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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집시의 마지막 정착지 (벧전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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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시의 마지막 정착지
베드로전서 1:1~7

오늘 성경 말씀에는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의 특징이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 백성의 삶의 특징은 순례자, 나그네, 다른 말로 집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단어들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이 되는데 집을 떠났다는 뜻입니다. 아울러 집을 떠난 자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초기 기독교 역사의 박해로 인해 집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는 나그네가 대량으로 생겨나는 고난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기독교를 가리켜 십자가의 종교라는 말은 핍박으로 성장한 공동체라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당하는 모습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가장 큰 구심점 역할을 했던 제자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유대 땅을 떠난 집시 크리스천을 위해 하나님 백성의 삶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가를 흩어진 집시들에게 설교했습니다. 즉, 고난에 굴복 당하지 아니하는 믿음의 능력을 오늘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 편지를 들어야 하는 대상의 사람들이 지역적으로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가가 오늘 말씀 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라고 했습니다. 이 지역들은 유대 땅 북쪽 지방으로 지금은 터키 영토입니다. 이렇게 흩어진 나그네의 삶을 신학적으로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흩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을 이렇게 흩어 놓으시는가? 하나님은 선택한 백성을 아예 초창기부터 흩어 놓으십니다. 집시로 만들어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여 가심이 성경의 진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잘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어느 날 갑자기 집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네가 집을 떠나라.” 이렇게 해서 하루아침에 집시가 되었습니다. 브엘세바에서 잘 살고 있는 야곱을 다른 나라 땅인 하란으로 보내서 집시 생활을 하게 했습니다. 요셉은 17살 때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개인적인 것도 그렇지만 민족 공동체인 유대 민족은 처음부터 끝까지 집시 생활을 했습니다. 선택받은 히브리 민족은 앗시리아, 바벨로니아, 애굽으로 집시 생활을 계속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한 이런 생활은 그 당시에는 고난과 다른 의미가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역사가 지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집시의 원 고장을 선교지로 많이 다녔습니다. 집시족들은 지금 특히 유럽에 많이 흩어져 살고 있는데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약 800만 정도의 집시 족들 중에서 루마니아에 약 250만의 집시가 살고 있고, 헝가리에 약 200만의 집시가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출발점이 인도입니다. 우리들이 학창시절에 인도 국민의 계급에 대해 배운바 있습니다. 인도 국민은 네 계급으로 나눕니다. 제일 상류층이 브라만 계급입니다. 브라만 계급이 되지 못한 종족들은 다소 불만은 있지만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네 계급 가운데 제일 하류 계급에도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회에서 계급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그 땅에서 살 수가 없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게 된 사람들이 집시의 원조입니다. 유럽을 찾아간 그들을 보고 유럽인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들이 도대체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하는 말이나 생긴 모양, 피부 색깔이 “may be Egyptian?”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 “집시”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고향을 떠나 외국으로 간 사람들은 현지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들의 직업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는 구걸하는 거지입니다. 누구도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걸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지금도 헝가리를 비롯한 루마니아를 다녀 보면 거리에 동상이 서 있습니다. 구리로 아주 반짝반짝하게 만든 동상이 길거리에 있습니다. 맨발에 윗도리가 거의 벌거벗겨진 여인이 어린 아기를 부둥켜안은 채 먹을 것을 달라고 구걸하는 모습이 동상으로 많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모습이 집시의 모습이요, 그들의 첫 번째 직업이었습니다. 동냥으로 살아갈 수 없을 때 그들은 두 번째 직업을 택합니다. 도둑질 하는 겁니다. 도저히 생존을 지탱할 수 없어 마지막 수단으로 도둑질을 해서라도 살아야겠다고 고통의 현실을 합리화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그들의 위치는 사회에서 점점 더 멸시의 대상이 되어져 갑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행운을 만난 사람들이 있는데, 누구도 하지 아니하는 지저분한 작업, 노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확실히 유럽인들과 외모가 다르기 때문에 어디서나 집시인 줄 알게 됩니다. 지금도 이들은 유럽의 영원한 나그네 공동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럽에는 또 하나의 집시 공동체가 있습니다. 유대인 공동체입니다. 이들도 유럽 전역에 집시가 되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인도 집시와는 달리 사업에 큰 성공을 했고 외모가 서구인, 유럽인들과 똑같기 때문에 아무 차별이 없이 오히려 성공한 자의 자랑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이들이 겪은 고통은 지상에서 말도 못하는 값을 지불했다고 평가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하나님이 유대인, 즉 아브라함의 후손을 세계에 ‘디아스포라’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세계에 흩어 놓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살아가는 곳에서 구원의 빛을 비추어 그 빛을 보고 세계인이 구원 받으라고 하는 뜻입니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는 유대니즘의 영향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선민사상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선물을 나누어주라고 하는 사명 의식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독점하라는 해석을 내린 것이 민족적 불행을 가져왔습니다. 이들의 독선적 신앙을 생활 가운데서는 배타 사상으로 연결됩니다. 이것은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마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나 이스라엘에 지금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의 문제를 재해석하지 아니하는 한 이 문제는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많은 설교자들은 유럽에서 일어난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해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유대인들은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구원의 빛을 전해야 되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 그토록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가 왔는데도 메시야인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조롱하며 죽였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 가운데 나타난 기록, 구약에 예언된 말씀,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의 사건에 비추어 보아도 예수의 그리스도성은 충분합니다. 지금 우리들은 유대인이 아니면서, 또한 예수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를 믿고 살아갑니다. 예수의 기적 능력에 한 번도 우리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전하여준 말씀에 의해서도 이렇게 열심히 예수를 믿고 있는데, 하나님께 대한 모든 신앙을 예수를 통해 그렇게 현실적으로 확실하게 눈앞에 보였는데도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아니하고 이단자라고 끌고 가서 십자가에 왜 죽였는지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마태복음 27장 21절에서 26절에 보면 빌라도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유대인들에게 합니다. “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느냐?” 그러나 민중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나타난 뚜렷한 포인트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백성들 가운데 하나도 예수의 편에 섰던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예수의 신적 능력에 대해 예언된 말씀을 가지고 있었고 그 능력에 현장 참여한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해서 못 박았습니다.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이 죄 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죗값이 있다. 이 피 값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하랴?”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려도 좋습니다. 괜찮습니다. 빨리 죽이시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유럽에서 나치 활동에 의한 유대인 말살 정책은 그 죗값인가, 아닌가? 이것은 우리 각자가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인도인 집시 선교를 했던 사람으로서 유대인 학살 현장이었던 아우슈비츠를 방문했었습니다. 제가 간 날 유럽 각국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수백 명씩 와서 견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년 내내 그렇게 학생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제가 갔던 수용소에서만 150만 명이 학살되었습니다. 지금 공개하고 있는 수용소 안에서는 유대인들을 처형할 때의 상황과 그 안에서의 생활을 생생히 볼 수 있는 자료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한쪽 공간에는 사람의 머리카락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 “죽이기 전에 머리 깎아 그것을 직조해 공업용으로 쓰기 위해서 깎아 놓은 것인데 미처 독일로 운반하지 못한 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또 한군데 가보면 신발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이건 뭡니까?” “신발을 벗기고 죽였습니다. 그래서 신발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입니다.”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을 좋은 곳으로 이주시켜 줄 테니 귀중품 다 챙겨서 기차 타라고 하는 나치 군의 말을 듣고 찾아온 곳이 이 수용소입니다. 오자마자 20분 안에 다 압수당하고 발가벗기고 모두 죽었는데, 더 참혹한 일은 죽는 사람들의 금이빨을 모두 뺐습니다. 그것을 독일의 경제 발전에 쓴다고 운송했는데 미처 가져가지 못한 것들이 지금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거기 갔다 온 사람들의 반응이 네 가지로 나타나는데, 심장이 약한 사람은 오지 말라고 합니다. 첫째, 그것을 본 후에 정신분열증이 생깁니다.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악독할 수가 있을까?’ 인간이기를 거부한 사건의 현장을 보고 정신불열증이 생기는 겁니다. ‘인간이 인간이 아니다.’라는 분열증이 생깁니다. 그 다음으로 우울증 환자가 속출합니다. 그것을 보면 우울증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으로 사는 자체가 부끄러울 만큼 지독한 인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 다음에는 소화 불량, 육식 기피증이 나타납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으니 조심해서 견학을 하라고 일러줍니다. 생체 실험을 하기 위해 살아 있는 남자아이들의 생식기를 전부 잘라서 수없이 고통스럽게 죽어 갔습니다. 거기에 그렇게 벌거벗긴 아이들의 사진이 다 붙어 있습니다. 600만 인구가 그렇게 죽어 갔다면 서울 인구의 절반입니다. 그들이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었는가? 이것은 각자에게 해석을 맡겨야 합니다. 누구도 아니다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될 것입니다. 각자가 믿는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와 반대되는 신앙적 사건의 논리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미국의 번영은 청교도 신앙의 조상에 의한 하나님의 축복인가? 이제 추수감사절이 다가오는데 전 세계 설교자들은 그렇게 설교할 것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정반대의 대조적 사건에 대한 신앙 고백을 여러분 각자에게 맡깁니다. 아주 분명한 것은 우리는 지금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진리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내 영혼에 걸림이 되는 삶의 방법을 버려야 합니다. 바울 선생과 같이 “사나 죽으나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고백을 우리도 고백하고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두 가지 사람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기능적 역할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됩니다. 하나는 역기능적 역할의 사람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모습이 나와 나의 자손에게 하나님의 심판적 피값이 돌아가도 괜찮다는 유대인의 언어가 있는지 없는지, 내 양심을 성서에 비추어 영혼을 맑고 평안하게 머물게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방향이 그 초점을 잃을 때 유대인들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장 참혹한 골목이 하나 있습니다.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을 끌어내서 집단으로 벌을 주는 곳입니다. 도저히 고통에 못이기는 사람이 나치군의 명령에 몸을 움직이지 못할 때 가차 없이 그 자리에서 총살 시킵니다. 도저히 굶주리고 병이 든 한 사람이 몸을 움직이지 못하니까 나치군이 죽이려고 권총을 머리에 갖다 댔습니다. 울면서 애원을 합니다. “나를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나의 고향에는 나를 기다리는 내 아내와 내 처자들이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서 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나를 죽이지 말아 주세요.” 그런 것을 독일군들이 사정을 들을 리가 있습니까? 총을 장전해서 갖다 대니까 어떤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그 앞에 두 팔을 벌리고 막아섰습니다. “대신 나를 죽이십시오.” 그게 콜베 신부였습니다. “나는 신부이기 때문에 아내도 자녀도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런 순간을 위해 내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나대신 저 사람을 살려주시고 나를 죽이십시오.”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콜베 신부는 그 자리에서 총살되고 그는 살아남았습니다. 지금 그 수용소 자리에는 콜베 신부의 사진과 그 설명이 그대로 붙어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기독교 진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일이며 우리는 어떤 곳이나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 일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아니하는 인생을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이런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하는 그런 장소입니다.

우리 교회가 지원하고 있는 조수경, 박계자 부부 선교사가 헝가리에 이 집시들을 위해 최초로 교회 건축을 한다고 지원을 부탁해서 그 지원을 하고 교회 건축 기공식에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이런 일이 유럽에서, 헝가리에서는 최초로 되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이 나라에도 이제 멸시받던 집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던 집시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한 예배당이 생긴다.’라고 세 군데나 되는 현지 방송국에서 나와 그날 예배드리는 기공식을 취재했습니다. 교회 건축을 기념해서 성전 중앙 콘크리트 벽 속에다 조수경, 박계자 선교사, 제 이름, 그리고 몇 사람의 이름을 새겨 넣고 그 위에다 예배당을 잘 지었습니다. 그날 거기 모인 집시들이 울면서 부른 복음성가 가사가 이렇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버려진 자로 태어났습니다. 우리를 오라고 부르는 땅은 지상에 아무데도 없습니다. 언제나 가라는 음성만이 우리 귀에 들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를 반겨 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끝없는 천대와 멸시만을 받으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갈 곳이 생겼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오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갈 곳입니다. 우리가 찾아갈 마지막 정착지는 어디인가? 그곳은 주님이 계신 하늘나라입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셔서 그 행복한 곳에 우리로 살게 하소서.” 이런 복음성가는 그들만이 부르는 노래일 것입니다.

그러면 인도 출신 집시만이 집시인가? 오늘 말씀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다 집시라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떠돌이, 생활의 순례자로 하나님의 백성을 흩어놓으셨는가? 내가 사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비추라고 흩어 놓으신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온 세계인이 오고가는 가나안 땅에다 심어 놓으심으로 그가 비추는 하나님의 빛을 보고 구원을 받으라고 흩어 놓으신 겁니다. 여러분, 세계 선교의 역사를 생각해 보세요. 예수 믿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나라에 선교사 한 사람이 들어갑니다. 한 사람의 발걸음을 통해 그 나라가 복음화 되어 마침내 기독교 국가가 됩니다. 하나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장로교는 언더우드라는 선교사 한 사람이 이 땅에 오면서 생긴 것입니다. 감리교는 아펜젤러 한 사람 때문에 다 생긴 겁니다. 최초로 우리나라 압록강을 건넌 복음의 선교사 한 사람 때문에 지금 이렇게 예수 믿는 나라가 된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만 잘 흩어 놓으시면 한 나라가 복음화 되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오늘도 온 세계에 하나님의 백성을 흩어 놓으시고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비춥니다. 하나님 백성의 삶의 목표는 이 세상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 “마지막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아버지 나라에서 생명 불멸의 진리에 대한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이 땅에서 집시같이 살아라.” 이것이 오늘 말씀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18세기에서 20세기에 가장 잘 믿는 기독교 국가가 된 미국인들을 세계 선교사로 흩어 놓으셨습니다. 21세기에 와서는 미국 다음으로 한국 선교사가 세계에 흩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흩어 놓으신 디아스포라의 역사, 우리가 지금 살고 있을 때는 그 역사를 잘 깨닫지 못하지만, 지난 후에는 ‘아! 하나님께서 이것을 위해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구나!” 디아스포라! 이 신학적 기초에 의해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 분당이 고향이신 분은 손들어 보세요. 나 밖에 없군요! 디아스포라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이 흩으시는 겁니다. 살던 곳을 떠나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오늘 베드로는 아시아, 비두니아, 갑바도기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집시들에게 우리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세상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데 필요한 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삶의 모습이다. 절대로 낙심하지 말고 힘있게 살아라!” 그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발걸음이 어디에 닿았든지 우리는 순례자입니다. 순례자의 삶에 승리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나타난 디아스포라의 신학적 기초를 저희들이 깨닫고 하나님 백성의 의미가 무엇인가? 흩어져 사는 백성! 온 세계에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흩어진 민족이라는 깊은 뜻을 저희들이 깨닫고 살아가는 아버지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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