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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합리적인 예배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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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면서 사람마다 ‘복 많이 받으세요!’하고 신년하례를 하곤 합니다. 가까운 사람끼리 축복의 덕담(德談)을 나누거나 서로 축원하는 일은 매우 훈훈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의 원리나 근원은 도외시 하고 하나의 의식적인 표현으로 내뱉는 경우인데 비해 성도들은 복의 근원과 그 비결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축원의 내용도 신빙성을 더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있는 지혜요 특권입니다.

솔로몬 왕은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고 하였습니다(잠 3:15-17).

본문 말씀에도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그리스도인의 특징적인 삶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가장 복되고 형통한 삶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1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영적 예배」라는 말은 합리적 예배(reasonable service)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합리적인 예배가 장수와 부귀를 안겨주고 그 가는 길을 즐겁고 평탄한 길로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I. 예배적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복된 삶이란 하나님과 교통하는 임마누엘의 특권을 말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즐겁게 만나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 싶고 어떻게든지 하나님께 접근하여 복을 받아내고 싶은 욕심을 가지겠지만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그런 욕심을 채워 주시지는 않습니다. 에녹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평생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히 11:5). 그러므로 여기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요구하였습니다.

(1) 예배의 특권

예배는 아무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성도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내게 응답하시는 임재의 축복입니다. 이교도들이 신의 이름을 부르며 제멋대로 주문 외우듯이 우리가 자기 임의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자기의 감정대로 소리 지르며 노래하며, 자기의 필요에 따라 기도하는 것으로 예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배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응답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고 하였습니다(요 4:24).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만든 형상 앞에 절을 하며 소원을 빌어도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영이신 하나님께 신령한 예배를 드리게 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통이 이루어집니다(고전 2:10-12).

(2) 몸으로 드리는 것

제사에는 제물이 있어야 됩니다. 구약시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율법으로 구별해 놓았습니다. 동물의 경우 송아지나 양이나 염소이고, 그것도 구하기 어려운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로 하게 하였습니다. 또 식물일 경우 곡식의 가루로 떡을 만들어 제물로 삼았습니다(레 2:1).

그런데 제물이 어떤 종류이든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흠이 없고 정결한 것이어야 됩니다. 여기도 “거룩한 제사”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도 반드시 거룩하게 구별된 것이어야만 합니다(레 11:45).
구약의 제사가 동물이나 식물을 제물로 삼아 드린데 반하여 신약의 성도는 자기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삼아야 됩니다. 동물이나 식물같이 물질로 드리는 것에도 정성은 깃들어 있지만, 아무래도 자기의 몸을 드리는 것은 그 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고 비중 있는 제사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형식적인 제사보다 더 내용 있고 합리적인 제사가 됩니다.

(3) 산제사로 드리는 것

“거룩한 산 제사”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성도의 예배적 삶을 특징짓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에는 산 제물을 잡아서 불태워드리는 것으로 사실상 죽이는 제사인데 반하여 몸으로 드리는 제사는 살아 있는 제사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죽여 제물이 되어 주셨기 때문에 그 제사의 효과를 힘입어 우리는 그냥 산채로 하나님께 바쳐지게 되었습니다(히 7:27).

그러나 구약의 제사는 짐승을 잡아 죽이고 불태우는 일이 늘 반복되어야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몸으로 드리는 제사는 항상 하나님께 바쳐진 삶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한 순간의 순교적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동안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순교적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롬 14:7-8).

원리적으로 나의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고 사신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6:19-20). 그런 의미에서 구속 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자기 몸으로 산제사 드리는 거룩한 삶이야말로 진정 합리적인 예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Ⅱ. 변화된 삶입니다.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땅에 살아도 하늘의 시민권자입니다(빌 3:20). 땅에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 풍속을 좇고 육체의 정욕을 따라서 만족을 추구하지만(엡 2:1-3), 하늘에 속한 사람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이상으로 하며 그 형상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1) 성별된 삶을 사는 것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했는데 이 세대(αἰὼν)라는 말은 「시간적인 세상」을 뜻합니다. 이 말은 보통 세상(κόσμος)이라는 용어와 달리 쓰인 단어입니다. 그냥 세상이라고 할 때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적 개념이거나 죄로 타락한 세상의 풍속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세대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이는 인류의 역사와 오랜 시대의 개념으로 보고 죄악된 세상 문화나 불신앙적인 사조에 휩쓸리지 말도록 당부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지는 것은 흠이 있거나 더러운 것은 드릴 수 없습니다(레 22:20-26). 사람도 나실 인으로 하나님께 구별된 자는 포도주나 독주를 입에 대지 아니하며 머리를 밀지 않고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민 6:2-5).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헌신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세상과 구별된 정결한 몸가짐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2)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

범죄한 인간은 그 마음이 타락하여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본래의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이지만(창 1:26), 범죄함으로 인하여 그 마음을 상실해 버렸습니다(롬 1:28).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경우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그 속은 부패하여 감각을 잃어 버렸고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 17:9-10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병들고 썩어져 가는 인간의 마음을 치료하고 새롭게 소생시키는 작업을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부패한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둔 채 외모를 꾸미고 억지로 행동을 통제한다 해도 새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빌 2:5). 에베소서 4:22-24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3) 변화된 삶을 사는 자입니다.

새로운 마음의 변화는 새로운 행동으로 그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로마서 13:14에는 이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의 생활이라고 하였습니다. 옷의 모양과 색깔은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이며 나타나는 행동양식을 뜻합니다. 계시록 19:8에는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4:13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2:3-21에는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성숙해가는 사람의 삶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곧 자기의 분수를 지키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과 또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는 일 등입니다.

Ⅲ.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예배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그 마음의 초점을 하나님께 두고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바 그 뜻을 헤아리려고 애를 씁니다. 에베소서 5:17에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2절에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1) 분별력 있는 지혜를 공급받습니다.

지각이 둔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합니다(시 14:1-3). 이사야 6:9에는 이 백성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쉽게 분별하게 됩니다. 그것은 신령한 눈이 열려 있어서 사물을 볼 때 정확하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엡 1:17-19).

하나님과 교통하며 예배적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준과 안전장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의 척도에 따르는 것입니다. 시편 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 말씀을 사모하며 묵상하므로 되새김질 하면서 경건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시 1:1-3).

이런 사람에게는 언제나 성령이 함께 하시면서 순간순간 깨우쳐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0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최고의 가치를 붙들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이것은 성도가 추구하는 최상의 가치요 행복의 조건입니다.

① 선한 것

하나님께서 옳다고 여기시는 것이 모든 인류에게 있어서 최선의 기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마 6:33). 구약의 선지자 미가는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미 6:8).

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성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자기의 본분입니다(전 12:13). 고린도전서 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히브리서 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고 하였습니다.

③ 온전하신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을 강론하시면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였습니다(마 5:48).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을 따라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에 근접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곧 행복한 삶의 비결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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