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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사 6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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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 영상물(다큐멘터리 『평양대부흥』) 잘 보셨습니까? 1907년 평양에서 있었던 부흥운동을 재조명한 영상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성경공부를 잘 해야 됩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기독교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역사 속에서 교회와 성도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살펴보면서 신앙의 교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모델을 얻고, 때로는 신앙의 책망과 자극을 받기도 합니다. 흔히 “역사는 거울”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공식 선교사가 들어온 것은 1885년 4월 5일이었습니다. 지금의 인천인 제물포 항에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셀러 목사 가정이 입국한 날입니다. 그 전에도 복음이 간헐적으로 들어온 것이 사실이지만, 공식적으로는 이때를 복음 전래의 기점으로 잡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어둠으로 비유할 만큼 모든 면에서 어려웠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결국 얼마 못 가서 일제의 강점으로 식민 통치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암울한 시대에 복음의 빛을 비춰 주셔서 우리 민족이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오늘날의 눈부신 발전을 이루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며칠 전 신문 보셨나요? 중국 사회과학원이 국내총생산(GDP), 군사력, 외교력, 자연자원, 인적 지원, 정부 조정통제력, 정부통신 등 9개 부문에 걸쳐 종합국력을 평가한 결과 세계 9위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 연구보고가 얼마나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작은 나라가 일제의 강점, 6.25 전쟁, 끊임없는 사회적  혼란 등을 거치면서 어느 새 이렇게 됐나 생각하면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이만큼 우리나라가 발전한 배경에는 선교 120년 역사 속에서 내한 선교사, 교회, 그리고 많은 성도들의 역할이 컸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 한국교회가 5만 교회, 1200만 성도의 교세를 자랑하는데, 이런 교회 부흥이 국가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한국교회가 예전 같지 않다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양적 성장이 멈추었다는 둥, 전도가 안 된다는 둥,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는 둥,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세상의 존경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둥 ... 부정적인 말들이 많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2006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시점에 과연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부흥’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부흥입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 전체가 부흥의 모델로 1907년에 있었던「평양대부흥운동」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1910년 한일합방을 앞두고 일제의 야욕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둠 속에 있던 이 민족에게 복음의 빛을 비춰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의 역사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이 역사적인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시련을 극복하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룩하는 영적인 기초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지하는 대로 오늘날 우리나라의 모습이 긍정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정치, 경제, 안보, 사회, 교육, 문화적으로 혼란스럽고 위태로운 모습이 마치 어둠처럼 우리 마음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우리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항상 교회 역사는 세상 역사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 세상을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짧은 교회 역사지만 잘 관찰해 보면, 교회가 부흥되고 바로 서 있을 때는 나라와 민족도 부흥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정체되고 분열되고 혼란스러울 때는 국가적인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제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다시 한번 부흥의 역사를 창조해야 됩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 시대적 인식 속에 다시 한번 부흥의 역사를 만들어 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2006년 교회 표어를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정한 것입니다.
  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이사야 60장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이 금년 한 해 우리 교회와 성도 각자에게 기대하시는 뜻을 생각해보기를 소원합니다.   

  본문은 BC 7세기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범죄와 타락으로 국운이 쇠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분위기였습니다. 실제로 얼마 못 가서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포로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고, 그 후에 만민에게 복음의 빛을 발할 것이다 ...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것은 1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 귀환을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님 이루 신약시대 기독교회의 모습을 예언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오늘 우리 교회, 그리고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함으로 하늘의 영광을 얻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일어나라 : 영적 각성과 부흥의 촉구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유롭게 신앙생활 하면서 이마만큼 살게 된 게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위기 때마다 보호해주시고, 도와주신 은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선배들이 순교를 각오하고 믿음을 지키고, 눈물로 기도한 덕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안일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겁니다. 마치 나의 모습이 내 능력과 노력으로 된 것처럼 자만하고, 나도 모르게 세상의 죄악 가운데 물들어가고 있다면 심각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의 원인이 바로 그런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조상들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신앙을 계승하지 못하고, 신앙의 명맥만을 겨우 이어갔던 형식적인 신앙생활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찾고 “주여! 주여!” 했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조상이 물려준 신앙도 팔아먹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도 놓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혹시 그런 잘못을 범하고 있지 않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순수성과 열정을 상실하지 않을까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 1절은 말씀합니다. “일어나라!” 여러분,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복과 부흥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안일한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무능력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침체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나태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죄악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① 죄악의 자리에서 :
  우리가 혹시 죄악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거기서 속히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한다 하면서도 때로는 타성에 젖고, 나 자신도 모르게 세속의 죄악에 물들기 쉽습니다. 한번 죄악에 물들면 잘못인 줄도 모른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게 됩니다.

  야곱이 그랬습니다. 그가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 축복권을 빼앗은 후 에서의 원한을 피해 밧단아람으로 도망갑니다. 빈들에서 지쳐 잠자던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는 하나님께 타향살이를 지켜주시면 고행 가나안에 다시 돌아와서 벧엘에 성전 짓고, 십일조 하고 하나님만 잘 섬기겠다고 서원합니다. 하나님은 20년 동안 야곱을 지켜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형 에서가 아직도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두려운 나머지 울고불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에 에서의 마음을 녹여줍니다. 전격적인 화해가 이뤄진 겁니다. 그런데 야곱이 위기를 모면하자 변심했는지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으로 빠져서 거기 정착하고 삽니다. 겉으로 볼 때는 잘 먹고 잘 살았겠지만 어디까지나 죄악의 자리였습니다. 그때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족 추장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합니다. 분개한 야곱의 아들들이 쫓아가서 살인극을 벌입니다. 이제 야곱 족속은 오도가도 못 하고 말살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자 다급해지 야곱은 하나님께 다시 매달리게 되는데, 그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창35:1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 ” 일어나라는 겁니다. 그때 야곱이 회개하며 집안에 있던 모든 이방 신상을 제해 버립니다. 기가 막힌 일이죠. 믿음의 족장 집안에 이방 신앙이 웬 말입니까?

  우리도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아직도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죄악과 세속적인 습관을 끊지 못한 채 죄악의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거기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하나님 앞에 불합당한 게 있다면 회개하고 다시 얼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② 무능력의 자리에서 :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갖가지 어려운 일들이 닥쳐옵니다. 그럴 때마다 애쓰고 힘써 보지만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기도해도 안 될 때는 정말 낙심이 됩니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전능자이십니다. 어제까지 안 된 것도 오늘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가능한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일어서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 보면 베드로가 성전에 가다 앉은뱅이 걸인을 만난 사건이 나옵니다. 돈도 없었지만 몇 푼 도와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를 일으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외칩니다. 행3:6 “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 ” 그러자 앉은뱅이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걷고 뛰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은 찬미합니다. 그는 평생 앉은뱅이 신세, 걸인 신세였습니다. 무능력의 자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보면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38년 된 병자가 일어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를 고쳐주시기 전에 질문을 합니다. 요5:6 “네가 낫고자 하느냐?” 얼른 보면 너무 이상합니다. 병자 중에서 낫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당한 것을 묻는 것은 오히려 실례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병자의 마음속에 믿음을 일으켜 주시려는 의도입니다. 이 병자는 오랜 세월 아프면서 그 마음에 점점 패배의식이 가득 찼습니다. 그 마음이 주저앉아 있는 겁니다. 그런 상태에서 육신을 일으켜도 사람 구실을 못합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먼저 믿음으로 일으켜 주고자 한 겁니다. 그 후 그는 병상에서 일어나 걷게 됩니다.

  우리는 무능력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럴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의 모습만 보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무능력과 좌절의 자리에 앉은 채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어려운 상황이라고 모두 포기했습니까? 주님 바라보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③ 침체의 자리에서 :

  우리가 신앙이 좋은 것 같아도 때로는 슬럼프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침체의 늪에서 헤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속히 그 자리에서 과감하게 일어나야 합니다. 새 힘을 얻고 전진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가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그는 용맹스럽고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갈멜산에서 우상 선지자(바알,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상대해서 승리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열왕기 19장을 보면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아합왕의 왕비 이세벨이 체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혼비백산 도망칩니다. 로뎀나무 아래서 의기소침한 채 죽기를 구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한심합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그럴 수 있습니다. 이게 영적인 슬럼프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그를 위로합니다. 일으켜 세워서 먹을 것을 주고 격려합니다. 마침내 엘리야는 새 힘을 얻고 호렙산으로 달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새로운 사명을 받아 잘 감당하게 됩니다.(왕상19:5 이하)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침체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주저앉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고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신앙의 타성이 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늘 생동력 있는 신앙을 유지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 성도들이 스스로 신앙의 나태와 타성에 젖어 있는 게 솔직한 현실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신앙의 열심을 내야 합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따라 부흥해야 합니다. 초대 성도들은 그 신앙이 순수하고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주일성수의 삶을 실천했습니다. 예배를 사모하고, 주일은 절대적으로 지켰습니다. 수십 리, 심지어 수백 리를 걸어서라도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하던 시절이었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 반드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말씀읽기와 기도 생활에 힘썼습니다. 특히 평양대부흥운동을 계기로 길선주 목사 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새벽기도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악습과 구습을 단절하고 성결한 삶을 실천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애국자들이었습니다.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중에 절반 이상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I

  우리는 이렇게 좋은 신앙 전통을 잘 계승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조상들의 신앙으로 이만큼 잘 살게 된 것을 잊지 말고, 이제는 그들의 신앙을 우리가 계승하고 실천해야 됩니다. 그것이 “일어나라!”는 주님의 멍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신앙이 새로워지고 부흥되면 개인도 살고, 가정도 살고, 교회도 갈고 나라와 민족도 살 줄로 믿습니다.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대로 됩니다. 그리고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심령에서부터 회개와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면 나라와 민족에 소망이 있습니다. 대하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2] 빛을 발하라 : 복음 전도의 사명 촉구

  영적으로 각성되고 부흥되면 자연스레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끼리 신앙생활 하다 겨우 천국에 들어오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복음의 빛을 받았으면 우리가 반사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1절~3절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우리 성도들은 빛을 스스로 발하는 ‘발광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기에 그것을 받아 비추는 ‘반사체’가 됩니다. 이것이 곧 복음 전도의 사명입니다. 마 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시대가 복음을 전하는 데 정말 힘든 때입니다. 그러나 전도의 사명은 항상 최선을 다해 감당할 과업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라고 외칩니까? 딤후4:2~4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기대는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평생 예수 믿으면서 나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엄청난 수치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 큰 부끄러움이 될 겁니다. 

  우리는 기적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 복음화, 직장 복음화, 지역 복음화를 이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 민족이 복음화되고, 세계가 복음화되는 일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주신 지상명령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금년에는 꼭 전도대상자를 세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함으로 영혼 구원의 귀한 사명 잘 감당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세계 선교에도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나라가 현재 선교사 1만 4천명을 파송함으로 세계 2위의 선교국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년 후면 1위로 부상한다는 예상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선교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들도 지금 선교를 많이 하는 것 같지만 무려 85%의 교회가 선교에 무관심한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하는 일과 선교하는 일에 결코 소홀히 함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탈랜트 김혜자 권사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을 읽어보면 그분이 아프리카와 최빈국들을 돌면서 선교와 구호사역을 한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그 비참한 상황을 들러본 한 여인이 하나님께 불평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마 본인의 심정이 그랬겠죠. “하나님! 당신은 왜 이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그래 맞다. 그래서 널 보내지 않았느냐?” 무슨 말입니까? 흔히 사람들은 말은 무성하게 잘 합니다. 비판도 잘 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변화되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사명을 감당할 사람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도 하지 않을 겁니다. 남을 탓하기 전에 우리 먼저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금년에 전도 목표를 세우고 가족과 이웃을 주님께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계선교를 위해 물질도 드리고 기도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복음 전도가 최고의 애국애족이요, 인류애의 실천이요, 최고의 복지정책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도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물론 나 자신의 삶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에 우선선위를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의 생활을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 개개인과 이 나라와 민족을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무쪼록 2006년 한 해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 말씀을 붙들고 새 힘을 얻으시고 복음전도에 힘씀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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