 등기 해놓고 있어도 그것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경제적인 불평들을 해소해서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사회에서도 가난한 자 강자 약자 다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요 성경적인 복지사회입니다. 또 사회적인 불평등을 해소해서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한 사람이 토지에 토지를, 가옥에 가옥을 연하게 해서 모든 것을 소유하는 탐욕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을 한 사람이 다 갖는 것을 경계하십니다. 그것은 탐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희년이라는 제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것이 믿음의 시금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7년째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
성에게 마음껏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년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고, 희년은 한번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구약 역사 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희년을 지켰다는 이야기가 단 한차례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년을 안 지킨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이런 제도를 시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희년 제도는 대단히 이상적인 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보여주신 것은 이렇게 이상적인 제도가 인간 사회에서는 죄성으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년을 안 지키고 희년도 안 지키면 하나님이 당하고만 계십니까? 아닙니다. 인간이 안 지키면 하나님은 강제로 찾으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70년간 포로된 것입니다. 왜 포로 되었습니까?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식년을 지키지 않은 햇수가 70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빼앗으신 것입니다. 역대하 36장 21절에 보면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사회가 이 희년 제도를 실시했다고 한다면 우리 인간사회는 참된 복지사회의 모델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제도가 인간 사회에 많이 적용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죄성은 이런 복지사회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간의 죄성 때문에 인류가 존재하는 한 이런 유토피아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나의 새로운 나라를 계획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입니다.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만 들어가는 나라요, 그 나라는 영원한 복지국가입니다. 죽지도 아니하고, 굶는 자도 없고, 노예 된 자도 없고, 병든 자도 없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계획하시고 이루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조건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섬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토록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유토피아입니다. 인간은 유토피아를 이룰 수 없습니다.

2. 희년의 영적 의미

그런데 희년이라고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이루어 질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거기서 끝내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희년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희년을 규정하고 있는 곳이 두 구절이 더 있습니다. 하나는 이사야서 61장 1-3절까지요 또 하나는 누가복음 4장 18-19절입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기도를 하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맨 처음 들어간 곳이 나사렛입니다. 회당에 들어가셔서 성경을 봉독하고 성경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이사야서 61장 1-2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이 누가복음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을 보겠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나사렛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사명 선언문입니다. 첫째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 둘째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는 것, 셋째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는 것, 넷째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해, 희년의 축복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희년을 사회적으로 해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희년을 영적으로 해석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제 인간사회에 희년이 선포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인간 사회에 희년을 들여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희년을 지금 맞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희년은 오십년 만에 오는 것이 아니요 예수님과 함께 온 것입니다. 영적인 희년은 일년간만 계속 되는 것이 아니요 은혜의 시대 내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마귀에게 포로 되고, 죄에 눌려서 진리를 보지 못하고, 진리를 알지도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에게 이제 구원의 때, 자유의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죄에게 눌려 살지 말고, 자유의 때가 왔으니 예수 믿고 마귀와 죄로부터 자유 하라는 것입니다. 희년은 예수님 때부터 지금까지 연속해서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보라 지금은 구원의 때요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로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가 희년의 때라는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고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죄를 속죄하실 때에 그 때 이미 속죄일의 나팔 소리가 울린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의 선언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죄인들아 마귀에게 종 된 자들아 죄를 회개하고 내게로 오라 이제는 마귀에게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라 돈 없이 값없이 와서 이 자유를 사라”하고 말입니다.

결론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여 하심이니라”(사 61:3) 희년이 되면 재만 남은 인생이 화관을 쓰게 됩니다. 슬픔 대신 희락의 기름을 부어주시고 근심 대신 찬송의 옷을 입혀 주시고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낼 의의 나무가 되게 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 예수 믿지 않는 분 있습니까?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입니다. 돈이 많고 권력이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입니다. 희년을 체험하지 못하고 마귀와 죄의 노예 노릇을 하고 있는 인생인 것입니다. 예수 안 믿으면 그런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믿으시고 영적인 희년을 맞이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미 믿으신 분들은 희년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노예에서 해방되었는데 왜 또 노예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슬픔에서 해방되었는
데 왜 슬퍼합니까? 우리는 근심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찬송의 옷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희락의 기름으로 부은바 되시고, 재만 남은 인생에 화관을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며 사시고, 여호와의 영광을 전파하는 의의 나무가 되어서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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