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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디베랴냐 갈릴리냐 (요 2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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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가지 질문부터 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주어진 장소가 어디였습니까? 디베랴 호숫가입니다. 1절을 한번 보세요.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시 질문합니다. 여기에 디베랴 호수가 나오는데 디베랴 호수는 어떤 호수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디베랴 호수는 어느 호수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갈릴리 호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갈릴리 호수라고 하는 것을 요한복음에서만 유독 디베랴 호수라고 하고 있습니다(요 6:1, 6:13, 21:1).
  왜?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있는 이 저자만이 유독 갈릴리 호수를 디베랴 호수라고 했을까요? 그것이 오늘 우리가 깊이 생각할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신앙적이며 그리스도인적인 삶을 풀어가는 핵심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사고와 사상과 행위의 양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디베랴는 원래 로마를 다스리는 황제의 이름입니다. 로마시대에 로마의 황제들은 자신이 정복한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서 거대한 도시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기념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이곳 저곳 로마 군인들이 정복한 곳에 로마황제의 이름을 따다붙여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로마의 황제의 이름을 붙여 도시를 만들려고 하면 그만한 위엄을 갖추고 규모를 자랑할 만한 것이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거대함"이란 조건이 붙어있습니다. 작은 고을은 로마의 황제 이름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불경스럽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은 자연스럽게 거대함의 가치를 숭배하고 거대함의 가치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대함이란 것, 큰 것 그것이 꼭 유익하거나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규모가 크다고 해서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거대하기 때문에 크기 때문에 폐망의 길을 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이에 반하여 디베랴가 아닌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순수하고 고유한 촌락의 이름입니다. 이 갈릴리라는 곳은 작지만 순수함이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거니시던 "영원적 가치"가 숨쉬는 그런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부분의 시간들을 이곳에서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갈릴리 예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갈릴리는 목자와 양떼가 함께 하는 그런 곳이었으며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12제자중 11명의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선택하시고 세우셨습니다. 가룟유다만이 예루살렘 남쪽 도시 출신이었습니다. 작다고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작다고 무익하고 경쟁력이 없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작기 때문에 빨리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고, 개혁을 할 수 있고, 경쟁력을 갖출 수가 있습니다. 작기 때문에 아릅답고 작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 더욱 소중하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많은 곳, 큰 곳에서는 작은 것은 묻혀버리고 소중하게 취급되지 않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예수 시대나 오늘의 시대나 영원적이고 진실적인 가치가 거대함의 가치에 눌려서 숨쉬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작은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소홀리 취급되기 쉬운 시대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거대함의 가치에 짓눌리고 속고 있는 것입니다. 큰 일, 위대한 일, 규모가 큰 것에만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습니다.

  예, 맞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거대함은 그만한 매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대함의 가치 그것은 영원함의 가치에 우선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크고 위대해도 일시적인 것이라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에 진실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큰 대 진실이 없고 사랑이 없고 거짓투성이라면 아무리 매력적일지라도 그것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 "황구라" "황썰"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입만 열면 말바꾸기, 책임전가시키기, 생명과학을 다루는 사람이 이런 대상이 된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얼마전까지 국민적영웅이고 세계적 각광을 받던 인물이었는데 결국은 거대한 업적주의에 의해서 침몰되고 마는 것을 우리는 지금 봅니다.

  거대함이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거룩함을 거스릴 수 없습니다. 거대함이 없어 망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이 없어서 망하는 것입니다. 거대함이 없어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거룩이 없어서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로마가 작아서 망한 것이 아닙니다. 거룩이 없어서 망한 것입니다.
  "주여! 우리를 키워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주여!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옵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거대하게 해주소서" 라고 기도하기보다는 "주여! 정직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할 수만 있으면 크게 되십시오. 그러나 결코 큰 것을 하겠다고 작은 것에는 소홀리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작은 봉사, 작은 섬김, 작은 자리, 작은 일 그것을 착하고 충성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갈릴리가 아닌 디베랴에 찾아오셔서 베드로에게 "너의 그물에 고기가 있느냐" 하시고, 빈 그물밖에 없는 베드로에게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셔서 넘치는 고기를 잡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중,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바램이 여기에 깊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 세상이란 거대함을 추구하고 있다. 베드로야 지금 네가 서 있는 이 자리가 거대함을 추구하는 곳이다. 그런데 너도 세상을 닮아 그렇게 거대함을 추구하면서 살래, 세상 바라보고 살거니? 그렇지 않으면 그 거대함의 가치를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영원함의 가치를 추구하며 내가 네게 맡긴 양때를 치며 살래" 물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거대함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는데 있음을 밝히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사명을 충성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주셨던 그 말씀이 그리고 기록된 "로고스"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레마"의 말씀으로 선포된 말씀으로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베드로처럼 그 말씀에 응답해야 합니다.
  주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거대한 죄악 세상속에서 살면서도 오직 주님 사랑하면 그렇게 살아가겠습니다.

  큰 것 너무 좋아하지마시기를 바랍니다. 공룡은 그 거대함 때문에 멸종되었다는 학설이 있습니다. 거대함보다는 거룩함, 진실함, 신실함, 착함, 사랑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으로 보면 주님 사랑하고 주님 경외함이 없이 거대함만을 추구한 것은 모두 망했습니다. 기업도 나라도 민족도 다 거대함을 추구하다가 망했습니다. 그러나 영원함을 가치로 추구하는 것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거대함을 추구하고 세상권력을 탐하셨다고 하면 오늘의 주님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자세는 거대함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영원에 가치를 두고 진실에 가치를 두고 사랑에 가치를 두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야 오래도록 유지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성장해야 합니다. 자라야 합니다. 거대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으로, 진실없이, 권모술수로, 사랑없이 이루어진 것이라면 바람직스럽지 않습니다. 좀 더디게 성장하더라도 착실하게 성장해야 합니다. 주님 떠나서 된 일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송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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