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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께 예배하자 (요 4: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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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안에서 찾아보는 예배.
창세기 4장,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있습니다.
예배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그들의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드리는 행위였습니다. 3-4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드렸다.” 그것이 예배 행위입니다. 예배는 곧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드리고, 정성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생명조차도 드리는 것입니다.
또 창세기 4:26, “셋도 아들은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니,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 역시 예배의 모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역대상 26:29,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바로 그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함으로 영광을 돌리며, 예물을 드려 가장 가지 있는 것을 주께 드리며,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배는 처음부터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그래서 세상의 것들로부터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때부터 예배는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예배가 있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하여 당신의 피조물과 관계를 가지셨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3장, 유월절 전, 예수께서 곧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고 계실 때,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베드로의 차례가 되자, 베드로는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는 이 말씀은 너하고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가 뭔가 하면 예배라는 겁니다. 따라서 예배를 드리지 아니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배를 등한히 하는 사람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전등에 불이 들어오는 것은 전선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전선이 끊어지면 이 전등에는 불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 예배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전선이 끊어진 전등과 같습니다. 캄캄한 밤에도 밝게 불을 켤 수 없는 전등이라면 그 전등은 이미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있으면서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예배 없는 그리스도인, 예배를 등한히 하는 그리스도인. 이들은 모두 있으면서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그치기 시작하면 실패하고 타락하게 됩니다.
민수기 32:15,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또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
하나님을 떠난 사람, 그들에게는 고난과 멸망이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복’이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빠룩’입니다. 본디 ‘무릎을 꿇다’는 뜻인데, ‘예배하다’ ‘찬양하다’로도 번역이 되었습니다. 예배하는 그것이 곧 복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배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이 역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우리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 이 모든 하나님의 뜻은 예배에서 나타납니다.
열왕기상 18장, 갈멜산.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대결. 바알 선지자들의 예배에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30절 이하, 엘리야가 단을 쌓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번제물로 나무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단을 쌓고 번제물을 올려놓는 것, 그것은 구약의 예배의식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은 번제물을 불로 태움으로서 당신의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39절,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예배를 통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비로소 아는 것도 예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이 공급됩니다.
하나님의 성품 - 공의, 사랑, 거룩 등등 -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은 예배할 때 예배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사람은 변화됩니다. 성도의 사명, 핵심, 가치관 등은 예배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겁니다.
또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공급되어집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사도행전 2장의 성령임재, 그것은 사도들과 제자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쓸 때 임하는 사건이었고,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그래서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며, 떡을 떼며(성찬), 그리고 기도하는 것이 초대교회의 예배며, 그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 즉 성령을 체험하고 권능을 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였던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부흥된 겁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하고, 그래서 예배는 모든 것보다 우선합니다.
예배는 전도보다 우선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시면서, 성령임재 후 복음을 증거하도록 하셨습니다.
예배는 봉사보다 우선합니다.
말하자면, 주님으로부터 공급받는 힘이 있어야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할 수 있는 겁니다. 말씀과 예배를 통해서 공급받는 힘이 없으면, 전도하기도 힘들고, 봉사하기도 힘듭니다. 설사 한다하더라도 자기 생각, 자기 고집뿐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교회 나오세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나는 죄가 많아서.” “나는 술 담배 하기 때문에.”그렇게 대답합니다. 사실 그러니까 예수 믿고, 그러니까 교회 나오라는 거 아닙니까? 죄 없으면 왜 예수 믿겠어요? 내가 거룩하다면 왜 예수 믿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고, “나는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왔다”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하면 변화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예배를 통해서 역사됩니다. 왜냐하면 예배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공급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성품과 삶이 변화되는 겁니다. 참된 예배자만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든 다른 곳에 쓰지 않습니다.

세계의 역사를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세계사이고, 하나는 구원사입니다. 물론 기독교적 입장에서 나눈 겁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원사가 세계사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 물질 등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오신다면 세계사는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한 겁니다.
교회는 그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곳입니다.
영원한 구원에 대해 누가 가르칩니까? 어느 기관에서 가르칩니까? 시청에서? 법원에서? 영원한 구원에 대해 가르치고, 그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곳은 교회입니다.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1, 2년짜리가 아닙니다. 1, 2백년짜리도 아닙니다.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영원입니다. 그래서 내가 교회 다닌다는 것에 대해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가 있는데, 그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세계사를 지배하는 사건이면, 그래서 예배는 내 삶을 변화시키고 인도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를 드렸느냐 안 드렸느냐 보다, 어떤 예배를 드렸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의 종류를 말하는 것 아닙니다. 그 예배의 감격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예배는 참으로 신나고, 복되고, 가슴 뭉클한 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예배는 싱겁고, 따분하고, 지루하고, 그래서 빨리 끝나기만 기다려집니다. 똑같은 예배를 드렸는데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나에게 지금 참된 예배의 감격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처음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 어느 청년의 작은 편지가 기억납니다.
“처음으로 월급이라는 걸 받았습니다.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내 손으로 한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습니다.”
어떠세요? 월급 탈 때마다 이것 가지고 어떻게 사나 한숨 쉬지요? 다 써도 부족한데, 십일조 떼고, 감사헌금 하고, 뭐도 하고……. 짜증나지요? 거기에 무슨 감격이 있어요? 불평과 원망밖에 더 있어요?
예배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날 사랑하셔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크신 은혜를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감격이 없어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 대화하다 보니까, 아주 특별한 사람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자기가 그동안 정말 궁금하고, 꼭 알고 싶은 것을 예수께 말씀드립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 위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 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그 말에 대해 예수님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참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며, 하나님은 바로 그런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신령’은 희랍어로 ‘엔 푸뉴마’로서 ‘영에 의해 인도되어’라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장소나 기물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은 희랍어로 ‘엔 알레세이아’ 곧 ‘진리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그랬더니, 여인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줄 것입니다.”하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에게 말하는 내가 바로 그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진짜 대답입니다. 즉 여인이 알고 싶어 하는 궁금증에 대한 대답을 예수께서 해 주신 것입니다. 어느 산, 어느 장소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 바로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예배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까?
먼저 예배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가장 귀중한 시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예배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전도도 예배로부터, 봉사도 예배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는 것도 예배로부터입니다. 그래서 예배하러 가는 마음이 설레이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설레임,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는다는 기대감, 이런 것들로 예배 드려질 때 감격이 오는 것입니다.
예배는 나의 모든 것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 몸을 드려라.” 이것이 예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몸이 아니라 일부분만 드립니다. 오히려 그 몸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몸이 피곤해서” “몸을 움직이기 귀찮아서” “몸이 바쁘다 보니”

히브리서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믿음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왜 등한시 합니까?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것은 온전한 예배를 드렸다는 겁니다. 적당히, 아무렇게나, 내 기분대로, 그렇게 드려지는 게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예배를 드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시고, 그렇게 예배하는 사람에게 은혜와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시편 23:1-3,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아쉬움이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주님.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면서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죽어라 하고 따라갈 생각조차 안 합니다. 예배를 통해 은혜 주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하시는데도, 죽어라 하고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공급 받으며,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로마서 12:3,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긴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1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드릴 때, 이 세대를 이기는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드릴 때, 마음이 새롭게 변화됩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드릴 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왕에 예배드리는 거, 온 힘을 다하십시오. 입으로 ‘아멘’ 하시고, 찬송도 힘 있게 하십시오.
예배에서 힘을 얻고, 예배에서 생명 얻고, 예배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고, 그리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승리하게 됩니다. 예배의 감격으로 살 때,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라는 담대함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연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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