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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이 원하시는 지도자상(2) (눅 11:4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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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어느 총각 선생님이 시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학교에 가려면 개울을 건너야 했습니다. 개울에는 돌로 된 징검다리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하루는 징검다리를 건너다 돌이 미끄러져 내려감으로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옷이 흠뻑 젖은 채로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들을 보시고 ‘물에 빠졌구나. 그런데 돌은 바로 놓고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니요.’라고 대답하자 어머니가 ‘그래 가지고 무슨 선생이냐? 빨리 가서 돌부터 바로 놓고 와서 옷 갈아입어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는 그날 이후 ‘돌을 바로 놓고 왔느냐?’는 어머니의 말씀을 새기며,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솔선수범하는 훌륭한 교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오는 율법사는 유대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들이었습니다. 유대인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반드시 아이들에게 탈무드를 가르쳤습니다. 히브리어의 '아버지'라는 말에는 '교사'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톨릭에서 신부를 가리켜 대부, father라고 부릅니다. 이는 아버지라는 히브리어가 교사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자기 아버지보다 교사를 더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와 선생님이 함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구할 기회가 없다면 당연히 선생님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유대인 세계에서는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의 위치가 중했습니다. 특히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율법사들의 권위는 대단히 컸습니다. 율법사들은 바리새인들에게 모든 사상적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사들은 일반 바리새인들과 자기들은 다르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도매금으로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책망하시고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심한 모욕감을 느끼며 예수님께서 항변을 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율법사들은 해박한 성경지식을 자랑했으며 성경학자들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대단히 강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을 도매금으로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큰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우리까지 모욕하시는 겁니까?”하고 항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사들에게 세 가지 잘못을 책망을 하시며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내용을 검토하면서 제자들을 어떤 지도자들로 키우고자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I. 솔선수범하는 실천가가 되라(45-46).

46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당시 율법사들은 모세의 율법 십계명 외에도 성경에는 613개의 율법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금지 조항이 365개이고, 적극적으로 지켜야 할 실천 조항이 248개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613개의 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은 책이 미쉬나라는 것입니다. 이 미쉬나를 쉽게 설명해 놓은 책이 탈무드입니다. 그런데 미쉬나에 보면 안식일에 대한 규례가 39조가 있습니다. 각 조마다 6개 항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대한 규칙이 234개 항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보면 안식일에는 부부 동침도 하지 못하게 했고, 물도 긷지 못하게 했고, 짐승을 타는 것, 새나 고기를 집는 것, 금식도 못하게 했습니다. 또 오리 이상 걷지 못하게 했고, 병도 못 고치고, 새알 크기의 돌보다 무거운 짐을 옮기지 못하게 했습니다. 음식을 요리하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안식일 법 외에도 미쉬나에는 손 씻는 정결예법에 관한 것이나 농사법, 축제법, 여자에 관한 법 등이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규례들이 먹고 살기도 힘든 백성들에게는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안식일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사들은 손가락 하나도 이 짐에 대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에게는 무거운 멍에를 지우고, 자기들은 그 법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다른 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 법에 의하면 자기 집에서 1000m까지만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집 앞 길 끝에 줄을 가로질러 매면 거기에서부터 1000km를 갈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 집 앞길에 줄을 가로질러 매 놓으면 안식일에 전혀 구애됨이 없이 여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안식일에는 밧줄에 매듭을 맬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인이 허리띠를 매는 것은 금지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사들은 안식일에 두레박을 여인의 허리띠에다 매고 물을 길렀다고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안식일에는 짐을 운반할 수 없습니다. 짐은 보통 손이나 가슴, 어깨로 운반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손으로 짐을 운반해서는 안 되지마는 손등으로 운반하는 것은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도 손등으로 짐을 옮겼고, 또 입으로 짐을 옮기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율법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해박한 성경 지식으로 자기들의 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이래라 저래라 하며 백성들만 못살게 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성경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그 마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소원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은 자기의 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 하는데 쓰일 뿐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자기를 맞추어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에 성경을 아전인수 격으로 맞추어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영적 권위가 있을 리 없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되려면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사건이 나옵니다. 남의 더러운 발을 씻겨 주는 일은 종들이 하는 아주 천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 발은 절대로 씻길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씀을 듣고는 머리까지 씻겨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예수님은 서로 높아지고자 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 겸손한 삶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제자의 공동체 안에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필요성을 느꼈지만 아무도 그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로 눈치만 보고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지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일을 솔선수범하여 본을 보이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서로 발 씻기는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도 교회생활을 하면서 우리 공동체에 부족한 부분이 발견됩니다. 그러면 먼저 느끼고 깨달은 사람부터 솔선수범하여 본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솔선수범하여 헌신하는 자에게 영적인 권위를 부여하십니다. 좋은 영향력을 소유한 지도자로 세워 주십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은 자신의 동상 제막식 전날 오산학교의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기 내 동상이 이렇게 섰지만 내 생각에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내가 똥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화장실이 수세식이 아니라 푸세식이었습니다. 재래 화장실은 겨울만 되면 변이 얼어붙어서 산처럼 높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치우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강 선생이 손수 도끼로 그것을 찍어냈습니다. 그때마다 얼었던 똥이 튀어서 입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상 제막식이 지나고 5일 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는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시체를 땅에 묻어 썩히지 말고, 뼈를 생리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이 연구하는 데 쓰게 하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필요성은 느끼면서도 아무도 하려하지 않는 그 일을 솔선수범하여 행하는 지도자가 바로 존경받는 지도자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1-3) 여기서 장로들은 믿음의 선배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고 했습니다. 선배의 위치에 있는 분들은 범사에 후배들에게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후배들은 선배들의 말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배웁니다. 주님께 충성하라는 가르침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충성하는 모습을 보고 배웁니다.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보고 배웁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가정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님의 말을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보고 배웁니다. 가정에서 부모님들이 경건하게 살면 자녀들은 그 부모로부터 경건한 삶을 배웁니다. 가정에서 부모님들이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고, 훌륭한 신앙인으로 살면 자녀들은 기도를 배우고, 찬송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삶을 배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녀들에게 짜증을 내면 자녀들도 짜증내는 것을 배웁니다. 교회에서의 삶이 다르고 가정에서 삶의 다르면 자녀들은 그런 생활을 배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삶은 자녀들에게 본을 보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직장에서도 필요를 느끼면서도 아무도 그 짐을 지려고 하지 않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그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솔선수범하여 그 짐을 지고 남들보다 고생하면 자연스럽게 영적인 리더십이 생깁니다. 처음에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난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내함으로 그 짐을 짊어지면 결국 마음으로 존경과 사랑과 신뢰를 얻게 됩니다. 21세기는 영향력 있는 지도자를 요구합니다. 요령만 피우고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은 점차 도태되고, 솔선수범하는 상사만이 직장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사들에게 화가 있다고 선언하신 것은 그들의 거짓된 삶이 가져올 파국을 미리 경고하신 것입니다. 남은 열심히 가르치고 정작 자신은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바울은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했습니다. 남을 가르친 후에 자신이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면 결국 버림 받게 된다는 진리를 알고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II. 역사의식을 가진 지도자가 되라(47-52).

47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서기관들은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을 위해서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는 조상들의 무덤이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이사야는 톱으로 켜서 죽이고, 스가랴는 돌로 쳐 죽였습니다. 51절을 보면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벨은 성경의 첫 책 창세기에 나오는 순교자요, 사가랴는 성경의 마지막 책 역대하에 나오는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사이에 무수히 많은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이렇게 그 조상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와 사도들을 죽이고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사들은 그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을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 주고 잘 가꾸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 줍니까?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와 사도들을 죽인 죄를 인정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48)

그런데 율법사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49) 이 말씀대로 조상들이 죄악을 정죄하고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면서도 자신들이 동일한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 23:30) 과연 이들이 조상들이 살던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선지자를 죽이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신앙이 어릴 때는 복음서를 공부하면서 내가 빌라도였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지는 않았을 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라면서 내가 빌라도의 입장이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은 상황이 다를 뿐이지 그런 입장에 처하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율법사들도 자기들이 그때 살아 있었더라면 그런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그들은 조상들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를 죽이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인 조상들을 욕하면서도 자신들도 동일하게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그런데 인간은 바로 그런 모순된 존재입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는 자식들은 나는 커서 절대로 술을 안 마신다고 다짐을 하면서 성장합니다. 그러나 커서 술주정뱅이가 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보고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술을 안 마셔야 한다는 것은 관념적으로 배운 것입니다. 그러나 술을 마시는 것은 보고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면 술을 찾게 되고, 결국은 아버지와 같이 중독자가 되는 것입니다. 못된 시어머니 밑에서 못된 시어머니가 납니다. 시머어니에게 시집살이를 혹독하게 한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미워하면서 동시에 시어머니를 배우게 됩니다.

이처럼 율법사들은 조상들이 물려준 죄를 본받아 살 뿐 아니라 점점 더 죄질이 나빠졌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저주가 얼마나 큰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50,51절을 보십시오.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이들의 죄악은 그 어느 때의 사람들보다 더 악독한 죄악입니다.

결국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이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때 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습니다. 그이후로 이천 년 동안 나라를 잃고 온 세계로 흩어져서 유리방황하게 되었습니다. 2차 대전 때에는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나치들에게 학살당했습니다. 결국 선지자, 곧 하나님이 보내신 종들을 죽인 모든 피 값을 그 세대가 다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을 볼 때 나는 다르다고 하면서 역사가 주는 교훈을 배우지 않을 때 똑 같은 죄를 반복할 수밖에 없음을 보게 됩니다. 역사가 주는 교훈을 깨닫고 자신의 삶에 적용시킬 줄 아는 사람이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역사의식이란 역사의 교훈을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려는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게 됩니다. 율법사들이 조상들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인 죄악을 깨닫고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조상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종들을 핍박하고 죽였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나는 조상들과 다르다는 의로운 생각을 버리고 나도 그럴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할 때 동일한 죄의 요소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진실하게 회개하게 됩니다. 그래야 역사의식이 생기고, 죄의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나는 다른 바리새인들과 다르고, 나는 조상들과 다르다는 교만한 생각을 품고 있는 한 죄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결국 엄청난 화를 자처하게 됩니다. ‘나도 똑같은 죄인이다. 나도 그 입장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는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게 되고, 죄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지도자는 역사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역사의식이란 지나간 역사를 보고 자신을 깨우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실패의 역사를 보고 자신의 죄악을 깨우치고, 성공의 역사를 보고 믿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의 사건을 통해서 실패를 반복하지 않게 되고, 성공의 사건을 통해서 승리를 향하여 담대히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또 칠병이어로 사천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빵문제로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막 8:17-21) 우리가 역사의식을 가지고 실패를 거울삼고, 승리를 모범을 삼아 끊임없이 자신을 가르치며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로 성숙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I. 바른 지식을 가진 말씀의 종이 되라(52-54).

52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지식의 열쇠를 가졌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풀어내어 사람들에게 깨우치게 할 사명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잠언에 보면 지혜가 집을 짓고 어리석은 자를 초청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그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잠 9:1-6) 여기에서 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근본입니다.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고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의 열쇠를 가져갔다는 것은 바로 지혜의 집,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키를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사들은 그 열쇠를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아 버렸습니다. 이들은 온갖 규례와 유전을 만들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대치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아도 십일조만 잘 내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자기들이 만든 규칙으로 하나님의 법을 묻어버렸습니다. 사소한 조항들과 사람이 만든 규정들에 복종하는 것이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만든 유전으로 천국 문을 막아 버렸습니다.

이들은 율법에 나타난 복음의 계시를 깨닫지 못하고, 율법을 잘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서 온갖 부칙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지웠습니다. 구원의 왕국에 이르게 하는 계시의 본질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입니다. 이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입니다. 그런데 율법사들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기들도 깨닫지 못하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도 못 들어가게 막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좀더 분명하게 그들의 죄악을 밝혔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3-15)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 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마 13:52) 부자 집의 곳간에는 항상 묵은 곡식과 새 곡식이 함께 있습니다. 주인은 용도에 따라서 묵은 곡식과 새 곡식을 그 곳간에서 내어다 사용합니다. 이처럼 천국의 서기관들도 구약과 신약 말씀을 영적인 곳간에서 필요에 따라 내어오는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언제 어디서나 자유자제로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성경선생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록한 마태복음을 보면 구약 성경에 정통했으며,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 옛것을 적절하게 인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천국을 위하여 훈련된 성경선생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신구약 성경 말씀을 사랑하고 깊이 연구하여 빼어난 말씀의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젊은 종 디모데에게 권면했습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전 2:15). 또 자신을 가리켜 오직 진리만을 나타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후 4:2)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진리를 나타내고자 하나님 앞에서 힘써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복음진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밝히 증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향하여 화를 선포하신 것에 대한 반응이 어떠합니까? 53,54절을 보십시오.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 가지 일로 힐문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잡고자 하여 목을 지키더라.” 그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여러 가지 일로 예수님을 힐문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듣고 그들의 마음을 더욱 완악해졌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꼬투리 잡으려고 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들의 숨은 죄를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냅니다. 그때 사람들이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율법사처럼 완악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베드로처럼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사들에게 화를 선포하심으로 제자들에게 어떤 지도자들이 되어야 하는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첫째는 범사에 솔선수범하는 지도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역사의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을 가르치는 지도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지 아니하고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복음의 계시, 복음진리를 확실히 깨닫고 양떼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열쇠를 가진 말씀의 종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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