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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 (빌 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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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라고 할 것 없이 새로운 소망과 계획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망이 우리의 삶에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머릿속의 공상이 아니라 일정한 과정을 거치게 되면 우리의 삶을 바꾸고 삶의 배경이 되는 사회절차를 바꿀 수 있을 때 진정한 목표가 되는 것을 봅니다.
이제 우리는 2006년도의 세 가지 표어를 가지고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 한번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목표를 갖고 삽시다. 선언이 아닌 실천을 합시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납시다.”

여러분들에게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언제나 분명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하고 또 우리는 말로 선언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것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분명히 우리의 삶에 가다 넘어질 때가 있으나 그때 다시 일어나 그 일을 계속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따라서 합니다. “목표를 갖고 삽시다. 선언이 아닌 실천을 합시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납시다.”
목표를 가지고 살고, 선언이 아닌 실천을 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이 세 가지 계획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운데 2006년도 한해를 지내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사는 한해가 되기를 바라며 오늘의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지난밤에도 많은 성도들이 새해 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계획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설계하며 기도하기 위하여 아름다운 한해를 맞이하여 주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경건하게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또 내 마음에 소원과 마음속에 결의한 다섯 가지 사실들을 주님 앞에 이루기를 소원하며 우리는 같이 기도했습니다. 무엇인가 소망이 있기에 삶의 목표가 있을 때 우리는 기도를 드릴 수 있으며 우리 삶의 방향을 정하고 달려갈 수 있습니다. 그 목표가 분명하다면 우리는 먼 길 돌아가지 않고 바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여 헤쳐갈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오늘 아침에 일어날 때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일어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일어나면서 하나님 앞에 참 큰 감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올해도 이렇게 저에게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라는 2006년도 한해를 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1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허락해 주셨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여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로 재구성할까 생각을 합니다. 1년이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어찌 생각하면 이제까지 살아왔던 우리의 모든 삶은 일거에 다 흩트릴 수 있는 기간이 되기도 하고 이제까지 살았던 우리 모든 삶을 반전하여 더욱더 귀한 우리의 삶으로 만들어가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귀한 시간을 하나님의 은혜 앞에 부여받은 우리 성도님들은 2006년 한해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아름답게 진열하여 주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속에서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 삶에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에 이미 나는 얻었다 함도 아니고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나는 이제까지 잡은 줄로 생각하지 않고 뒤에 있는 것은 다 잊어버린다. 그리고 앞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좇아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기에 우리 오늘 다시 한번 따라서 합시다. “절대복종, 자기부인, 자기연민에 빠지지 말자, 헌신하고 잊어버리자”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인 복종함이 없으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늘 가변적이고 내 마음에 있는 인간의 육신적인 욕망 때문에 결국 하나님과는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의 각오를 다질 때 우리는 우리 삶에 기초석을 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 근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 용기와 담대함을 가지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헌신하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작년에 헌신한 것은 작년으로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수고하고 애쓴 것은 그것으로 끝나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항상 과거의 추억에 집착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은혜와 새로운 꿈과 새로운 소망을 바라보고 나는 이전까지 이루었던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헌신과 은총을 이루기를 소원하며 우리는 새로운 삶의 시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살아갈 때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은 결국 앞을 향하여 나아가는 상향진보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삶을 우리들에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목표를 가지고 앞에 있는 모든 새로운 역사를 위하여 달려가는 상향 진보적 진보추구형의 삶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우리는 그래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삶의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삶이 아름답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한 삶의 목표가 있는 사람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삶의 목표가 정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나는 오늘 뭘 하지하는 삶의 목표가 정해지지 않은 삶은 우리들에게 존재의미나 가치 그리고 삶의 긴박성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은 다만 생존에 불과합니다. 가치 있는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삶이 지루하고 무엇인가 의욕이 없는 것은 일이 잘 안 되어서가 아니라 분명한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참 인생은 가치 있고 생명력 있는 진정한 삶의 목표가 정해진 이후부터 새롭게 시작이 됩니다. 나는 분명히 살아야할 이유가 있고 또 그 이유를 가능케 하는 고상한 가치 있는 목표가 있을 때 사람들은 담대하고 의젓해 자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삶에 대하여 분명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성경에는 꿈이 없는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꿈이 없고 소망이 없고 목표가 없을 때 사람들은 마음에 일어나는 인간적인 욕구에 따라서 행동하게 됩니다.

삶의 분명한 목표가 정해지고 살아가고 있는 삶의 가치에 대하여 진정으로 확신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활기 있고 탄력 있고 윤기 있게 된다고 합니다. 현재 상황을 뛰어넘는 새로운 진보의 지경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목표가 있을 때 사람들은 평상시에 자기 능력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삶의 향기와 활력과 윤기를 가져다주게 됩니다. 삶의 진보는 그 진보를 통해서 무엇을 이룰 것인가는 분명한 목표가 결정되었을 때 이루어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의 기능이 언제 발달됩니까? 그 기능을 통하여서 어떤 목표를 이룰 수 있을 때 그는 그 기능의 발달을 위하여 노력하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 기능의 발달을 통해 그의 목표를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무엇인가 진보하고자 하는 사람들 무엇인가 그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은 삶의 분명한 목표부터 설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는 바른 삶의 목표가 결정될 때 우리는 어떤 좌절이나 낙망의 지경 속에서도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닥쳐오는 유혹이나 각종시험을 일거에 물리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시험이나 미혹에 빠지는 이유는 자신을 끌고 가는 삶의 목표가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목표가 주는 힘이 약해서 그 목표를 외면할 수밖에 없어서 결국 그는 끌려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목표가 시들지 않은 사람은 삶의 좌절과 실패가 그 목표를 이루는 과정중의 한 고개일 뿐이고 결코 그의 모든 것을 그만두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좌절하고 실패함으로 인하여 무엇을 중단한다는 것은 힘이 들어서가 아니라 실패를 극복할만한 목적의식이 뚜렷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그의 삶에 분명한 천국의 목표를 정했기 때문에 그는 이제까지 이룬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고 새로운 목표를 향하여 날마다 달려간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떤 것을 할 수 있다 없다 어떤 것을 해도 된다 안 된다는 가치 판단의 기준은 자신의 삶의 목표에 따라서 결정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른 목표, 힘을 주는 목표, 옳은 목표가 우리들에게 있게 될 때 그것은 우리들에게 가치 있는 삶의 힘과 용기와 그리고 분명한 기준을 제공해 줍니다. 목표가 뚜렷하면 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을 봅니다. 그는 청년의 혈기가 왕성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의 모든 총무의 일을 맡아 감당하게 됩니다. 모든 일을 잘 감당하고 있는 중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지만 그는 뿌리칩니다. 청년의 때에 그와 같은 유혹을 뿌리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대단한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그에게 모든 일을 맡겨준 보디발에 대한 충성과 의리와 책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 모든 것들도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꿈이 있었기에 그는 한 순간의 욕망이 그를 던져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요셉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진정한 이유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삼손이라는 사람을 봅니다. 그는 민족의 사사라는 지도자의 위치에 섰습니다. 그에게는 온 세상을 능가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지도적인 위치도 있었고 그에게는 힘과 능력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그의 삶을 이끌어갈 분명한 삶의 목표가 없었던 것입니다. 목표가 없는 사람에게 힘과 그리고 주어진 여건이 되었을 때 그것은 죄를 짓는데 다만 사용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는 힘도 있고 위치도 주어졌을 때 그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그의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급급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봉사의 일을 하게 되도 부지런하게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에게 부탁드려야한다고 것입니다. 바쁜 분들에게 일을 부탁드려야 오히려 그 일을 잘할 수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시간을 쪼개어 쓰고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새 일을 도모하고 진보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관심 있어 조바심 내는 사람이 결국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게 됩니다. 언제나 부당한 노력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지요? 우리에게 성령이 충만해지면 결국 주의 뜻을 이루고 싶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기쁨의 일을 이루기 원하는데 결국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뜨거움으로 열정으로 다가오게 되고 결국 그것이 우리 삶의 노력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력은 성령 충만의 한 모습입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가 누워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의 삶에 부지런히 주를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위하여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운동화 끈 조이고 열심히 달려가는 사람들과 그리고 신발이 헐떡이게 벗겨지도록 매고 달려가다가 신발이 벗겨져 그것을 다시 신는 사람과의 승부는 이미 결정된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분명한 꿈이 있었기에 그는 마음을 조이고 그의 삶을 조이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숨가쁘게 그의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한 목표를 정하려면 우리 자신의 현재위치를 파악해야 합니다. 바른 푯대는 우리에게 진정한 용기와 소망을 주는데 바른 푯대 목표를 정하기 위해서 우리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매우 예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인간의 경향을 알고 내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하며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후덕한 마음을 가지고 평가를 해야 함을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까지 내게 모든 일이 이루어졌었다면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니 나는 더욱 더 겸손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더 간구하여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는 초보적인 작은 성취에 빠져서 정작 이루어야 될 큰 사역을 이루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가다 이런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는 조그만 도구를 주십니다. 그런데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조그만 도구를 이루는 순간까지 우리가 진보했어요. 그러면 그것이 마치 우리가 이루어야할 최종적인 목표에 도달한 것인양 착각하여서 그것을 누리려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더 큰 은혜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 손에 들려주신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더 큰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건강을 주셨고 지혜를 주셨고 지식을 주셨고 우리들에게 재능을 주셨고 여건을 주셨고 위치를 주셨고 공부할 수 있게 하셨다면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더 큰 원대한 하나님의 꿈과 계획과 목표를 이루어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성취에 만족하고 끝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시는 큰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희 교회가 지난 14년을 거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을 위하여 준비의 과정을 진행해 왔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3기사역이 이루어져 이 교회가 하나님 앞에 이루어야 될 역사와 사회에 봉사하고 기여하는 일들을 위해서 연습을 시작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 해 한해 정확한 계획과 그리고 계획의 실천에 의해서 조금씩 쌓여져 마침내 준비의 단계가 끝나게 되고 이제는 그것을 통해서 연습과 실천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정말 내 위치가 어디이고 그것을 통해서 해야 될 목적지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파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까지 이룬 것만 해도 사람들에게 매어 놓을만한 업적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전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앞에 있는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이라고 향전의 의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훌륭한 군대는 전투에서 한번 승리했다고 해서 자만에 빠지고 만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굳건한 준비와 경계태세를 가춥니다. 왜냐하면 한번 패퇴한 적군은 강렬한 전열을 다시 정비해서 분명히 또 도전해 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한 번에 승리로 말미암아 방비를 풀고 만취한다면 그는 적군에 의하여 다시 붕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나는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 오직 한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이루고 너무나 많은 수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잡으려고 쫓아가는 미완성 진행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보추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의 꿈을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의 과거의 영화로운 꿈 우리의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에 집착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 2005년도의 수고하고 헌신하고 봉사한 것은 깨끗하게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것은 2006년이라는 새로운 시간대 위에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헌신하고 봉사하고 내가 어떻게 아름답게 주의 백성들을 위해서 살아가며 이 세상에서 주의 뜻을 실현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우리의 추구함이어야 합니다. 과거에 아름다운 성과에 도취되어 새로운 삶의 꿈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지나친 과대평가 혹은 실제로 입증되지 않은 관념적인 우수성을 마치 실제인양 착각하여 바른 푯대를 정하는데 마음을 쏟지 못한다면 어려움이 있게 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내게 주어진 새로운 시간대를 바라보며 오직 앞을 향하여 달려갈 때 우리의 삶의 마지막의 완성을 향하여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목표가 있는 실제적인 삶의 모습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최고 때는 언제입니까? 목표가 설정되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을 때입니다. 그때는 우리 마음에 의욕이 생기고 행복이 있고 육신과 정신이 모두 건강한 것입니다. 여러분 눈뜨면 언제나 하는 기도 있지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루의 시간을 허락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루의 건강을 허락해주시고 하루의 호흡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하시고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의 기쁨과 은혜를 나눌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루를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소망이 우리의 소망이고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왜 목표가 중요합니까? 사람은 목표가 설정될 때 마음에 열정이 생깁니다. 마음에 열정이 생길 때 그의 삶에 기능과 능력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목표가 없는 사람은 열정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열정조차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기능이 향상되고 기량이 향상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목표가 있고 열정이 있을 때 기능이 향상되고 집중이 이루어져 결국 일정한 결과물이 그에게 형성되는 것을 봅니다.

푯대를 정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감당할 능력 또한 있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눈이 보이지 않는 믿음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도식적인 형이상학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생활과는 무관한 관념적인 사고의 유희로 그칠 수 있습니다. 믿음은 그러나 때로는 너무나 실제적입니다. ‘나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나는 천국에 간다’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를 믿으니 질서도 지키고, 예수를 믿으니 약속도 지키며, 예수를 믿으니 정직하게 살고, 예수를 믿으니 내 삶 속에 용기와 힘과 자신감을 가지고 어떤 일이든지 씩씩하게 감당해 나간다’라는 것은 믿음의 또 다른 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달려갈 삶의 푯대를 정해야 합니다. 의욕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 푯대에 도달하기 위해서 해야 될 일도 우리는 알고 그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능력이 없다면 가지고 있는 믿음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탁상공론으로 끝나버립니다. 실천적 상황이 없는 이론이라는 것은 얼마나 공허한 것입니까? 여러분 이론이 무엇입니까? 반복된 현상 속에서 추출한 것이 원리입니다. 모든 현상이 자꾸 일어나는데 그 가운데 반복되는 어떤 사실이 있어요. 우리는 그것을 원리나 이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원리나 이론이 우리 손에 주어졌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죠? 그것이 삶 속에 적용되어 실천적인 상황이 수시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에게 원리라는 것이 손이 쥐어 졌는데 실천적인 삶이 재현되지 않는다면 그 원리는 죽어있는 가엾은 원리가 될 뿐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이제는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뜻을 이루어드리는 실천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올 해는 선언이 아닌 실천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이 교회는 선언적인 교회가 아니라 실천적인 교회라고 강조합니다. 분명하고 바른 목표와 목적을 우리는 선언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장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지난밤에도 우리 성도님들이 다섯 가지 올해의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마음의 각오를 다진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선언만 하면 안 되고 실천하셔야 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선언하고 끝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우리 연초 첫날인데 한번 따라서 합시다. ‘적어도 3개월간은 내가 마음먹은 것을 반드시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습관이 형성되는 최소한 16주 걸린다고 합니다. 여러분 넉 달 정도 되는데 보통 3개월 정도 어떠한 일이 있어도 여러분들이 마음먹은 것들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3일이 못가 하는 사람들은 3일 못가는 그때마다 다시 실천해서 다시 마음에 작정해서 30번이라도 지속적으로 반복해가며 우리를 설득하고 그러함으로 그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아마 세상이 달라 보이실 것입니다.

여러분 실천을 하면서 달라지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마음에 자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실천하면서 생기는 것이 마음에 자신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보니까 어떤 일을 이루는 사람들과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의 차이는 이런 것입니다. 어떤 일을 이루는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실망의 지경에서 실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그 자리에서 이제까지 쌓아 놓은 곳 위에 또 다시 그 위에 무엇인가를 쌓아 올라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일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실망하고 오래 엎드러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시작할 때 이전에 쌓았던 것은 다 무너져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또다시 시작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시작을 이룰 수 있을 뿐이니 결과적인 목적지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실천을 위한 우리의 각오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나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우리는 끝까지 우리의 실천을 이룹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비록 어줍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익숙한 일이 되고 익숙한 일이 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것은 아름다움으로 우리들에게 점점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부족해도 다른 사람이 한번 하면 나는 열 번하고 다른 사람이 한 시간 하면 나는 적어도 10시간 할 것이라는 마음에 각오와 결의를 가져야 합니다. 처음에는 10배로 노력해야 다른 사람의 한 시간 한 것을 겨우 따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5시간으로 줄어들고 1시간으로 줄어들고 시간이 지나면 10분으로 5분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참 신기한 것을 무엇이냐 하면 반복해서 실천하다 보면 능력이 상승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등산을 해보니까 참 신기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안내서의 지도에 여기까지는 6시간 걸립니다. 이렇게 써놨습니다. 전에는 등산을 하다보면 6시간 걸린다 하는 것을 내려오면 8시간 정도 걸리더라고요. 그런데 요새는 6시간 걸린다 그러면 4시간 반이나 5시간이면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8시간 걸립니다. 그러면 한 6시간이면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표준보다 더 늦게 내려왔는데 요즘에는 표준보다 빨리 내려 올 수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이 자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실천하는 사람들이 왜 자신 있어 하는지 압니까? 반복되는 실천이 사람의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에 자신이 생기고 그 자신이 결국 그의 삶을 더욱더 기쁜 삶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늘 생각 속에 빠져서 관념의 유희 속에 사는 사람과 그것을 관념의 유희로 끝내지 않고 실천 속에 살아가는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은 말로 끝내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하는 행동가, 실천가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무엇인가 도전하고 노력하고 애씀으로 우리의 삶을 기쁨과 희열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한번 따라서 합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즐깁니다. 힘들어 넘어질 때 다시 일어날 뿐입니다. 큰일도 놀랄 일도 없습니다. 다만 처리할 뿐입니다.’ 여러분 큰일도 놀랄 일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들에게 어떤 일이 있으면 처리하면 됩니다. 내 앞의 어떤 일이 있으면 그냥 처리하면 되는 것입니다. 큰일도 없고 놀랄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처리하면 그만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다시 일어나 달려가면 될 뿐이고 우리가 넘어졌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자리 위에 그 다음의 단계를 쌓아 가면 될 뿐입니다.

삶의 낭만이라는 것은 어려운 과정 자체를 기쁨과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과 찬양하는 순간뿐만 아니라 연습하는 순간도 기뻐야 더욱더 훌륭한 성가대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어떤 곡을 받아서 연습해서 결국 그 곡을 우리가 찬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실력자체를 배양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곡을 받아서 연습하면 실력이 배양되지만 기본기를 위해서 더욱더 노력하는 시간들이 있을 때 우리는 근본적인 진보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 삶을 머릿속에서 생각한 것으로 평가받지 않고 실천하여 이룬 구체적인 삶의 결과물로 평가받습니다. 우리가 자꾸 착각하는 것은 생각해놓고 그것으로 실천한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생각과 실행은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명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한 것을 마치 내가 살아가는 삶이라고 착각하느냐, 아니면 생각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실천하느냐. 늘 말씀드리지만 정서적인 설득과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삶의 실천은 다릅니다. 우리는 늘 내 마음은 그렇다라고 감동을 받으면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마음에 정서적인 설득일 뿐입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의 생활의 실천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부단한 훈련과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실패하고 좌절한 후 일어나 그것을 이룰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실천적인 삶은 우리에게 점점 더 큰 힘을 제공하는 가속의 원리를 제공합니다. 여러분 올림픽 경기 중에서 어느 경기가 제일 재미있으세요? 저는 올림픽 경기를 볼 때 꼭 보고 싶어 하는 경기가 있는데, 뭐 같으세요? 저는 100M달리기를 제일 좋아합니다. 100M달리기를 보면 너무너무 재미있습니다. 왜냐하면 불과 10초안에 모든 것이 끝나잖아요. 그런데 그 10초안에 경기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과 수고와 애씀이 있었겠어요. 그 10초안에 조금이라도 모든 집중을 흐트러트릴 수 없습니다. 그 집중된 순간 폭발적인 힘, 그리고 10초안에 모든 것이 끝나야 하는데 그 10초를 위해서 수년간 정말 노력했던 모든 것이 결정되는 순간에 1초에 정말 단 순간에 집중도 흐트러트릴 수 없는 것 그와 같은 긴장된 순간을 바라보며 정말 짧은 순간에 그 모든 스트레스가 다 풀리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어려운 것을 즐겨야 합니다. 힘든 것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내게 있어서 넘어졌을 때 그것을 일어나는 삶의 습관들이 우리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주어져야 합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죠. 우리 믿음의 사람은 실제적인 삶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좋은데 능력이 없어. 그것은 잘 안 맞는 말이에요. 믿음이 있으면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늘 말씀드렸죠? 오늘도 따라해 봅시다. ‘영력, 지력, 체력, 업무능력, 인격 및 매너’ 이와 같은 다방면에 모든 힘이 조합되어서 우리는 능력이라고 얘기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깨달음, 그리고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적인 권세 이와 같은 영력이 없다면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무슨 능력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지혜와 지식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와 지식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체력, 영적인 침체의 대부분은 육신의 침체에서 옵니다. 목사도 너무 피곤하면 기도가 안 되더라고요. 너무 피곤하면 기도가 안 돼요. 때로는 몸이 약해질 때는 마음도 위축되는 것 같아요. 여러분 우리가 성도로서 몸의 건강을 위해서 애쓰는 일은 영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운동하는 것은 육적인 일이 아니라 영적인 일이에요. 우리가 건강을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노력하는 것은 이것은 영적인 일이에요. 그러니까 건강해지기 위해서 운동을 안 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아주 불성실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는 건강하기 위해서 우리 나름대로 주어진 여건 속에서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업무능력, 우리가 영적인 사람으로 모든 업무가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서의 업무, 교회에서의 업무, 가정에서의 업무, 또 인간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 그와 같은 일에 능숙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격 및 매너, 자 오늘도 따라서 합시다. ‘분당중앙교회 성도들은 최고의 매너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매너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 내가 이 말을 하면 상대가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될까? 내가 이 행동을 하면 상대가 어떤 기쁨을 가지게 될까? 근본적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매너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세상에서 처음에는 능력으로 평가를 받지만 시간이 지나면 인격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능력이 있어, 능력이 없어 그것가지고 평가받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그 다음에 인격으로 평가를 받게 됩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그 사람이 싫은데 어떻게 합니까?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그 사람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는데 어떻게 합니까? 결국 만나지 않게 됩니다.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영적인 인격과 훌륭한 매너를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자. 아무리 유능해도 가다보며 넘어지고 아무리 열정이 있어도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때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씀드렸죠? 목표가 생기면 열정이 생깁니다. 열정이 생기면 실천이 있고 삶의 실제적인 결과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과정 중에 필수적인 것은 중간의 어려움이고 어려움을 극복함으로 우리는 새로운 진보의 장으로 나아갑니다. 너무나 많은 진보의 역사가 실수와 실패를 통해 극복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어려움과 모험을 즐기고 삶의 고통과 아픔을 진보와 성숙을 위한 필수적인 코스로 누려야 합니다.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삶의 장벽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자신 있을 때가 언제였습니까? 내 위에 모든 여건이 갖추어져 있을 때가 아니라 어떤 어려움도 내가 극복할 수 있겠다는 마음에 확신이 섰을 때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발전과 성숙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함으로 말미암아 내게 오는 어려움이 내 부족 때문이라고 인정하고 그것을 가슴아파하며 진보를 위한 기회로 삼을 때 우리에게는 큰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용기없는 사람의 특징이 뭐죠? 다른 사람을 핑계합니다. 주어진 상황을 핑계해요. 자신 없고 용기 없는 사람은 늘 사람을 핑계하고 상황을 핑계합니다. 용기 있는 사람은 폭풍우의 장면으로 나아가 그 장면 속에서 극복을 통하여 진정한 승리를 이루게 됩니다. 한번하면 능력이라는 말도 결국은 시도해야 그 일을 이루게 되고 한번 그 일을 이루게 될 때 우리 마음속에 자신감을 습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어려움을 싫어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을 피하고 마음에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한다면 우리의 한계 영역을 결코 확장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고백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에게는 분명한 삶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를 이끌어가는 삶의 동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살아도 죽어도 그것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삶의 분명한 목표가 있고 우리는 그 삶의 목표 때문에 삶이 실천화 되며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넘어져도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돈하고자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꿈과 소원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확고한 삶의 목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목표가 있는 사람은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오직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목표는 우리 삶에 실천을 이루게 되며 어떤 난관도 극복하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하나님의 성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자 우리 한번 따라서 합시다. ‘저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제 자신을 믿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믿어야 합니다. 자 다시 한번 여쭤 볼게요. 여러분 자신을 믿습니까? 이것은 교만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내 자신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내 자신을 믿어야 합니다. 내 자신에게도 믿음이 없고 나 하나도 제대로 확신하지 못하면 우리는 어떤 일에도 자신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적어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 자신을 믿는다. 내 판단을 믿고 내 결정을 믿고 어떤 결과에도 나는 흡족하고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자신있고 우리는 결코 실망하지 않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우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과에 대한 책임도 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우리는 과거의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주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2006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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