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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 중에 즐거워합시다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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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롬 12:12,13)

  거리에 살면서 돈을 달라고 하고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공격적인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플라스틱 가방을 여러 개 짊어지고 수년 동안 그 지역을 배회했습니다. 얼마동안을 그렇게 살다가 이 여인은 죽었습니다. 니키 검블 목사님이 장례식을 집례 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잘 차려 입은 몇 사람이 참석했습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인데 그 여인은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았었습니다. 호화로운 아파트와 값비싼 그림을 여러 점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쓰레기를 가득 넣은 가방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수년 동안 살아왔던 방식을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상속받은 유산을 즐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도는 그 이상의 것을 상속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온갖 풍성한 보화를 상속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세상에서 얻은 쓰레기들을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상속받은 하늘의 보물을 즐기며 살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주워 모은 쓰레기들을 속히 버려야만 합니다. 과감하게 버려야만 합니다. 

죄의 형벌 아래에서 인간은 참된 소망도 즐거움도 없습니다.

단테는 '지옥의 입구에는 이런 큰 글자가 새겨져 있을 것이다. 일체의 희망을 버려라.' 했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그것이 지옥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희망을 가져라)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완전한 행복과 축복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영광된 미래가 없다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는 것은 자신의 믿음을 견고히 하는 출발점입니다.

우리나라의 초대 교회사를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모릅니다. 초기에는 교역자도 귀했고 교회도 귀했습니다. 그래서 한 목회자가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또 당시에는 성경도 많지 않았고 글을 아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마을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에서 조사를 임명해 놓고서 예배를 드릴 때에 성경 을 읽게 했습니다. 당시에는 전깃불이 없으니까 호롱불 밑에서 조사가 성경을 읽고 설교를 했습니다. 한번은 경상도 지역의 어느 산골 교회에서 저녁 예배를 드리며 조사가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날은 시편 23편을 읽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이 말씀을 읽는데, 호롱불 밑이니까 글자가 잘 보이지도 않고 가물가물 합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조사가 이렇게 읽었습니다. "여호와가 내 목을 자르셔도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조사가 성경을 읽고서 생각하니까 그날 말씀이 너무 너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시작하면서 시편 23편을 1절을 인용합니다. "여호와가 내 목을 자르셔도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저는 죽어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온 교인들이 손을 내밀면서 "나 두요. 나 두요" 그랬다는 겁니다. “여호와가 내 목을 자르셔도 나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께 대한 소망 안에서 이러한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소망'(엘피스)은 일시적으로 더 좋은 것을 바라는 헬라적인 개념보다는 '확실한 소망'을 나타내는 히브리적 개념입니다. 이는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 것이 분명합니다.

  도덕이나 수양을 통해 사람이 이 땅에서 편안함을 얻을 수도 있으나 굳이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인간에게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미래와 영생의 보장이이요 영광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골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합니다.

  소망으로 인내 하는 교회라는 표어 아래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교회로 생활 목표를 정했습니다.

  부활의 소망 중에 즐거워합시다.

(벧전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영원한 삶을 소망합니다. 그래서 종교를 찾거나 불로초를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이게 기독교는 바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셔서(고전 15:23)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혼뿐 아니라 육신까지도 완전한 영생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소망을 가지는 자는 이 땅의 환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으며 믿음을 굳게 지킬 것입니다.

6.25동란이 한창 치열할 때였습니다. 한번은 미 해병대 장병들 상당수가 갑자기 들이닥친 중공군에 의해서 포위를 당했습니다. 양 사방에서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미군 병사들의 시체가 여기저기에 널려 있습니다. 살아 남은 병사들도 참호 속에 갇힌 채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곧 닥쳐올 죽음의 공포로 인해서 떨고만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종군기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그 와중에서도 기자 정신을 발휘했습니다. 떨고 있는 옆의 병사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일 이 시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당신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고 물으신다면, 당신은 어떤 요청을 하시겠습니까?" 그때 그 병사는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 오직 나에게 내일을 주십시오(Just give me tomorrow,)." 다행스럽게 그들은 포위망을 뚫고서 극적으로 살아났습니다. 훗날 그 기자는 똑같은 제목의 기사를 써서 언론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퓰리쳐 상을 수상할 수 있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내일을 소망 했다면 영원한 절망 가운데서는 부활의 아침을 소망해하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천국의 소망 중에 즐거워합시다.

(딛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합니다.

부활이 있어도 그 부활 후의 삶이 여전히 고통스럽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부활과 함께 우리에게 영광된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부활의 날에 '사망과 애통과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계 21:4) 영광된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 천국의 소망은 현재의 어떠한 고난조차도 즐겁게 만들며 초개같이 여기게 할 것입니다.

과거를 보면 슬픈 일들이 많고, 현실을 보면 위험한 일들이 많지만 소망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는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롬 5:2).

(시71:14)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지금은 마음이 곤고하고 괴롭고 슬프고 또 하나님의 축복이 안 보이는 것 같아도 소망 중에 즐거워합시다. 과거의 슬픔이 있다고 거기에 잠겨 있지 말고, 현실이 괴롭다고 낙심하지 말고, 소망 중에 좋은 것을 꿈꾸며 즐겁게 살 때 더 좋은 일이 있게 될 줄 믿습니다.

(딤전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 됩니다.

하해룡 목사님의 장모님이 수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의 일만 생각하면 장모님의 훌륭한 신앙고백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의 집에 온 장모님이 심한 각혈을 하여 진찰을 한 결과 다발성 폐암으로 진단되었다합니다. 의사는 환자가 3개월 이상을 견디기가 힘들 것이라고 했으나 믿음과 인내로 일년을 견뎌내고 그 고통 중에서도 회갑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시골에 내려가서 장모님의 회갑 예배에 참여하고 올라온 어느 수요일 밤 설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 1시에 벌떡 일어나 장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수화기를 통해서 "하목사인가, 나는 지금 숨을 모아두어 쉬는 중일세. 지금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일세, 목사일 잘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만나세"라고 말하는 장모의 숨찬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합니다. 그때 목사님은 어머님 기도드리겠습니다. 수화기를 꼭 잡으십시오라고 부탁드린 후 하나님 아버지, 어머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서실 때까지 십자가를 놓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를 마치자 장모님은 하늘나라로 가셨다 합니다.

성도에게는 천국이 약속 되어 있습니다. 천국의 소망 가운데 즐거워합시다.

  환난 중에 참고 소망 중에 즐거워합시다.

  참으며(휘포메노)는 초기 기독교 문헌에는 참다 끝까지 견디다 '굽히지 않다'의 뜻으로 나타납니다(고전13:7;딤후 2:10;히 10:32;약 1:12). 참는다는 것은 단순한 인내를 말하기 보다는 소망을 바라보고 참는다는 뜻으로 종말에 취할 것을 미리 취할 것을 근거로 참고 나가게 됩니다.

소망은 과거도, 현재도 아니고 미래지향적인 것입니다. 사실 앞에 있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믿음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는 자는 환난과 핍박 중에도 기쁨을 잃지 않고 즐거워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옥에 갇혔는데도 옥중에서 주를 찬미하며 기도했습니다(행 16:25).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환난의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믿음을 지키고 자신을 다스려 구원을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권고합니다.

구원은 미래의 완전한 행복과 영생을 확증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죄의 영향 아래 있는 세상에서 성도들을 여전히 고통과 환난을 당하며 삽니다.

  이러한 가운데 고통과 환난을 참고 견디는 자는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합니다.

천국의 영광된 부활은 오직 그 믿음을 지키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행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환난은 모든 사람이 당하지만 특히 신자에게는 복음으로 인한 환난이 있습니다. (마 24: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따르려거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마 10:38).

그리스도께서는 이 환난을 통하여 영광된 보좌에 오르셨으므로 그와 함께 하는 후사인 우리는 그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합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참되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았으니 환난 중에 참고 견뎌야 합니다. (살전 1:6)“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합니다.

환난이 있을 때 세상적인 기쁨으로는 그 환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성령의 기쁨으로 환난을 참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환난에서 건져주시니 참고 즐거워합시다.

(행 7:10)“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환난 중에서 위로해주시니 참고 즐거워합시다.

(고후 1: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환난 중에 참고 갈수 있습니다. 사실 환난이 있을 때 주님의 위로가 더 크게 임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약할 때 하나님이 더 사랑해주시고 가까이하여 도와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종말에 대한 소망과 그 미리 취하는 일로 인한 확신으로 끝까지 견디는 힘을 공급받았으니 참고 즐거워합시다.

(히 7:19)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하나님이 주신 크고 놀라우신 소망인 뜻과, 계획이 이뤄지기 까지 어떤 환난에도 불구하고 참고 즐거워 합시다. 

(롬 5:3-5)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랜드 캐년은 콜로라도 강이 수천 년 동안 깎아내린 결과라 합니다. 또한 수 없이 반복되는 눈비의 시달림 속에 금강산의 절경이 생겨났고, 알프스의 장엄한 바위산들도 모진 풍상이 억 만 번 이상 스쳐간 흔적들입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자는 인내하므로 열매를 맺습니다.

(눅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심리학자 가운데 빅터 프랭클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나치 수용소에서 말할 수 없이 잔인한 고문과 무서운 형벌과 비인간적인 학대 속에서 나를 생존하게 만든 것은 희망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치의 무서운 고문을 받으면서 마음속에 이런 꿈을 키웠습니다. '이들의 무서운 고문의 시대가 언젠가는 끝난다. 그러면 나는 이 수용소에서 나가 내가 붙잡은 이 삶의 희망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해 주겠다. 이 끔찍한 고문을 넘어서서. 이 절망적인 환경을 넘어서서 저 건너편에 있는 희망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는 끝까지 이 고문을 견디겠다.' 그런 후 그는 극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는 정말로 지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이 삶의 의미와 희망의 의미를 말하는 위대한 심리학자가 되었습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믿고 "기도"합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선하고 크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어도 기도하지 않으면 성취될 수 없습니다. 

(겔 36:37-38)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 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제사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 정한 절기의 양 떼같이 황폐한 성읍에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힌 것이 인연이 되어 임금 앞에 서게 되었던 요셉과, 이세벨의 비방으로 인해 유명해진 엘리야, 헐뜯는 사울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다윗, 교황청 때문에 유명해진 루터 등을 기억하며 비방하는 자를 만나면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며, 오직 범사를 주께 맡기고 기도하며 소망을 이루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즐거움(카라- joy)은 내면적 기쁨으로 마음 깊이 자리잡은 즐거움입니다. 그것은 명랑한 마음의 상태를 일으켜주는 깊은 확신과 보증입니다. 그것은 활기찬 행동으로 이끌어주는 명랑한 심령상태입니다.

웹스터사전은 즐거움을 "감각이나 정신의 만족, 유쾌한 느낌이나 감정, 좋은 것을 즐기거나 기대할 때 생기는 기분" 이라고 정의합니다.

화학적으로 말하자면 즐거움이란 뇌에서 몰핀과 유사한 성분의 엔돌핀이 나옴으로써 행복감과 만족감을 의식하게 하는 작용을 말합니다.

소망 중에 사는 사람의 즐거움이란 동물적인 즐거움과는 아주 다릅니다. 소망을 주님께 둔 즐거움은 미래에 받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즐거움입니다.

(539장 1절) 이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 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91장 1절)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이름 믿으면 영원토록 변함없는 기쁜 마음 얻으리 예수의 이름은 세상의 소망이요 예수의 이름은 천국의 기쁨일세

이 찬송이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되 부활의 소망 중에 천국의 소망 중에 환난 중에 참고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모두가 됩시다.
(강성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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