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와서 보고 영접하라! (요 1:43~49)

  • 잡초 잡초
  • 207
  • 0

첨부 1


  프랑스 혁명 때에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고 합니다. 많은 죄수들이 어깨가 서로 포개질 정도로 좁고 어두운 감방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 감방에는 조그마한 창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창문을 통해서 한 줄기 빛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죄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성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빛은 그 조그마한 창문을 통해서 매일 같은 때, 같은 곳을 잠시 동안 비춰 주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을 이용해서 사람들은 성경을 가진 사람을 자신들의 어깨 위로 높이 들어올리고 그로 하여금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네가 빛 가운데 있을 때 읽었던 말씀을 들려 주게.” 비록 죄수의 신분으로 어두운 감방 안에 갇혀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모두 하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소리를 들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한 사람을 빛 가운데로 보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둠 속에 갇혀서 빛을 그리워한 죄수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오랫 동안 들리지 않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애타게 듣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메시야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자 빛을 전하는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그가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시자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빛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생명의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 임무를 지닌 인물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다만 자기의 일을 했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오직 어두운 세상에 생명의 빛을 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참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증거하는 일이야말로 세례 요한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다만 세례 요한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빛을 전하는 사람들의 행진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해서 안드레와 빌립으로 이어지는 빛에 대한 증언은 계속되었다는 말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하반절) 사도 바울의 그 말은 아주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전하는 사람이 없으면 결코 들을 수 없고 듣지 않고서는 도무지 믿을 수 없습니다. 과연 그들은 친구를 주님 앞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아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병 중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제가 볼 때에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병이 가장 무서운 병인 것 같습니다. 음식을 먹지 못하면 배가 고픕니다. 배가 고파야 정상입니다. 병에 걸리면 아픈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런데 배가 고프지 않고 몸이 아픈 것을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복부 팽만이라는 증상이 있습니다. 일종의 소화불량입니다.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정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먹지 못하니 결국 죽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왜 우리가 암을 두려워합니까? 요즘은 의술이 많이 발달해서 초기에 발견하기만 하면 웬만한 암은 거의 다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친구인 박재갑 국립 암센타 원장이 하는 말이니까 그대로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암환자들이 치명적인 상태, 즉 말기에 이를 때까지 별로 아픔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아직까지도 암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밝은 빛에 대한 갈망이 없다면 그것은 정말 치명적인 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것에 대한 갈급함이 없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배가 고프고 영적으로 목이 마름에도 불구하고 영의 양식을 갈망하지도 않고 사모하지도 않는 것은 참으로 영적으로 치명적인 병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생명의 빛 앞에 서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빛으로 오신 주님이 정말로 신기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오셨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의심했습니다. 베드로도 의심했고 나다나엘도 마찬가지로 믿지 못했습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기 전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주님을 거부했습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이 소개하는 주님을 아주 무시했습니다.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 상반절) 해박한 성경 지식을 자랑하며 그렇게 내뱉는 나다나엘의 모습은 상당히 얄미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죄인들을 찾아오신 주님을 그는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눈이 어두울 수 있을까요?

  바로 앞에 계시지만 의심의 안개에 갇혀 있는 그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나사렛에서 난 것은 결코 선한 것이 될 수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했습니다. 세상은 그런 고지식한 사람과 더 이상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예 외면하고 상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그의 마음 깊은 곳까지 다가가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다가가 인격적으로 만나 주셨습니다. 주님으로 인해서 그는 의심의 안개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주님 때문에 그는 비로소 새롭게 비취는 빛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눈이 열리고 그는 하늘의 신비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니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그는 감격에 떨며 이렇게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오늘 주님 앞에서 우리도 새롭게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을 왕으로 영접할 것인가 아니면 거절할 것인가 분명히 결단해야 합니다. 오시는 주님을 올바르게 영접하지 못할 것 같으면 우리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든지 그것은 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 없이 산 것은 철저히 실패한 삶입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지 못하면 그 삶은 아주 잘못 산 것이 되고 말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어느 목사에게 남달리 공부를 잘해서 늘 수석을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집안이 가난한 그 친구는 사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사관학교에서 그 친구는 항상 좋은 성적으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임관 후에도 상관들의 인정을 받으며 그 친구는 승승장구했습니다. 그 친구는 예수를 믿는 것을 시간 낭비와 다를 바 없는 아주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름대로 자신만만하게 군 생활, 아니 인생을 살던 그 친구가 대대장으로 근무하던 어느 날 몸에 이상을 느끼고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검사 결과 말기암이라는 사형 선고와 같은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목사는 병원 중환자실에서 죽어가고 있는 친구를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간절히 전하는 복음을 듣고 죽음의 문턱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그 친구는 펑펑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내 이야기를 꼭 해 주게. 첫째, 나는 인생의 끝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지금까지 살아왔다네. 인생의 끝이 있다는 것을 진작 알았으면 결코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 둘째로 예수님 없이 산 인생이 얼마나 불쌍한가 하는 것을 이제 비로소 깨달았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보니 내 손을 움직일 수 있을 때, 내 발을 움직일 수 있을 때 그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손발을 움직일 수 있을 때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참으로 복되다는 사실을 꼭 좀 알려 주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생명의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주님을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의 빛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과 우리가 연합하여 영생의 소망을 간직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크고 놀라운 십자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 번 묻고 싶습니다. 아직까지 그 사랑을 맛보지 못한채 어둠 속을 방황하며 죽어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쓰라린 고통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도 작은 예수로 발견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핑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받은 바 사랑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이제 우리도 몸과 마음과 가진 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장차 주님 보좌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침내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왕노릇하는 참으로 복된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석공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