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로마행 특급 하루시스 (행 21:17-36)

  • 잡초 잡초
  • 299
  • 0

첨부 1


< 재생 불량성 빈혈증도 미국 가는 비행기 표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 >
결정된 인생길을 가는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제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바울에게
성령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을 통해
“ 예루살렘에 가면 환난과 결박이 기다린다 ” 고 하면서 여러 번 만류하였으나
“ 예루살렘에서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 하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습니다.
이렇게 결정된 인생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성공이냐 실패냐? 편하냐 고생되느냐? 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록 예루살렘에 가서 쇠사슬에 묶인 죄수가 되지만
결정된 인생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그 쇠사슬-‘하루시스’도 로마행 특급 열차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예루살렘 교회의 반응이 어떠했는가 하면

2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바울을
17절에 [ 형제들이 기꺼이 영접했다 ] 고 합니다.
그리고 이튿날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요 총회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장로에게 문안을 하고
거기서 자신의 사역을 통해
이방인들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합니다.
그러니 20절에 [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 고 합니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을 돌아보면 바울 사역에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1) 이방인에게 주어진 성령 사건이요
2) 제자 양육이었습니다.
특히 에베소 두란노 서원에서의 제자 양육은 말씀이 세력을 얻어
당시 만연한 미신과 타락의 고린도 풍조를
하나님의 경외하는 영적 분위기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런 사역을 보고 했을 때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전도자들을 교회가 영접하고 환영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선교사님들이 돌아올 때 영접하고 환영하는 교회가 되시기...
이렇게 밖에서 사역하고 돌아온 바울의 모습이나 사역의 보고는 <2>
한 마디로 성령충만하여 펄펄 끓고 있었는데
막상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임했던
불같은 성령의 역사가 이제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모습니다
도리어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경화로 말미암아 겁에 질려 있는 모습입니다.
바울의 보고를 들은 야고보 장로가
바울의 간증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도
바울에게 조심스럽게 염려스러운 주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20절에 보니
[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
바울의 간증을 듣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율법주의 신앙 때문에
저억이 염려스러웠던 것입니다.
바울이 3차전도 여행을 마치고 유월절에 맞추어 돌아오려고 했지만
여의치 못하여 오순절에 도착을 했습니다.
당시 기록에는 오순절 절기 때
각국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약 200만 명 가까이 모였다고 합니다.
오늘 야고보도 유대인 중 믿는 자 수만 명이 모였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믿는 자들이 모였으면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가 되어야 하는데
야고보는 정 반대의 말을 합니다.
21절 [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
지금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 야고보가 걱정하는 것은
1) 예수를 믿지마는 율법의 행위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이
오순절 절기인 지금 예루살렘에 수만 명이 모여 있다는 것입니다.
2) 그들은 모두가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입니다.
바울이 외국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모세의 율법을 배반하고 아이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라
그리고 율법의 규모를 지키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야고보가 염려하는 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 것을
저희들이 다 들었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이런 상황들이
지금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의 마음을 편치 못하게 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오순절 성령 사건이 일어날 당시 예루살렘 교회와
지금 예루살렘교회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그때는 핍박이 없었고 고난이 없었고 역경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때도 베드로 요한은 감옥까지 가서 눅신하게 두들겨 맞고
스데반과 제자 야고보는 순교까지 당했습니다.
그런데 뭐가 달라졌습니까?
뭐가 달라졌기에 교회가 이렇게 변해가고 있습니까?
왜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가 시간이 지나면서 침체되어 있습니까?
1) 지도자의 부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베드로도 없고 야고보 사도도 순교를 당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일군들
일곱 집사들도 순교당하고 또한 사방으로 흩어져 사역을 합니다.
교회는 어떤 지도자들을 만나고 세우느냐에 따라
부흥하기도 하고 침체하기도 합니다.
교회 지도자들 바로 세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지도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2) 시간적으로 침체의 시기를 맞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의 발상지 예루살렘 교회는 이제 30년가량이 지나게 되니
신앙적 분위기가 침체되어져 가고 있는데
밖에서 사역한 바울의 간증은 놀라운 일들을 보고합니다.
우리 교회도 올 해가 설립 30주년입니다.
내일의 가족 여러분 ~!
30년이란 시간은 한 세대가 바뀌어 지는 시간입니다.
30대가 60대가 되는 시간입니다.
60대가 되면 아무래도 신중하기는 해도 담대한 면은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30년 이란 시간이
교회를 성숙하게 만들었지마는 침체의 시간이란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안에서 침체되어 갈 때
밖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도전 받을 수 있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신앙이 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그때나 지금이나 핍박이나 환난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과 역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렇게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때는 성령이 충만했고 지금은 행정과 조직은 구비되어 있었지마는
담대함과 믿음은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기면서
이성과 상식과 경험의 틀 안에 머물고 있다면
그때부터는 신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성과 상식과 경험을 초월할 때부터
참된 신앙이라 할 수 있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 세상에 오셔서 처음 기적을
요2장에 가나 혼인 잔치에 베푸셨습니다.
사람들은 결례를 따라 포도주 여섯 항아리를 준비했지만
턱없이 모자란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고 합니다.
그리고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합니다.
갖다 주었더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하인들이 물을 갖다 붓기 전에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당부를 합니다.
[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
물이 포도주 변한 표적 - 여기에 상식이 통합니까? 경험이 통합니까?
이성적 사고가 통합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바로 상식과 경험을 초월할 때 제 맛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대안을 제시합니다.

먼저 23절에 [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 는 것입니다.
우리가 짠 각본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 각본이 무엇인가? 하면 23-24절에
우리에게 나실인으로서 하나님께 서원한 네 사람이 있는데
결례를 행하려고 하니 가난하여 못 행하고 있다
그러니 너희들이 경비를 내어 결례를 행하게 하면
많은 유대인들이 당신을 율법을 배척하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라 하지 않겠느냐? 는 것입니다.
당시 나실인으로서 결례를 행하는데는 희생제물을 바쳐야 하는데
그 제물로는 번제물로 일 년 된 수양 하나
속죄제물로 일 년 된 어린 암양 하나
화목제물로 일 년 된 수양 하나 그리고 무교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상당한 비용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제안은 야고보 장로도 유대인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은근히 율법을 지켜야 할 것을 바울에게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5절에 보면
[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메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 고 강조하면서
이방인 교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할 것을 총회가 결의하여 보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잘 쓰여진 각본 같습니다.
왜냐하면 괜히 충돌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각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선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못되는 대안인 것입니다.
왜 야고보가 제안한 대안이 신앙적인 각본이 아닌가 하면
사도행전 어느 곳에 보더라도
핍박이 일어나 환난의 폭풍이 일어나고
산헤드린 공회와 유대인들의 소요가 일어날 때
그때마다 초대교회는 천지의 주재가 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 가운데는 의논했다는 말은 있어도
예루살렘 교회가 이 문제를 두고 기도했다는 말이 없어요.
교회 앞에 문제가 있을 때
기도하는 교회는 그 문제가 되려 신앙의 성숙의 계단이 될 줄 믿습니다.

지난 2005년 경제계를 강타한 키워드는 ‘블루오션’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김 위찬 교수와 르네 마보안 교수가 집필한 ‘블루오션 전략’은
한국어로 소개되자마자 화제의 책이 되었습니다.
이 책은 미국에서 출간 후 1개월 만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00여개 국가에서 번역을 체결할 정도로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블루오션은 경쟁이 없는 시장입니다.
레드오션은 치열한 싸움이 벌어져 피투성이가 되는 경쟁시장을 의미합니다. 블루오션 전략이란 가치혁신을 통해 경쟁 없는 시장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대신 새로운 비경쟁 시장을 창출함으로써 경쟁 자체에서 벗어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레드오션과 블루오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신앙의 블루오션을 창출할 수 있는 길은 바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럴 때 예루살렘 교회가 30년 전과같이 함께 모여 기도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블루오션-바로 기도임을 명심합시다.

그런데 바울이 야보고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드려
결례의 비용을 들어 결례를 행하게 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유대인들과 충돌하는 것이 겁이 나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예루살렘에 올라올 때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야고보의 제안을 따른 것,
바울로서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되고 덕이 된다면 자기는 양보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양보하고 내가 좀 손해를 보고 내가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며
내가 희생하고라도 전체가 평안하고 전체가 유익이 된다면
십자가를 지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러나 이 양보의 결단은 단순히 화평을 위한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는
한 사람의 유대인이라도 더 얻고자 하는 바울의 전도 전략이지
결코 충돌을 피하기 위한 대안으로 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바울의 중심은 교회요 영혼구원이지
자기 안일이 아니라는 점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대안으로 결례를 행한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울은 돈을 들여 나실인의 서원의 모든 결례를 행하고
결례의 시간이 끝날 때가지 그들과 함께 있어면서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결과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각본대로 되었으면 소요가 진정되어야 할 것인데
27절 이하에 되려 유대인들이 충동하여 바울을 붙들어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이 선동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1) 모세의 율법과 성전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자 라는 것입니다.
2)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을 감정적으로 몰아넣기에 아주 적절한 위법 사항입니다.
사실 그것은 29절에서 말하듯이
얼마 전에 바울과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시내에 함께 있었던 것을 목격하고
그것을 보고 바울과 함께 성전에 들어간 줄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붙들어 성 밖으로 끌고가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바로 믿어야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 편할 것 같애도 그렇지 않구나 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눈에 들면 그로서 끝날 줄 알았는데 문제가 더 커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어도 지독하게 바로 믿어야지
적당하게 믿으면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문제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당하게 믿다보면 나중에 타협하게 되고
표면적 신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우리가 어느 때나 싸울 때 보면 표면상의 이유가 있고
그 이면에 더 본질적인 진짜 이유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겉으로 나타난 이유는
반 유대적인 행동과 반 율법적인 것과 성전을 더럽혔다는 이유였지만
진짜 이유는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그들의 시기 질투 때문입니다.
왜 유대인들이 바울을 그렇게 싫어하고 죽이려고까지 하는가?
이것은 하나의 미스터리인 것 같이 보이지만
사도행전을 다 공부해 보면 아하 이것이구나 하는 답이 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시기 질투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은 것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시기 질투 때문입니다.
시기 질투가 심하면 앞에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신앙이 좋다든가 인격이 고상하다든가 하는 것도 통하지 않습니다.
시기 질투가 심하면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안 되고
운동을 해도 무효라고 합니다.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인다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시기 질투가 있으면 사업을 해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해야 성공하는데
시기 질투심에 너무 꽉 붙잡히면 마음이 경직되어 하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붙들어 죽이려고 할 때에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을 들은 천부장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저들의 손에서 바울을 잡아 쇠사슬로 결박하여 영문 안으로 데리고 가라고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유대인들의 손에 죽게 되는 곤경에서
하나님은 로마 군인들을 동원하여 구해줍니다.
바울은 죽음 직전의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려두시지 않고
로마 군인을 동원하여 구출해 주신 것입니다.
사건의 긴박성을 느낀 백부장과 천부장은 군인들을 동원하여 달려왔습니다.
그러자 흥분하고 성난 군중들은 바울을 죽이려다가 죽이지 못하고 멈춥니다.
그 이유는 만일 그들 앞에서 돌로 쳐 죽이면
로마법에 의해&nbsp;그들이 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로마 군인들에 의해 바울이 체포됩니다.
로마 군인들이 바울을 체포한 것은 군중들로부터 바울을 보호하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죽을죄를 지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군대 진영에 얼마동안 갇혀 있다가
가이사랴로 옮겨져 미결수로 2년간 거기서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은 당장은 이러한 고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지만
후에 깨닫게 됩니다.
왜 이렇게 체포되고 갇히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 한편 원망스러웠지만
오랜 후에 그는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2년간 갇혀 있으면서 쓴 빌1:12절에서
[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
고 고백합니다. 얼마나 위대한 고백인가?
여기에 내가 당한 일이 무엇인가?
바울이 유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할 뻔했고
로마군인에게 체포되어 두 쇠사슬에 매여 결박당한 것을 말합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지내놓고 보니
그 사슬이 내가 로마로 가는 특급호 티켓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6:20절에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 내가 사슬에 매인 사신 ] 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난에 직면할 때
하나님은 왜 침묵만 지키고 계신가 하고 부르짖습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그 고난의 현장에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침묵 속에서 나를 위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고 계시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는 가장 큰 교훈은
바울이 참 억울하게 체포되어 하루시스에 묶이게 되었지만
이 하루시스 때문에
결국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바울의 꿈과 비전이 실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참 역동적인 드라마이요,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바울을 유대인의 폭도에서 로마군인들이 출동하여 구해준 것도 참 이상하고 놀랍지만 더 아이러니칼한 것은 그 쇠사슬 하루시스 때문에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그의 로마에 대한 꿈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참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역설입니다.
그 점에서 바울이 하루시스에 묶인 것도 가장 큰 역사의 모순이지만
그 하루시스를 통해 로마전도의 계획이 실현된 것도
더 설명하기 어려운 역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에는 이렇게 역설적인 드라마가 많이 있습니다.
요셉이 하루시스에 묶여 애굽에 팔려가지 아니했더라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자기를 하루시스로 묶었던 형들이 자기 앞에 엎드렸을 때도
창45:5절에
[ 형들이여 당신들이 나를 하루시스에 묶어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었나이다 ]

어떻습니까?
나는 그래도 바르게 신앙생활 하려고 하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데
예상치도 아니한 하루시스가 나를 결박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하루시스가
수험생 같으면 입시 실패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기업가 같으면 사업 실패도 될 수 있을 것이고
농부 같으면 한해 농사의 피농도 될 수 있을 것이고
때로는 질병이 내게 하루시스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재생 불량성 빈혈증도 미국가는 비행기 표로 만들어 주시고
바울을 꽁 꽁 묶은 두겹의 쇠사슬 - 하루시스도
로마행 특급의 티켓으로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